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하고 기이한 불상, 알고보니 남녀합체불

노시경 입력 2015. 11. 25.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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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기행 ⑩] 하르호린 에르덴 조 사원 기행

[오마이뉴스 노시경 기자]

몽골 원나라의 초기 도읍이었던 하르호린(Kharkhorin)에 와서 보니 과거 역사를 알게 해주는 건축물은 오직 에르덴 조(Erdene Zuu) 사원 뿐이다. 몽골의 수도였지만 터만 남은 왕궁 터 위에 라마교 사원인 에르덴 조 사원이 들어서 있다.

에르덴 조 사원의 건물을 지을 당시 과거 왕궁 터에 남은 건축 자재들을 가져다가 만들었다고 하니 에르덴 조 사원 건물의 이곳저곳에 옛 왕궁의 흔적들이 박혀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에르덴 조 사원 내부. 넓은 경내에 전각 몇 채 만이 드문드문 보인다.
ⓒ 노시경
나는 사원의 박물관을 나와 사원의 담장 안에 펼쳐진 대지와 전각들을 둘러보았다. 에르덴 조 사원은 1586년에 북원(北元)을 지배하던 칭기즈칸의 후손, 아쁘타이 사잉 칸(Awtai Sain Khaan)이 건립을 시작해 300여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조금씩 완성된 사원이다. 사원 안은 텅 비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대지 위에 건물 몇 채 만이 드문드문 보였다. 광활한 사원의 모습이 정말 몽골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하르호린이 수도였다고 믿을 만한 왕성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원나라 당시의 여행가들이 남긴 기록에는 수많은 벽돌 건축물과 2개의 큰 이슬람 사원, 12개의 몽골 샤머니즘 사당이 있었다고 하나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아시아와 중동, 유럽 각지에서 수많은 상인들과 문물이 모이던 세계 수도의 모습은 사라지고 사원의 대지에는 넓은 공원 같은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다.

왕성 터 위에 세워진 에르덴 조 사원도 번성할 당시에는 스투파로 만들어진 담장 안에 60 여 개의 전각과 함께 300개의 게르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의 번성함을 찾을 수 없다. 청나라의 하르호린 침공 당시 하르호린이 쑥대밭이 되면서 에르덴 조 사원도 많은 전각들이 허물어졌다.

몽골이 소련의 영향을 받는 사회주의 국가가 된 이후에도 다른 불교 사원들과 같이 에르덴 조 사원도 파괴되고 방치되었다. 특히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독재 정권이 일체의 종교를 허락하지 않으면서 에르덴 조 사원은 아주 심하게 파괴되어 아예 문을 닫게 되었다. 다행히 에르덴 조 사원을 포함한 몽골의 사원들은 최근에 복원이 되어 외국인들에게도 문을 개방하고 있다.

▲ 석수. 원나라 당시 왕궁을 지키고 있었을 사자상의 모습이다.
ⓒ 노시경
나는 사원 경내의 서문 쪽에 몰려 있는 사원 건물들을 찾아 걸어갔다. 걷다 보니 달라이 라마(Dalai Lama) 전각 앞에 옛 왕궁 터에서 출토된 석조물들이 마치 박물관 외부전시같이 줄줄이 늘어서 있다. 오랜 역사로 뚜렷한 윤곽은 거의 사라진 동물상의 얼굴은 아예 시커멓게 변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손으로 머리를 만지며 기도를 했기 때문이다.

얼굴 부분이 지저분해 보일 정도로 검게 변한 것은 복을 기원하는 신도들이 손에 기름을 묻혀서 동물상을 만졌기 때문이다. 이 사자상들은 몽골의 전성기인 원나라 시대의 왕궁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자상들이다. 이곳을 찾은 몽골의 불교신자들은 쓸쓸한 옛 왕궁 터에 끝까지 남은 석조 동물상을 만지면 그 기가 전해져 복이 온다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 외부 전시물들. 원나라 왕궁 터에서 발굴된 유물들이 줄을 맞춰 서 있다.
ⓒ 노시경
사원 안에 건물의 터만 남은 초지 위에는 거대한 솥 여러 개가 덩그러니 남아 있다. 아내와 몽골 친구가 삭아서 구멍까지 뚫린 솥을 만져보고 있다. 이 솥의 크기만 보아도 과거 에르덴 조 사원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 수 있다.

