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셰프의 맛있는 미학] 요리사와 예능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2015. 11. 26.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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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컨을 돌리면 요리사이고, 다시 돌려도 식당이라고 한다. 갑자기 왜 이렇게 우리가 요리에 지대한 국민적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걸 두고 요리의 시대라고들 한다. 다양한 해석이 나온다. 모든 고상한 취미에 질려서 찾아낸 대중의 호사라고도 하고, 먹는 일의 귀중함을 뜻한다고도 한다. 취직도 안되고, 그나마 다니던 직장도 잘렸으니 어려운 고민하지 말고 집에서 텔레비전에 나오는 음식이나 보면서 다 잊으라는 처방 같기도 하다. 유행인 것도 같고, 모종의 정치적 암시처럼도 여겨진다.

하루 세끼는 세상사의 모든 진리를 넘어서는 실체적 존재다. 높은 곳에 앉아 호령하는 권력자도 결국은 세끼의 엄중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고, 그 정언은 먹어야 살고, 먹는 일을 그만두게 될 때 깨끗하게 사라지게 되는 인간사의 명쾌한 결론을 압축한다. 그래서 요즘처럼 음식과 요리에 대한 높은 관심이 예사롭지 않다.

텔레비전을 틀면 요리사가 나온다. ‘쿡방’(요리하는 방송)의 미래를 묻는 질문도 나온다. 요리사가 화면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적은 제작비로 높은 시청률이 나오니까 말이다. 요리사들은 여전히 이른바 ‘예능’에서 즐겨 다룰 것이다. 지금처럼 하얀 옷을 떠들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활용을 도모할 계획도 있을 것 같다. 요리 방송의 원조인 영국과 미국, 일본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이 높다. 영국의 ‘스타 셰프’ 원조 격인 고든 램지와 제이미 올리버를 부렸던 방법을 쓸 수도 있겠다. 그것은 예능 안에서 공익성을 내세우는 것이다. 그들 영국인 요리사들이, 오븐이 집안에 있지만 한번도 불을 켜지 않은 집에 들러 그레이비소스와 로스트비프를 가르쳐서 요리의 즐거움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아니면, 강연장에 들러 외발수레 가득 실린 설탕을 쏟으며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는 달콤한 청량음료와 인스턴트식품을 공격하듯이 말이다. 우리 예능에는 이경규의 양심냉장고와 가난한 이에게 베풀었던 집 고쳐주기 캠페인 같은 전력이 있다. 그것의 한계는 뚜렷했지만, 마냥 무용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저 잘생기고 착하며, 더구나 요리솜씨도 좋고 말도 잘하는 한국인 셰프들을 좁은 스튜디오에 몰아넣고 농담이나 나누는 존재로 더 이상 놔두지 않기를 바란다. 물론 말재주 경연과 찰나의 웃음을 유발하는 다양한 설정들이 전파를 타는 게 무람한 일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기왕이면, 세상에 그들을 던져서 써먹기 바란다. 짜장면 한 그릇을 바라는 낙도 소년 방문 같은 건 어떤가. 언젠가 리처드 용재 오닐이 시골소년들과 한여름을 보내며 나누던 따뜻한 눈빛과 연주의 열정에 우리가 웃음과 눈물을 흘렸듯이 말이다.

박수 칠 때 떠나라는 절묘한 제목이 생각난다. 박수 칠 때 이 정도들 하시고, 요리사들을 쓸 만한 곳에 써먹으면 좋겠다.

<박찬일 |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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