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더P][YS서거] 응답하라 1993~1998, 개혁과 사고의 시절

김종훈 2015. 11. 23. 09:4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민주정부 초석 닦았지만 외환위기에 사건사고도 많아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1993~1998년인 문민정부 시절은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시대적 배경이다. 성장의 과실이 생기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많은 개혁도 이뤄진 시기였지만 생각지 못한 각종 사건사고도 발생했던 시기다.

이 시절 김 전 대통령이 단행했던 정치와 정책, 그리고 사회적 사건들을 레이더P가 재조명한다.

◆ 개혁의 시대…5·16 쿠데타 표기·금융실명제·총독부 철거

김 전 대통령의 1993~1998년 시절은 고강도 개혁과 개방으로 민주정부의 초석을 닦은 시기로 평가된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일제시대부터 군부독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재정립하는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에 착수한다.

무엇보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했다. 1993년 취임 10여 일 만인 3월 8일부터 3개월여 동안 파격에 파격을 거듭하며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3공에서부터 5공, 6공에 이르기까지 군내 막강 사조직으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하나회 척결 작업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3월 8일 하나회 출신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육사 17기)과 서완수 국군기무사령관(육사 19기)을 전격 경질했다. 통상 2년 임기를 9개월여 남겨둔 이들에 대한 인사 조치는 '숙군(肅軍)'의 신호탄로 받아들여지면서 군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이후 다시금 군부가 정권을 잡은 사건인 12·12 사태와 5·17 내란을 주도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검찰은 1995년 12월 21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신군부 핵심 관련자들과 함께 구속 기소했다. 12·12와 5·18에 대한 책임 규명은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부정 축재까지 밝혀졌다.

이후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각각 무기징역형과 징역형을 확정 선고받았다. 그러나 1997년 12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하면서 풀려났다.

김 전 대통령은 역사교과서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한 5·16 사태를 쿠데타 혹은 정변으로 표기하게 했다. 한편 10·26 사태가 벌어진 궁정동 안가와 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경복궁 복원했다.

민주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대표적인 업적이 지방자치제 재실시다. 김 전 대통령은 5·16 사태 이후 중단됐던 지자체장 선거를 1995년 6월 다시 실시한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은 국무위원 등 고위직 재산 공개와 금융실명제를 역사상 처음으로 정착시키면서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고강도 사정도 단행했다. 그는 1993년 집권과 동시에 자신과 가족들 재산 약 18억원을 공개한 후 공직자 재산등록을 제도화했다.

그해 8월에는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이는 남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나 비실명계좌를 활용해 재산을 축적하지 못하게 한 조치로, 당시 사회 지도층의 부정축재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OECD 회원국 자부심과 IMF 관리체제 망신 공존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 호황기가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단적으로 1996년 10월에는 선진국 모임으로 알려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해 높아진 한국 위상을 확인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 회원국이었다.

그러나 정권 말기에는 외환 부족으로 외채를 갚지 못하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은 외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긴급 구제자금 20억달러를 융자받았다.

외환위기 원인으로는 동남아시아 금융 불안과 급격한 자본시장 개방이 지적됐다. 김 전 대통령은 OECD에 가입하면서 이전까지 닫혀 있었던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한다. 그런데 당시 동남아시아 금융 불안으로 불안감을 느낀 외국 자본들이 급격히 아시아에서 빠져갔다. 이에 외채를 갚을 달러가 부족해지는 한편 환율이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 각종 인명사고와 김일성 사망, IMF 구제기금 등 다사다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아현동 가스폭발 사고,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아시아나기 추락사고 등 초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한 시점도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때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동 대형쇼핑몰인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6명 등 인명피해가 났다. 부실한 시공과 불법적 용도변경 등 관계와 제계의 총체적 비리가 사고를 빗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 서울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가 1994년 10월 21일 붕괴돼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고 당일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경질됐다. 재건설을 거친 다리는 1999년 재개통됐다.

아현동에서는 1994년 12월 7일 도시가스가 폭발하면서 사망자 12명, 부상자 101명 등 인명피해와 건물 145동, 차량손실 92대 등 피해가 발생했다. 불과 넉 달여 뒤인 1995년 4월 28일에는 대구 상인동에서 지하철공사 도중 가스가 폭발하면서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부상했다. 건물과 차량 등 피해액만 540억원에 달했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에서 서해 훼리호가 돌풍과 파도로 인해 침몰하면서 사망자 292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한편 1993년 7월에는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전남 해남에 추락하면서 68명이 사망했다.

