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그만둔 사람들, 왜 제주로 올까

황보름 2015. 11. 25.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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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제주를 달리다 30] 그 스물일곱 번째 날

[오마이뉴스 황보름 기자]

6시가 조금 넘어 잠에서 깼다. 러닝복으로 갈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지난 1주일은 주로 일정이 끝난 늦은 오후에 달렸다. 달리지 않은 날도 물론 있었고. 오랜만에 아침에 달리러 나오니 뛰기도 전에 마음이 개운하다. 금방 용두암에 도착했다. 바로 앞에 바다가 있다. 바다를 바라보며 기지개를 시원하게 쭉 켠 후, 몸을 요리조리 움직여 밤새 굳은 근육을 풀었다. 자, 달리자.

용두암에서부터 시작되는 해안도로는 이호테우해변으로 이어진다. 이호테우해변까지는 아마 10km가 조금 안 될 것이다. 오늘 아침엔 적당히 뛰기로 했다. 5km만 달려야지.

일주서로 따라, 10km 완주한 그날

나는 얼마 전 난생처음 10km를 달렸다. 모슬포항 근처 게스트하우스에 묵으면서 가파도에 다녀왔던 날이었다. 일주서로를 따라 5km를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루트였다. 뛰는 동안엔 구름과 바람이 가장 적극적인 응원꾼이 돼 주었다.

달리는데 '후억, 후억' 거친 숨소리가 절로 나왔다. 가끔은 한숨이 푹 쉬어지기도 했고, 7,8km를 달릴 즈음에는 너무 힘이 들어 욕도 나왔다. 차도에 차는 별로 없었다. 무엇보다 10km를 달리는 중 거리에서 만난 사람이 한 손가락에 세어질 정도로 적었다. 그간 제주에서 달렸던 거리 중 이 거리가 가장 좋았다. 일직선 도로에다가, 평평하고, 한산하고, 또 거친 바닷바람도 없는 것이 그랬다.

혼자 맹렬히 달리고 있는 데 재미있는 일을 겪기도 했다. 스쿠터를 타고 지나가는 짓궂은 여행객 두 명이 '헛둘, 헛둘' 하며 구령을 붙여주는 거였다. '더 달려, 달려!'하며 어린 목소리의 남자가 장난을 쳐왔다. 한 번 째려봐 줄까, 아니면 같이 장난을 쳐줄까 하다가 그냥 모른 채 했다. 째려볼 힘도 장난 칠 힘도 없었으므로.

한 동네 주민 할아버지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달리는 내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모자 안으로 얼굴을 쑥 들이밀기도 했다. 어느 처자가 이리 달리나 싶었던가 보다. 혹, 아는 처자인가 궁금했을 것도 같고. 갑자기 들이닥친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나는 조금 더 뛰어가다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 에세이 <먼 북소리>에서 읽은 일화가 번쩍 생각나서였다.

그리스 미코노스 섬에 머물러있던 하루키는 언제나처럼 달리고 있었다. 그런 그를 할머니 두 명과 할아버지 한 명이 '어이, 젊은이' 하며 돌려 세운다. 멋모르고 다가온 하루키와 어르신들의 대화는 아래처럼 이어졌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왜 이 길을 달리는 게요?"
"달리기를 좋아해서요."
"그 말은, 무슨 볼일이 있어 달리는 건 아니라는 뜻이군?"
"볼일은 없습니다."
"어디까지 달릴 생각이오?"
"슈퍼 파라다이스 비치까지요."
"거기까지 꽤 먼데."
"예, 그렇죠."
"쭉 달려가는 거요?"
"예, 달리기를 좋아하니까요."
"왜 해변까지 달려야 하죠?"
"달리기를 좋아한다니까요, 할머니."
"달리기는 몸에 안 좋아요."
"암, 그렇고말고."
"우리 집에 들러 우조라도 마시고 가요."
"감사합니다만 시간이 없어서요."
"우조는 몸에 좋은 술이에요."

할머니들과 할아버지는 하루키의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도통 이해하지 못했다. 왜 달리는 지를 헤아릴 수도 없어하는 것 같았다. 네 명의 대화가 재미있어서 나는 이 부분만 반복해서 몇 번을 읽었었다. 이 책을 읽을 때만 해도, 나는 어르신들 입장이었다. 달리기는 무슨, 왜 사서 고생을 하는가.

