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만 있는 게 아니다, '집술'도 있다
[오마이뉴스 허시명 기자]
지난 주말(11월 21일), 나는 서른여덟 가지의 술을 마셨다. 정성스럽게 차려주는 술을 앉은 자리에서 마셨으니 신선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그 술들은 상품화된 술이 아니라, 집에서 빚은 술들이었다.
그 술을 맛본 곳은 경기도에서 주최한 제6회 가양주 주인 선발대회 심사장. 지난 여름에 지원서를 받았는데, 청주 부문은 사흘 만에 지원자가 100명을 넘어서 105명으로 마감됐고 탁주 부문은 87명이 지원했다. 중복 지원이 금지돼 있어서 192명이 자기 이름을 걸고 술을 출품했고, 그중 각각 서른두 점이 예선을 통과했다.
각 부문 6점이 최종 결선에 올라 치열한 경합을 벌였다. 대상 수상자는 32세의 정세리씨였다. 지원한 사람들의 숫자도 놀라웠고, 우승자가 젊다는 것도 놀라웠고, 출품된 술맛들이 좋았다는 점은 더욱 놀라웠다.
이쯤 되면 '집술의 등장'을 이야기할 때가 됐다는 생각이다.
1934년부터 1995년까지... '집술의 암흑기'
▲ 술을 빚어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면 |
ⓒ 허시명 |
지난 61년 동안 내려진 집술 금지령은 일제 강점기 총독부의 통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정략적 차원에서 시작됐고, 전쟁과 전후 복구와 군사정권의 시기를 거치면서 연장돼 왔다. 세원 포착이 가능한 양조장 중심의 상품 술만 유통케 하고, 집술은 금지했다. 이 금지령은 시민 생활권의 규제로 간주돼 1995년에 자신이 소비하는 술은 직접 빚을 수 있게 되면서 풀리게 됐다. 그렇게 집술이 등장한 지도 20년이 흘렀다.
집술의 등장은, 요즘 부는 집밥 열풍과도 비교해 볼 만하다. 직장인들의 쫓기는 삶 그리고 맞벌이 부부와 독신 생활자의 증가가 집밥의 존재를 부각시켰다. 방송 채널마다 다투듯이 편성하는 '먹방 프로그램'은 이런 세태를 반영한다. 누구나 쉽게, 냉장고의 재료를 꺼내 간단하게 집밥을 차릴 수 있다는 것은 많은 행복을 담고 있다. 여기서 집밥은 엄마의 밥으로 회귀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해먹는 새로운 노동의 발견이기도 하다.
예전에 집에서 빚던 술의 큰 목적은 '봉제사 접빈객',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찾아온 집술 바람은 다르다. 내 몸의 일부가 되는 음식을 내가 직접 해 먹겠다는 정신이 담겨있고, 술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하려는 희망이 담겨있다.
감미료로 맛을 내거나, 규격화되고 대량 생산되는 맛의 단조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소비자의 욕구도 담겨있다. 어찌 보면 생산자와 소비자로 분명하게 분리되어 있는 세계를 깨려는 의도도 담겨있다. 이를 통해 집술은 자기 표현이자, 다양한 맛을 추구하려는 취미의 영역을 구축해나가고 있다.
술 빚기는 어렵다? 그렇지 않다
▲ 지난 21일 열린 가양주 주인 선발대회 행사장에서 술빚기 시연을 보이고 있다. |
ⓒ 허시명 |
막걸리는 누룩만 구하면 된다. 쌀과 물은 집에 있다. 아파트 생활자가 전국민의 절반이 넘어선 지금, 아파트는 술빚기에 최적의 온도를 갖추고 있다. 누룩은 재래시장의 쌀가게에 가거나 술의 도구를 파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데, 동네 마트에 들어올 날도 머지않았다.
쌀로 고두밥을 찌고, 누룩을 빻아 섞어서 거실 한쪽 벽면에 두면 열흘 뒤 향긋한 술이 완성된다. 맥주나 소주처럼 불을 이용하여 오래 끓이지 않아도 되고, 와인처럼 오랫동안 숙성하지 않아도 된다. 20세기 초기에 외국인의 눈에 비친 막걸리는 술을 빚었다기보다는 방치했다고 말할 정도로 술 빚기가 간편했다. 지금도 여전히 간편하다.
▲ 2015 가양주 주인 선발대회 입상자들 . |
ⓒ 허시명 |
"술을 빚어 술자리에 가져가면요, 그 술이 떨어지기 전까지 적어도 30분 동안은 제가 주인공이 됩니다."
집술을 빚다가 양조장까지 차린 강원도 홍천의 전통주가 예술의 정회철 대표의 말이다. 술은 내 이름을 걸기 좋고,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멀리 가져갈 수 있고, 적은 양으로도 여럿이 맛볼 수 있는 매력적인 액체다. 이 시대에 집술의 등장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자, 그를 감동시키는 선물의 재발견이다.
[허시명의 술 생각]
○ 편집ㅣ김지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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