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보니 사장 딸" 드라마는 '금수저'를 사랑한다

방연주 대중문화 비평가 입력 2015. 11. 25.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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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연주의 컬처투르기] ‘수저 계급론’에 체념하는 일일·주말극의 진부함

[미디어오늘 방연주 대중문화 비평가]

‘수저 계급론’이 화두다. 부모의 재산 정도에 따라 자식의 경제적 지위가 결정되는 현실을 뜻한다. 최근 발표된 조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김낙년 동국대(경제학) 교수에 따르면 한국의 경우 부모에게 받은 상속·증여 비중이 1980년대 27%에서 2000년대 42%로 뛰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금·은·동수저’로 분류된 계급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끼워 맞춰보는 씁쓸한 놀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일각에선 스스로를 ‘흙수저’라며 자조하는 분위기까지 팽배해 있다. ‘수저 계급론’은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기엔 적나라하게 현실을 담아냈다. 21세기 ‘신(新) 신분제’라는 말이 그럴싸하게 들릴 정도다. 

팍팍한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 TV를 틀어보자. ‘수저 계급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대답은 ‘아니오’다. 이미 ‘수저 계급론’의 얼굴을 한 콘텐츠들이 쏟아진 지 오래다. 특히 드라마, 장르적 성격이 강한 미니 시리즈보다 긴 호흡으로 가족사를 다룬 일일극·주말극에서 ‘수저 계급론’을 자주 볼 수 있다. 

‘수저 계급론’은 ‘핏줄 코드’, 즉 ‘출생의 비밀’로 표현됐다. 일일극·주말극에선 신구 세대의 조화가 필요한 스토리로 구성해야 한다는 소재적 한계를 풀어내기 위해 ‘출생의 비밀’을 필수인양 넣었다. ‘막장 소재’라는 비판에도 젊은층은 물론 중장년층 시청자를 확보할 수 있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는 흥행 요소로 활용됐다. 

드라마 속 ‘수저 계급론’은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다. ‘출생의 비밀’을 고스란히 재현하는 인물은 대개 여주인공이다. 여주인공은 출생이 묘연하고(?), 가진 게 없다. 사는 게 녹록하지 않은 ‘흙수저’를 대변하면서도 밝고 긍정적 태도로 살아가는 전형적인 ‘캔디형’이다. 

그러다 ‘준 재벌’ 남자와 사랑에 빠지며 계급 상승의 기회를 얻는다. 아니면, 결혼의 장애물이 된 ‘출생의 비밀’이 ‘극적 반전’을 꾀하는 장치로 사용된다. ‘흙수저’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잘 나가는 재벌가의 딸’ 즉 ‘금수저’였다는 이야기. 재력, 권력, 능력으로 상징되는 부모의 자본은 여주인공의 자산이 되면서 극이 고조된다. 

 
 
▲ KBS 2TV 드라마 ‘우리 집 꿀단지’ ⓒKBS
 

멀리서 찾아볼 것도 없다. 현재 방영 중인 일일극에서도 ‘알고 보니 금수저’ 유형이 있다. KBS 2TV <우리 집 꿀단지>는 “학자금 대출과 최저 시급 알바 끝에 사회에 떠밀리듯 나온 청춘들의 이야기”라는 기획의도를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 역시 여주인공이 출생의 비밀을 안고 있다. 오봄(송지은 분)은 학비와 용돈을 벌기 위해 변변한 스펙을 쌓지 못한 인물로 나오지만, 사실 ‘국내 제일 전통주 명가’인 풍길당 사장인 배국희(최명길 분)의 잃어버린 딸이기도 하다. 

SBS <돌아온 황금복>은 또 어떤가. 엄마가 실종된 사건을 바탕으로 딸 황금복(신다은 분)의 진실 찾기를 그린 드라마다. 하지만 온갖 모진 수모와 고생을 겪은 금복(신다은 분)이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을 때, 죽은 줄로만 알았던 엄마 황은실(전미선 분)은 프랜차이즈 사업과 강남의 빌딩을 갖춘 준 재벌로 등장하며 모녀를 괴롭히던 악녀들의 악행을 속속 밝혀내고 있다. 

제작진도 “죽은 줄 알았던 은실(전미선 분)이 모습을 드러내고, 금복이 숨어있는 재능을 맘껏 발휘해 워킹우먼으로 우뚝 서는 모습이 그려지면, 시청자의 속이 시원하게 풀릴 것”이라고 했다. ‘핏줄 코드’로 여주인공의 신분이 반전되는 판타지는 부모의 자산이 자식의 자산이 되는 현실이 드라마에까지 깊숙이 침투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시청자들이 팍팍한 현실을 뒤로하고 잠시 위로를 받거나 대리만족을 하는 드라마에서조차 개인의 능력은 ‘허구’라고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시키고 있다. 판타지가 극대화된 공간인 일일극?주말극은 ‘출생의 비밀’이라는 막장 요소를 반복하면서 ‘수저 계급론’의 그늘을 짙게 만드는 데 일조하고 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출생의 비밀’이라는 소재 자체가 ‘물보다 진한 피’를 보여주기 보다 ‘핏줄보다 강한 부모의 자본’을 스스럼없이 보여주는 장치로 활용되는 듯하다. 

얼마 전 막을 내린 한 예능 프로그램에 연예인 아버지와 함께 출연했던 배우 지망생인 그의 딸이 드라마에 캐스팅 됐다는 소식을 두고 뒷말이 많았다. 그의 딸은 오디션을 통해 정당하게 캐스팅됐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누리꾼들은 결국 연예인 아버지의 ‘문화 자본’을 고스란히 상속받는 게 아니냐며 혀를 찼다. 이를 두고 “금수저가 잘못이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어쨌든 현실의 공간에서도, 판타지의 공간에서도 ‘수저 계급론’의 틀을 벗어나긴 어려워 보인다. 수긍인지, 체념인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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