하루키는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은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달리러 나올 때마다 엄청난 의지가 필요하다. 아주 가끔은 몸이 간질간질해지면서 마구 뛰고 싶어 지기도 하지만, 이런 적은 별로 없다. 가파도를 다녀온 그 날도 '꼭 뛰어야 한다'며 의지를 불태운 끝에 달린 거였다.

10km를 달리면서 때때로 생각했다. 나는 왜 이 고생을 자처하고 있는가. 달리는 내게는 분명 하나의 선택권이 쥐어져 있었다. 멈춰 서는 것. 달리기를 그만둔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테고, 오히려 나를 놀리듯 구령을 붙여주는 사람을 만날 일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날 나는 끝까지 달렸다. 중간에 한 번도 멈추지 않고 달렸다. 멈추는 걸 선택하지 않은 것이다.

10km 완료 알람이 울리고 딱 선 그 순간, 나는 웃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느낌이 내게도 전해져 왔다. 헉헉 하는 숨소리 사이사이로 터지는 기분 좋은 웃음. 나는 이 웃음이 좋아서 달리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고 나면 행복 같은 것, 벅참 같은 것이 느껴져서 참 좋다. 달리는 과정은 아직은 내겐 너무 힘이 들기만 하다.

용두암 해안가를 달린 오늘 역시 기분이 좋았다.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니 남은 하루에 대한 부담이 사라진다. 몸을 살짝 풀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왔다. 아침 7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왜 제주에 올까

 용두암 해안가 벤치에 앉아서
ⓒ 황보름
 하늘에 구름길이 열렸다. 비행기가 지나간 흔적.
ⓒ 황보름
아직 이른 아침이기도 하고, 특별히 할 일도 없기에 씻고 다시 침대에 누워버렸다. 한 명, 두 명 일어나 나갈 채비를 하는 룸메이트들. 룸메이트들과 말을 주고받으며 책을 읽다 말다 하며 시간을 보냈다. 중간에 아침을 먹고 돌아온 후 그대로 더 계속 누워 있었다. 그렇게 체크아웃 시간까지 누워있다가 용두암 해안가로 나왔다.

구불구불한 해안가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각종 횟집과, 식당, 편의점, 카페들. 그중 2층이 있는 카페를 골라 들어가 창가에 앉았다. 음료수를 쪽쪽 빨며 바다를 멍하니 바다보다 노트북을 꺼내 그간 메모해놨던 글들을 죽 훑어봤다. 그리고 새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제 식이랑 오토바이를 탔던 이야기와 오늘 아침 달린 이야기까지.

그렇게 두 시간 정도 앉아 있었을까. 갑자기 갑갑함이 느껴진다. 바다를 앞에 두고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나 싶다. 나는 얼른 노트북을 덮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몸은 피곤했지만, 걷고 싶었다. 점심을 대충 먹고 해안도로를 거닐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새 어스름이 지고 있다.

어둑해진 저녁, 벤치에 앉아 나는 이번 여행에서 만났던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모든 게 어색하기만 했던 첫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났던 사람들. 이름 모를 한국인 두 명과 중국인 어머니와 그 딸, 그리고 한국말을 아주 잘 했던 대만 소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말없이 조심스럽기만 하던 중국인 어머니가 이튿날 우리 방에 있던 모기를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모두 잡아주던 모습이 기억나 그때처럼 웃음이 빵 터졌다. 어머니의 활약으로 방에 있던 모두가 실컷 웃을 수 있었는데.

이후 매번 게스트하우스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다. 당연히 우리는 만났다가 곧 헤어졌고 그중 인연이 깊은 몇 사람들과는 이후로도 연락을 이어 오고 있다.

제주에서 만난 사람 중엔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길에 오른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이거 저거 생각하고 싶지 않아 여행을 왔다고 했다. 제주에서 푹 쉬며 머리를 탈탈 비우고 싶어 했다. 나는 궁금했다. 바람대로 머리를 탈탈 비우고 나면 미래엔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런데, 왜 제주일까. 머리를 탈탈 비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왜 제주로 오는 걸까. 딱 떠오르는 생각은 '섬이라서?'였다. 지난 삶과의 연결고리를 끊고 싶은 사람들에게 섬, 제주는 탁월한 공간일 터였다. 섬이라는 물리적 단절이 정신적 단절을 한층 용이하게 해줄 테니까. 연결을 끊는다는 말은 그 자체로 머리를 탈탈 터는 걸 의미하는 지도 모른다. 그렇게 과거와 연결을 끊고 새로운 생각이나 삶에 연결되고 싶은 사람들은 제주로 여행길을 오른다.

