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최다선 '기록의 정치인'.. 의원제명·단식 '反독재 투쟁'

정우상 기자 2015. 11. 23.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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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1927~2015] [YS가 걸어온 길] 거제 섬소년서 민주투사로 경남중 때부터 대통령 꿈.. 1951년 자유당 정계입문 3선改憲 반대하다 초산테러.. 新군부 가택연금 맞서 1983년 23일간 단식

김영삼(金泳三·YS)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 줄곧 '민주투사'의 한 길을 걸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말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대변했다.

◇기록의 사나이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경남 거제에서 어장주인 아버지 김홍조(金洪祚·2008년 작고)씨와 어머니 박부연(朴富蓮·1960년 작고)씨의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제2중학교(현 경남중) 재학시절 하숙집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 붙이고 대통령 꿈을 키웠다. 김 전 대통령은 "일제시대 때는 소설가가 되려 했지만 해방된 후 대통령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1947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가 발발, 1951년에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대학 2학년 때 정부수립 기념 웅변대회에서 외무부장관상(2등)을 받은 것이 정계 진출의 계기가 됐다. 당시 인연을 맺은 장택상 외무장관이 1950년 5월 총선에 출마하며 YS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951년 장택상 의원(훗날 총리)의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YS는 1954년 제3대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당시 세운 최연소(만 26세)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제3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1980년대 정치 규제 조치로 출마하지 못한 11·12대 총선을 제외하면 1992년 총선까지 모두 아홉 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것도 최다선(最多選) 기록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야당 생활은 1990년 3당 합당 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정 참여 제의를 거절했던 YS는 1963년 군정 연장 반대 시위 참여로 구속됐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DJ), 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2차 결선투표에서 DJ에게 패했지만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경선 결과에 승복했다.

1969년 6월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에 반대하다 괴한들로부터 초산 테러를 당했다. 그는 이 사건을 '신민당의 개헌 반대에 대한 중앙정보부의 보복'으로 규정,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1974년 당시 최연소였던 47세 나이에 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반유신(反維新)'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었다.

1979년 김 전 대통령은 YH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을 계기로 가진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정희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는 발언을 했다. 당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이를 "반국가적 언동"이라며 YS의 의원직 제명안을 가결했다. 이때 그가 남긴 말이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였다. 그의 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그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로 유신 시대는 막을 내렸다.

◇목숨을 건 반독재 투쟁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 이후 김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5·17 조치'로 서울 상도동에서 가택연금을 당했다. 그러자 1983년 5월 광주항쟁 3주기를 맞아 '민주화 5개항'과 야당 인사 석방을 요구하며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의 출국 권유에 "나를 시체로 만들어 해외로 부치면 된다"며 거절했고 이를 계기로 민주화 세력은 총결집했다. 이듬해 그는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만들고 1985년 신민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민주투사'로 정치 전면에 나섰다. 신민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고, 이는 1987년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198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은 DJ와의 단일화에 실패했다. 결국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2위(28%)로 낙선했다.

YS와 DJ는 1988년 총선에서 각각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을 이끌고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 선거에서 평화민주당에 밀려 '제2야당'이 된 YS는 1990년 3당 합당이란 결단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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