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취업 준비도 못한다

김경민 기자 2015. 11. 26.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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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요즘 최대 고민은… 글쎄요, 돈?" 의외의 대답이었다. 군 제대 후 몇 년간 취업 준비에 매달려 온 그에게 고민거리를 물었을 때, 당연히 '취업' 혹은 '진로'라는 답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취업준비생(취준생) 4년 차 박진영씨(30)는 05학번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대학 졸업학기를 다니고 있다. "졸업학기만 10학기째"라고 말하는 그의 입가에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는 학과에서 유명한 '화석선배'다. 화석선배는 취업 전까지 졸업을 미루고 학생 신분을 유지하는 고학번 선배들을 화석으로 비유한 표현이다. 극심한 취업난을 반영하는 신조어다.

최근 그는 대출을 알아봐야 했다. 그의 어머니가 충치 치료를 받는 데 200만원 정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홀로 두 남매를 키운 어머니였다. 무직자이기 때문에 박씨가 의지할 수 있는 건 제2금융권 대출뿐이었다. 그마저도 과거 두 차례 신용카드 대금 연체 이력 탓에 높은 이율을 감당해야 하는 불리한 조건들뿐이었다. "200만원이면 남들에게는 한 달 월급인데, 내게는 마련하기 쉽지 않은 목돈이다. 이번에 대출을 알아보면서 자존감이 바닥을 쳤다. 지금까지는 언론사와 공기업 취직만 고집했었는데, 이번 일을 겪으면서 일단 아무 데나 계약직이라도 취업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취업준비생들은 공휴일이나 방학에도 쉴 수 없다. ⓒ 시사저널 구윤성

그는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 이동하는 시간 말고는 단 1분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하루 중 오전 시간은 오롯이 취업 준비를 위한 시간이다. 일어나자마자 학교 도서관으로 향한다. 도서관에 도착한 그는 학교 컴퓨터로 인터넷 토익 강의를 듣고, 국가직무능력표준(NCS) 문제집을 푼다. 올해부터 130여 공기업·공공기관이 채용 전형으로 채택한 NCS는 산업 현장에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는 능력을 산업 부문별, 수준별로 체계화한 것이다. 정부가 개발한 NCS 모듈을 바탕으로 2017년까지 전체 302개 공공기관이 채용 과정에 NCS를 도입할 예정이다. 박씨처럼 공공기관 취업을 희망하는 취준생들이 반드시 공부해야 하는 시험 과목이다.

점심은 가장 저렴한 1700원짜리 '학식(학생식당)' 음식으로 해결한다. 점심을 먹고 졸음이 쏟아지는 낮 시간 동안 그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인문계열 적성을 살린 논술학원 답안지 채점 아르바이트다. 건당 6000원. 대면 첨삭 지도까지 하면 두 배를 받는다. 논술학원 강사로 뛰는 학교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 그의 손에 들어오는 논술 답안지는 한 달에 200건 정도다. 생활비를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박씨는 이렇게 매달 150만~200만원 정도를 번다. 이 중 매달 50만원을 어머니께 보내드리고 나머지를 기본적 생활비와 취업 준비비용으로 사용한다.

그가 10월에 사용한 비용은 123만3000원. 대학가의 원룸 월세 비용과 식비·교통비 등으로 나가는 기본적인 생활비 69만7000원을 제한 53만6000원이 취업 준비에 들어가는 비용이다. 전체 지출금액의 43.5%에 해당한다. 그의 10월 수입은 140만원. 수입의 38% 가까이를 취업 준비비용으로 사용한 셈이다.

그의 지출 내역 가운데 특히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게 수험료다. 토익, 토익스피킹, NCS, 한국사 등 그가 지불한 시험 수험료만 합쳐 16만9000원이다. 한 권에 2만원 안팎 하는 교재들은 중고로 구입해도 1만원 이상이다. 영어 강의나 취업 컨설팅 강의라도 들으면 20만~30만원이 추가된다. 한 달간 교육비 명목으로 지출되는 금액이 50만원을 넘는 건 예사라고 한다.

"돈 없으면 취업은커녕 취업 준비도 힘든 세상이다. 한 달 지출의 절반이 교재비·수험료 등 취업 준비비용으로 나간다. 20대 초반에도 돈이 없어서 남들 다 가는 어학연수 한 번 못 갔다. 요즘 면접에서 외모도 스펙이라는데 면접용 성형·화장은 꿈도 못 꿀 사치다."

