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화려했지만 고단했던 88년.. 'YS 희귀사진들'

민병기 기자 2015. 11. 23.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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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길.. 온 몸으로 '한국현대사'를 쓰다
‘정치 초년생’ :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67년에 치러진 제7대 국회의원총선거에서 민주당 구파인 유진산계 주도로 설립된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선거유세를 벌이고 있다. 여기서 당선된 이후 김 전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제창하면서 제7대 대통령 출마를 선언한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젊은날 : 김영삼 전 대통령은 27세에 역대 최연소로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9선을 거듭하면서 각종 기록을 쌓았다. 젊은 날의 김 전 대통령이 중절모를 쓴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

중학생때 하숙방 책상앞에

‘미래의 대통령’ 써 붙여놔

반독재·민주화 투쟁 선봉

대통령 직선제·3당 합당

정치판 지각변동 이끌어

1993년 2월 25일 고 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마침내 국민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이 땅에 세웠다.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열망으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는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대변했다. 그는 한국 정치사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 거목답게 헌정사에 깨지기 힘든 숱한 신기록을 남겼다. 무엇보다 32년간의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을 마감하고 문민정부 시대를 연 첫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다.

◇대통령을 꿈꾸던 섬마을 소년, 정치에 발을 딛다= 김 전 대통령은 1927년 12월 20일(음력) 경남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에서 3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중일전쟁이 발발했을 때 장목초등학교를 다녔고 태평양전쟁 때 통영중학교에 입학했던 김 전 대통령은 해방을 맞은 1945년 11월 부산으로 유학, 경남중학교로 전학한다. 하숙방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붓글씨를 써놓았을 정도로 당찬 학창 시절을 보낸 김 전 대통령은 경남고를 거쳐 1947년 서울대 문리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택상 전 국무총리와 인연을 맺은 김 전 대통령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학도의용군에 들어갔다가 전쟁 뒤 장 전 총리의 비서관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평생의 반려자이자 영원한 동지인 손명순 여사와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1954년 3대 총선에서 고향 거제에서 당시 여당이었던 자유당의 공천을 받은 김 전 대통령은 뛰어난 웅변과 일찌감치 닦은 정치 경력을 바탕으로 2만700여 표 차로 압승하며 당선됐다. 당시 만 26세로 최연소 의원이었다.

◇목숨 건 민주화 투쟁= 1954년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 전 대통령은 이후 14대 국회의원직을 스스로 내려놓을 때까지 무려 9차례나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하지만 최연소 의원으로 시작해 최다선 의원으로 끝낸 김 전 대통령의 국회의원 생활은 순탄하기는커녕, 반독재·민주화 투쟁과 이어진 고난의 길이었다.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에 항의해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 창당에 참여한 것이 기나긴 야당 정치인, 평생 반독재 투쟁의 시작이었다.

196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종신 집권 음모”라고 반대했던 김 전 대통령은 상도동 집 앞에서 ‘초산 테러’를 당했지만 그날 오후 국회 연설에서 “싸우다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고 말했다. 1970년 당시 유진오 신민당 총재가 와병으로 물러나자 김 전 대통령은 ‘40대 기수론’을 주창하며 대권 도전을 선언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했다. 하지만 이때부터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본격적인 ‘양김(金)시대’를 열며 한국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다.

1972년 유신체제 선포에 미국에서 급거 귀국했다가 가택연금을 당한 김 전 대통령은 본격적인 반유신 투쟁을 전개했다. 이듬해에는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박정희정부의 ‘테러 행위’라고 강하게 규탄했다.

1970년대에만 4차례 가택수사를 당하는 등 갖은 탄압을 받았지만 1974년과 1979년 잇따라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등 김 전 대통령의 입지는 더욱 굳건해졌다. 1979년 8월 YH 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을 계기로 법원 결정에 의해 당 총재직 직무집행 정지를 당하고 최초로 국회의원직 제명을 당했지만 ‘영광의 상처’로 기억되고 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 3년간 계속된 불법 가택연금에 “나를 힘으로 감금할 수는 있어도 내가 가려는 민주주의의 길, 내 양심은 전두환이 뺏지 못한다”고 맞섰던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5·18 민주화운동 3주년을 기해 23일간 단식 투쟁을 하고,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공동의장에 추대되는 등 갖은 탄압 속에서도 30여 년간 독재정권에 맞선 야당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된다.

◇마침내 이룬 대통령의 꿈= 1985년 2·12 총선에서 신민당 승리를 이끈 김 전 대통령은 이듬해 대통령직선제 개헌 1000만 서명 운동을 주도해 1987년 마침내 대통령직선제까지 쟁취했다.

하지만 정작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단일화에 실패하고 대선까지 패배하며 ‘양김’ 모두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거대한 열망을 ‘사욕’ 때문에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아야 했다.

3년 뒤인 1990년 김 전 대통령이 이끌던 통일민주당은 전격적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총재로 있던 민주정의당, 김종필 전 총리의 신민주공화당과 합당하고 김 전 대통령은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됐다. 3당 합당은 그간 ‘독재 대 민주화’의 한국 정치 구도를 일거에 뒤흔든 사건으로 지금의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3당 합당으로 여당의 대표가 된 김 전 대통령은 1992년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된 뒤 14대 국회의원직을 사퇴해 38년간의 의정 활동을 마쳤다. 그리고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에서 영원한 동지이자 숙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꺾고 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민병기 기자 mingming@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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