에르덴 조 사원이 번성할 당시에 일천 명의 스님들이 살았다고 하니, 이곳에 남은 가장 큰 솥은 일천 명에 이르는 스님들의 식사를 준비했을 것이다. 지평선이 보이는 넓은 대지의 나라 몽골답게 불교 사찰도 넓은 초원 위에 호방하게 펼쳐져 있고 수많은 스님들이 수행하면서 사용한 솥의 크기도 크다.

▲ 사원의 솥. 사원 안에 기거하던 천 명의 스님들의 식사를 도맡았던 솥이다.
ⓒ 노시경
달라이라마 전각과 게르 법당 사이에는 라마교 신자들이 이용하는 마니차(摩尼車)가 세워져 있다. 경통 안에 불교의 경전을 담아두고 겉에도 경전을 새긴 둥근 통이 마니차이다. 에르덴 조 사원 안의 마니차는 걸려 있는 높이도 다르고 크기도 다양하다. 남녀노소가 쉽게 경통을 돌리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곳 몽골의 신자들은 불교 법구인 경통을 돌리는 것 자체만으로도 온 몸을 통해 경전을 이해하고 기도도 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 마니차. 몽골의 불교 신자들이 경통을 돌리면서 소원을 빌고 있다.
ⓒ 노시경
가족끼리 온 것으로 보이는 몽골의 여인네들이 마니차를 오른손으로 정성스럽게 돌리고 있다. 마니차는 오른손으로 돌리는 것이 예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마니차를 손으로 돌리면서 중얼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옴마니반메훔(Om Mani Padme Hum)'이다. 티베트 불교에서 주로 불리는 '옴마니반메훔'은 원나라 침입 이후인 고려 중기에 우리나라에도 들어서 익숙한 불교의 진언으로서, 라마교 경전의 의미를 압축하여 담고 있다.

'옴마니반메훔'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지혜에 상응하여 불심을 일으키게 해달라는 뜻이다. 즉 이 신자들은 고통스러운 윤회의 과정을 끝내고 열반으로 인도해 달라며 주문을 외우고 있다. 광막한 초원에서 힘든 삶을 사는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었을 것이다.

▲ 에르덴 조 사원의 스님. 몽골 전통방식 대로 세워진 전각 앞을 한 스님이 걸어가고 있다.
ⓒ 노시경
에르덴 조 사원 경내를 걸어보면 우리나라 불교사찰에서와 같이 통일된 일직선상의 가람배치는 보이지 않는다. 경내의 여기저기에 듬성듬성 전각들이 서 있다. 이 사원을 지을 당시 몽골인들은 불교사원을 지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전각은 분명 티벳과 중국 식의 전통 전각이지만 전각의 위치와 방향은 자신들의 전통 방식대로 자유롭게 정한 것이다.
▲ 3개의 전각. 에르덴 조 사원 안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대웅전 격의 전각이다.
ⓒ 노시경
에르덴 조 사원 경내에서 중심이 되는 전각은 사원의 서남쪽에 자리한 세 개의 전각이다. 세 개의 전각은 바로 북쪽 전각인 '주운 조(Zuun zuu)', 중앙의 전각인 '걸 조(Gol zuu)', 남쪽 전각인 '바론 조(Baruun zuu)'이다. 1586년에 만들어진 '걸 조'가 이 에르덴 조 사원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전각이고, 이후 북쪽과 남쪽에 전각을 세웠다. 가운데 전각인 '걸 조' 앞에 서서 보니 '주운 조'와 '바론 조'가 양쪽에 호위하듯이 서 있다.