취준 1년 차, 취업 준비로 한 달 120만원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최재연씨(28)의 모바일메신저 프로필에 새로운 사진이 떴다. 그는 국내 대기업 계열사 기획 부서에 다니다 연봉과 적성 문제로 지난해 퇴사했다. 퇴사 직후 퇴직금으로 잠시 동안 해외여행을 다녀온 후 다른 대기업의 인사 부서에 재취업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취업재수생이다. 그는 일주일에 두 개의 취업 준비 스터디를 하고, 한 개의 취업 과외를 받는다. 최씨가 입사를 희망하는 회사 선배가 제공하는 원포인트 과외다. 주 2회씩 총 8회에 1인당 30만원이다.

최씨가 지난 한 달간 취업 준비 명목으로 지출한 비용은 119만7000원. 앞서 본 박씨가 한 달간 쓴 비용의 두 배가 넘는다. 회사별 인·적성 검사 교재와 기출문제 모음집, 면접 컨설팅비까지 포함된 비용이다. "취업 준비에는 아낌없이 지출하는 편이다. 지금 아끼기보다는 돈과 시간을 팍팍 투자해 빨리 취업하는 게 결국 돈 굳는 거라고 생각한다."

최씨는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는다. 모아둔 월급을 쓰고 목돈이 필요할 때면 부모님께 손을 벌린다. 대학교수인 아버지가 여전히 현직에 있고 몇 년 전까지 어머니가 맞벌이를 해서 경제적으로 넉넉한 편이다. 최씨는 "내가 모아둔 월급을 다 쓰더라도 부모님이 1~2년 정도는 (내 재취업을) 기다려주실 수 있다고 하셨다"며 "가계 부양의 부담이 없어 내 시간을 온전히 취업 준비에 쏟을 수 있다"고 말했다.

88%가 "취업 사교육비용 부담 된다"

취준생 100만명 시대다. 11월11일 통계청이 발표한 '10월 고용 동향'에 따르면, 취준생은 63만7000명으로 전년 동월에 비해 8만2000명(14.7%) 늘어났다. 이 통계는 실제로 학원 수강 등을 통해 취업 준비를 하는 사람만 집계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실질적으로 취준생 숫자가 이미 100만명을 넘어섰을 것으로 본다. 알바나 단기 인턴을 하면서 다른 직장을 구하는 실질적 취준생의 수와 일단 대학원에 진학한 후 취업 준비를 하거나 입사 후 1년 안에 이직을 꿈꾸는 잠재적 취준생을 포함하면 그 수는 대폭 증가할 것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통계청 결과에 따르면 10월 취업자 수가 2629만8000명으로 5개월 만에 최고 수치를 기록했다. 여기에 청년층(15~29세) 고용률 증가(41.7%)와 청년 실업률 감소(7.4%)라는 통계적 결과에도 불구하고 취준생들의 취업시장 체감온도가 낮은 이유다. 박윤수 한국개발연구원(KDI) 연구위원은 "청년 실업률 하락이 반드시 고용 상황 호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많은 취준생은 외부의 시선과 불확실한 미래 속에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격화되는 취업 경쟁 속에 취준생들은 더 높은 취업 성공률을 위해 많은 비용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취업 준비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은 결코 만만한 수준이 아니다.

"돈이 없으면 취업은커녕 취업 준비도 힘들다"는 한 취준생의 말은 오늘날 취준생들이 놓인 현실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아르바이트 전문 포털 '알바천국'이 취준생 810명에게 '취업 사교육비용 현황'을 물은 결과, 월평균 26만8600원을 취업 사교육에 쏟는 것으로 나타났다. 1년간 발생하는 취업 사교육비용만 322만3200원에 달하는 셈이다. 취업 준비 기간이 길게는 수년까지 이어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매년 사회적으로 발생하는 이 금액은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실제 취업 사교육비용에 대한 경제적 부담감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88.4%가 '부담 된다'고 답했다. 각종 자격증 취득과 언어능력시험 응시에 드는 수험료는 수만원을 호가한다. 취업 스펙의 기본이라고 불리는 영어능력시험 토익의 경우 한 번 응시에 4만2000원이며 회화능력시험인 토익스피킹은 7만7000원이다. 한 번 만에 원하는 성적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업별 인·적성 모의고사를 치기 위해서도 응시료를 낸다.

경제적으로 부담스럽다고 지불하지 않을 수 있는 비용도 아니다. 공기업에 들어가려면 NCS를 반드시 봐야 한다. 대다수 기업에서는 지원 시 영어 성적 제출이 기본항목이다. 여기에 다른 지원자들과 차별화하기 위해 제2외국어 시험 성적, 컴퓨터 활용 능력 자격증, 여타 자격증까지 채워넣기 바쁘다.

