'아프니까 예술이다'?..'열정페이' 강요받는 청년건축가들

이원광 기자 2015. 11. 27.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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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역사' 국내 유명 건축사무소 '파견' 채용 후 '나몰라라'..19시간 근무, 교통비·주말수당 '그림의 떡'

[머니투데이 이원광 기자] ['50년 역사' 국내 유명 건축사무소 '파견' 채용 후 '나몰라라'…19시간 근무, 교통비·주말수당 '그림의 떡']

서울의 한 대학에 붙은 기업의 채용 현수막. / 사진=뉴스1

#"회사가 파산 했습니다. 급여를 줄 의무가 없습니다."

5년제 건축대학을 졸업한 A씨(여)는 2009년 'B건축사 사무소'의 합격 소식을 전해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50여년전 설립된 B사무소는 이후 1000여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등 '한국 현대 건축의 산실'로 불리는 꿈의 사무소였다. 입사는 5년간 작업실에서의 쪽잠과 밤샘의 보상처럼 느껴졌다.

A씨의 꿈은 연봉계약 때부터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했다. 1개월의 사내 교육이 끝날 무렵 연봉계약서에는 A씨 소속이 '㈜B도시'로 기재돼 있었다. 반면 기존 B사무소의 직원들은 '㈜B건축' 소속이었다. 이에 대해 사측은 "우리는 다 같은 B사무소 소속이지만, 조직이 커지고 인력이 늘어나면서 신입사원들을 B도시 소속으로 배정한 것일 뿐"이라고 했다. 실제 B건축과 B도시 직원들은 한 곳에서 일했고, 작업 역시 회사의 구분이 없었다.

그러나 회사가 경영난을 겪으면서 A씨의 꿈은 악몽이 됐다. 2012년까지 밀린 급여는 2000만원이 넘었다. 사측은 "어렵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기다려달라"고 했다. 결국 노동청에 신고해 채당금 형태로 일부를 받았지만, 1200여만원은 여전히 체불 상태다. 이후 사측의 태도도 돌변했다.

B건축은 지난 2월 회생절차를 통해 정상화됐지만 B도시는 4월 끝내 파산 선고를 받았다. 사측은 "B도시가 파산해 법적으로 급여를 줄 의무가 없다"고 했다. 결국 B사무소의 한 지붕 아래서 일했던 직원들 중 B도시 소속으로 일했던 직원 29명은 회사를 상대로 임금청구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파견직 형태로 채용한 뒤 임금을 떼먹는 일명 '파견 횡포'로 청년 건축가들이 고통받고 있다. 전문직으로 여겨졌지만 B사무소와 같은 '탈법적' 파견 고용이나 임금 체불, 수당 없는 초과 근무 등에 시달리고 있다. 힘겨운 법정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A씨는 "주변에선 80, 90년대 건축가를 떠올리며 전문직이라며 치켜세우지만 현실은 팍팍하다"며 "'건축은 예술'"이라고 한숨지었다.

◇청년 건축가들 "하루 근로시간 19시간…교통비·주말수당은 '남의 얘기' = A씨를 포함한 옛 B도시 소속 직원들의 소송에 대해 B건축 관계자는 "B도시는 B건축과 다른 회사로 과거 관계사 중 하나일 뿐"이라며 "B건축이 회생을 하니 B도시 소속 직원들이 뒤늦게 문제삼는 것 같다"고 말했다. 특히 B건축은 법정에서도 "바쁠 때만 B도시 건축가들을 끌어다 썼다"며 '동일한 공간에서 사실상 공동의 업무를 진행했다'는 B도시 직원들의 주장을 부인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년 건축가들의 열악한 사정은 비단 경영난에 빠진 B사무소만의 일은 아니다. 한 대형설계사무소는 한달에 평균 2.75건에 달하는 프로젝트를 마감하면서 프로젝트 1개당 평균 10일간, 하루 평균 19시간의 강도 높은 업무를 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무소에 근무했던 C씨는 "그럼에도 초과근무수당은 3000원에 불과하고 이마저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고 했다.

야간 교통비를 주지 않거나, 월급에서 떼는 사무소도 부지기수였다. 대형설계사무소에서 일했던 D씨는 "야근비는 최대 25만원인데, 택시비가 하루 2만원씩 들어가니 항상 적자"라며 "주말에 고작 2만원을 주면서도 회사는 '건축가들이 돈 보고 일하나'며 당연한 듯 대했다"고 전했다. 건축가 E씨는 "대중교통이 끊길 때까지 줄야근을 하면서 택시비를 회사 경비로 결제했는데 월급서 제외됐다"며 "찍힐까봐 항의조차 못했다"고 고개를 숙였다.

규모가 작은 설계사무소를 지칭하는 일명 '아뜰리에' 건축가들은 더 열악한 상황이다. F씨는 "초과근무수당이나 근로자의 날 휴무는 그림의 떡"이라며 "월급이나 제 때 나왔으면 좋겠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어 "여름과 겨울 휴가 합쳐서 공식 휴가는 5일인데 이마저도 이틀 이상 붙여가는 경우는 없다"고 아쉬워했다.

◇건축업계 '부침' 속 노동 약자 '속출'…"도제식 환경에 반발 어려워"= 청년 건축가들이 최악의 취업난 속에서 노동 약자로서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건축업계가 부침을 겪으면서 정당한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데도 비좁은 채용 문 탓에 부당한 대우를 그저 버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것.

김은정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간사는 "건축업계는 이직할 회사가 한정돼 있고, 도제 시스템과 강한 인적 네트워크로 이뤄져 있다"며 "다른 업계로 갈 각오가 아니라면,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제기는 사실상 어렵다"고 설명했다. 이어 "경험을 쌓는 것과 별개로 정당한 노동환경을 보장받는 건 당연한 일"이라며 "어느 분야, 현장이든 노동법이 지켜져야 한다는 인식을 갖고, 관리·감독 의무를 갖는 당국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원광 기자 demi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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