우리나라 불교 사찰 구조와 굳이 비교한다면 이 '걸 조'가 대웅전 격인 전각이다. 걸 조의 지붕은 초록색 암기와에 짙은 푸른색, 엷은 푸른색의 수기와, 그리고 지붕 중앙 부분의 황색 수기와가 잡초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고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몽골 친구가 대웅전 외부 문 위에 있는 문양을 손가락으로 가르키면서 설명을 해 준다. 대웅전 문 위의 여러 개 문양이 몽골 국기 안에 있는 황색 소욤보(СОЁМБО) 문양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몽골 국기에 반영된 문양을 담고 있을 정도로 '걸 조'의 몽골 내에서의 위치는 높고 높은 것이다.

▲ 소욤보 문양. 몽골 국기 문양의 기원이 바로 이 에르덴 조 사원의 ‘걸 조’에서 비롯되었다.
ⓒ 노시경
일종의 표의문자인 소욤보 문양 안에 그려진 불꽃, 해, 달과 화살은 바로 이 '걸 조'에 있는 문양에서 비롯되었다. 소욤보 윗부분의 불꽃은 국가와 가정의 번영, 그 아래의 해와 달은 몽골 민족의 융성, 달 아래에 아래쪽을 향하는 삼각형 모양은 화살같이 예리하고 대담함을 나타낸다. 문양의 양쪽에 수직으로 세워진 직사각형은 성의 성벽처럼 몽골을 굳게 지킨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욤보의 문양이 몽골의 자연과 역사를 참으로 잘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 남녀합체불. 남자와 여자의 이원적인 에너지가 합일되는 모습을 형상화한 불상이다.
ⓒ 노시경
▲ 남녀합체불의 표정. 쾌락의 순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함인지 남성불의 표정이 험악하다.
ⓒ 노시경
'걸 조'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려다가 전각 바로 앞의 불교유물 전시관에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이 전시관 안에는 에르덴 조가 파괴되었던 기간 동안에 살아남은 소중한 불교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바깥 세상의 영향으로 사원이 파괴될 때 스님들이 주변의 산에 묻거나 주민들이 집에 숨겨두어서 살아남은 유물들이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 예상치 않은 놀라움이 있었다. 거기에는 어린 아이와 보기에는 민망한 충격적인 불상이 남아 있다.

"이 불상은 부처님이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불상입니다."

나는 불교지식이 깊지 않은 몽골 친구가 잘못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불상은 우리나라 한 박물관에서 기획전으로 열었던 '티벳불교 전시전'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불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설명은 몽골 친구가 말해준 것과는 달랐다.

아내도 몽골 친구가 겸연쩍을 것 같아 남자가 작은 아이를 안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앞으로 몽골에서 가이드 생활을 하겠다는 몽골 친구를 위해 그의 설명이 잘못 되었다고 말해 주었다.

"이 불상은 남녀합체불입니다. 남녀가 성교를 하고 있는 모습이지요. 불교 불상 중 세계 어느 나라의 불교에서도 볼 수 없는 티벳 밀교 특유의 불상입니다. 하지만 티벳 불교의 영향을 받은 몽골의 불교가 타락하거나 성(性)이 개방적이어서 이런 불상이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남성과 여성의 이원적 에너지를 함께 지닌 우주 에너지의 집합체라는 것이지요. 모든 상반되는 원리는 다시 합일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요."

나는 남성을 나타내는 불상의 얼굴이 왜 이렇게 험악한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말하였다. 남녀합체의 순간에 왜 눈꼬리가 올라간 채로 위협적으로 이를 드러내고 있을까? 왜 이렇게 가냘파 보이는 여성을 꾸짖는 듯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을까? 그래도 불상인데 성교의 즐거운 쾌락을 얼굴에서 지우고 짐짓 사원에서의 정숙을 유지하기 위함인가? 아무리 봐도 이성 간의 합일을 나타내는 불상의 모습이 기이하고 기이하다.

나는 유물전시관을 나와 3개의 전각을 향하여 계단을 올랐다. 이 전각들 안에도 기이함이 연속될 것이다. 나는 그 기이함을 찬찬히 뜯어보기로 생각하면서 계단을 올랐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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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약 500 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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