"자격증, 시험 성적 기재란이 버젓이 있는데 아무리 필수항목이 아니라도 빈칸으로 낼 순 없지 않나. 취업 선배들도 '한 줄이라도 채워넣어라'고 조언한다. 기본 중의 기본만 한다 해도 한 달에 10만원은 우습게 깨진다."

대기업 입사를 희망하는 취준생 박정열씨(27)는 "기업 공채를 앞두고 있거나 어학능력시험이 몰린 시기에는 수험료와 교재비 명목으로만 한 달에 20만원도 쓴다"며 "뭔가 하나라도 새로운 시험을 보려면 교재부터 새로 사야 하기 때문에 들어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하소연했다. "이제는 대학 졸업만 하면 취업이 되는 게 아니다. 갈수록 취업 경쟁이 격화되면서 별도로 취업 준비를 해야 하는 시대가 됐다."

취업 준비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비용이 발생함에 따라 취준생들 사이에서도 양극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난 7월1일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가 발표한 '청년 구직자 취업 준비 실태'에 따르면, 청년 구직자들의 44.3%가 가족의 지원을 받아 취업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족 지원'에 이어 '스스로 취업 준비비용을 마련한다'(27.4%)와 '스스로 마련한다'(27.2%)가 그 뒤를 이었다. 청년 구직자의 일부는 대출을 받기(0.6%)도 했다.

"주변 사람들 시선이 불편해 혼자 먹고, 연락도 끊고 지내지만 나처럼 돈이랑 시간 아끼려고 혼자 움직이는 경우도 많다. 아무래도 여럿이 함께 공부하면 같이 밥도 먹고, 커피도 사먹게 된다. 돈 아끼려고 밥도 혼자 먹고 공부도 혼자 하고 있다."

취준생 1년 차 송지혜씨(31)는 "버는 것도 없는데 쓸 일은 많다"며 "조금이라도 다른 지출을 아끼려다 보니 자연스레 혼자 움직이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과 멀어졌다. 일주일에 두 번 나가는 스터디 멤버들과 사적인 교류는 하지 않는다. 일주일 내내 그가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은 엄마뿐이다. 그는 "외로움도 사치"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음 말로 넘어갔다. "돈 없는 것도 서럽지만 스터디 멤버를 구할 때 경력직만 찾는 것도 서럽다."

송씨는 최근 한 취업 준비 스터디에서 탈락 통보를 받았다. 스터디 멤버 자격 사항에 기업 경력자를 우대한다고 돼 있었다. 송씨는 기업 실무 경험이 없었지만 대학 시절 교환학생 경력과 출판사 아르바이트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해당 스터디에 지원했다. 스터디 지원서에 "빡센 스터디 커리큘럼을 잘 따라갈 자신이 있다"는 각오까지 써넣었다. 하지만 결과는 탈락. '저희 스터디는 ALL(모두) 경력자 출신 취준생으로 구성하고 있다'는 답변이었다.

스터디 멤버 충원에 경력직 선호

경력직 선호 현상은 취업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취준생 시장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실제로 많은 스터디에서 기업에 근무한 경력이 있는 취준생이 우대받고 있었다. 취준생들이 스터디 멤버로 경력자를 선호하는 것은 실무 경험을 바탕으로 기업이 원하는 것을 잘 알고 실무 노하우를 공유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이다. 송씨는 "나 역시도 경력자가 있는 스터디에서 취업 준비를 하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지원한 것"이라며 아쉬움을 달래면서도 "스터디란 게 취업을 하기 위해 하는 건데 여기에서도 경력을 원한다. 경력직 중에서도 대기업일수록 더 높이 평가해주는 분위기다. 나 같은 초보는 취업 준비 시장에서부터 설 자리가 없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취준생 시장에서의 경력직 선호 현상은 어려워진 취업 시장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는 것이다. 취업 준비 스터디에 들어가기 위해 서류전형은 물론 면접까지 보는 건 이제 비일비재하다. 이병훈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취업 준비라는 것도 비용이 드는 행위다. 지난 10여 년간 일자리 수요에 비해 공급이 과잉되면서 취업 경쟁이 심해졌고 취업 준비비용의 발생은 자연스럽게 취업 준비 양극화로 이어졌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취준생들은 "이런 일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며 "오죽하면 취준생의 적(敵)은 취준생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한다. 이래저래 웃을 일보다 서러울 일이 더 많은 대한민국 취준생들이다.

김경민 기자 / kkim@sisapres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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