나처럼 바다 때문인 사람도 있을 테다. 어느 곳으로 가도 그 끝엔 바다가 있는 제주, 이 얼마나 황홀한 곳인가! 바다를 보면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가 자연스레 풀어지곤 한다. 물결을 좇아 시선을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다 보면 어느새 머리가 한층 가벼워져 있다. 바다의 이 기적같은 힘, 이 힘이 사람들을 제주로 불러모으는 것 아닐까.

어제 같이 하루를 보냈던 식이도 회사를 그만두고 무작정 제주에 온 경우였다. 집에 있으면 부모님의 성화에 다시 일을 하게 될 것 같아 제주로 도망 온 거라고 했다. 제주에서 시간을 보내면서 틈틈이 식이는 다음 스텝을 생각해봤단다. 제주를 여행한 후엔 무얼 할까.

"세계여행을 해보려고요. 한 6개월 정도요"라고 식이는 어제 말했다.

여행을 와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떠오른 다음 스텝이 또 다른 여행이라는 게 웃기기도 하고 또 왠지 그 보다 더 나은 선택이 없어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내게도 왜 여행을 왔는지 물었다. 나도 '머리를 비우고 싶었어요'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럼 다들' 아~'하고 더 묻지 않을 텐데. 사람들이 왜 여행을 왔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매번 조금 당황했다.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너무나 당연한 답을 하곤 했다.

'제주를 여행하고 싶었어요.'

거짓말은 아니었다. 제주를 여행하고 싶었고, 한 달이란 기간을 여행으로 채우고 싶기도 했다. 이번 여행이 한 달이나 여행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꼭 와야 한다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이번 여행을 시작으로 매해 그 어디로든 한 달 훌쩍 떠나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행을 떠나면 그 뒤의 삶은 여행이 알아서 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여행 앞에서 꽤 큰 기대를 했던 셈이다. 여행이 삶을 변화시켜 주기를.

지난 4주를 되돌아보며 생각해보건대, 여행이 내 삶을 크게 변화시켜 준 것 같지는 않다. 나는 여전히 길치이고, 여전히 낯을 가리며, 여전히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여전히 불안하다. 물론, 조금은 덜 미숙한 여행자가 되긴 했지만. 어떤 큰 깨달음이나 자극 같은 걸 받지도 않았다. 삶을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용기나 자신감이 불끈 생긴 것도 아니다. 다만, 내 내부에 어떤 미세한 변화가 있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그게 무언 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알게 될 테다.

해안가에 위치한 10곳의 게스트하우스에 묵고, 걷고, 바다를 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이야기하고 술 한잔 하던 시간들. 지난 이 시간들이 앞으로의 내 시간들에게 전해줄 말들이 무엇일지 나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그저 짐작해 보건대, 대체로 달콤하고 낭만적인 말들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미래의 난, 지난 시간들의 말들에 귀를 기울이다 다시 제주를 찾게 되겠지.

용두암 해안도로를 걷다가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과 과자를 한 봉지 산 후 벤치에 다시 앉았다. 하늘 저 위에 구름 길 하나가 열려있다. 방금 지나간 비행기가 남긴 흔적이었다. 벤치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하늘과 바다를 봤다. 바다 위에는 배들이 떠 있다. 나는 요즘 부쩍 나이가 들었다는 걸 느낀다. 아직 헤어지지 않은 것들에게서도 그리움을 느끼는 걸 보니.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들도 나중이 되면 분명 그리워지겠지. 지나고 나서야 그리움을 느끼는 것보다는, 보고 있으면서 그리움을 느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생각됐다. 조금 청승스러운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리운 마음이 지금 이 순간 내 눈을 더 밝게 해줄지도 모르니.
○ 편집ㅣ장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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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5년 5월 26일부터 6월 24일까지, 30일간의 제주 여행 연재글입니다.
이 기사는 황보름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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