◆ 남북정상회담 무산되며 전쟁 공포 속으로

문민정부는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사망하면서 남북 관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 초부터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호응을 이끌어냈지만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됐다.

이후 북한은 1996년 9월 강원도 강릉에 잠수함을 보내 무장공비 26명을 침투시킨다. 그해 2월 동해에서 실시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문제 삼으며 4월부터 북이 간헐적으로 경비정을 이용해 북방한계선을 넘나들면 항의를 표하던 상황이었다. 정부는 그해 9월 18일부터 11월 5일까지 약 200만명을 투입해 살해된 11명을 발견하고 13명은 사살, 1명은 생포했다.

[김종훈 기자]
[정치뉴스의 모든 것 레이더P 바로가기]
기사의 저작권은 '레이더P'에 있습니다.
지면 혹은 방송을 통한 인용 보도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22일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이끌었던 1993~1998년인 문민정부 시절은 몇 년 전 인기리에 방영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의 시대적 배경이다. 성장의 과실이 생기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고 많은 개혁도 이뤄진 시기였지만 생각지 못한 각종 사건사고도 발생했던 시기다.

이 시절 김 전 대통령이 단행했던 정치와 정책, 그리고 사회적 사건들을 레이더P가 재조명한다.

◆ 개혁의 시대…5·16 쿠데타 표기·금융실명제·총독부 철거

김 전 대통령의 1993~1998년 시절은 고강도 개혁과 개방으로 민주정부의 초석을 닦은 시기로 평가된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일제시대부터 군부독재에 이르기까지 역사를 재정립하는 이른바 '역사 바로 세우기'에 착수한다.

무엇보다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척결했다. 1993년 취임 10여 일 만인 3월 8일부터 3개월여 동안 파격에 파격을 거듭하며 '전광석화'처럼 진행됐다. 3공에서부터 5공, 6공에 이르기까지 군내 막강 사조직으로 탄탄하게 뿌리를 내린 하나회 척결 작업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국민 뇌리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은 3월 8일 하나회 출신인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육사 17기)과 서완수 국군기무사령관(육사 19기)을 전격 경질했다. 통상 2년 임기를 9개월여 남겨둔 이들에 대한 인사 조치는 '숙군(肅軍)'의 신호탄로 받아들여지면서 군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이어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정권 이후 다시금 군부가 정권을 잡은 사건인 12·12 사태와 5·17 내란을 주도한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법정에 세웠다. 검찰은 1995년 12월 21일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전 대통령을 신군부 핵심 관련자들과 함께 구속 기소했다. 12·12와 5·18에 대한 책임 규명은 물론 두 전직 대통령의 부정 축재까지 밝혀졌다.

이후 전 전 대통령과 노 전 대통령은 각각 무기징역형과 징역형을 확정 선고받았다. 그러나 1997년 12월 김영삼 전 대통령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특별사면을 단행하면서 풀려났다.

김 전 대통령은 역사교과서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장악한 5·16 사태를 쿠데타 혹은 정변으로 표기하게 했다. 한편 10·26 사태가 벌어진 궁정동 안가와 총독부 건물을 허물고 경복궁 복원했다.

민주화를 위해 그가 이룩한 대표적인 업적이 지방자치제 재실시다. 김 전 대통령은 5·16 사태 이후 중단됐던 지자체장 선거를 1995년 6월 다시 실시한다.

한편 김 전 대통령은 국무위원 등 고위직 재산 공개와 금융실명제를 역사상 처음으로 정착시키면서 정치권과 사회 지도층을 대상으로 한 고강도 사정도 단행했다. 그는 1993년 집권과 동시에 자신과 가족들 재산 약 18억원을 공개한 후 공직자 재산등록을 제도화했다.

그해 8월에는 금융실명제를 전격 발표했다. 이는 남의 이름을 빌린 차명계좌나 비실명계좌를 활용해 재산을 축적하지 못하게 한 조치로, 당시 사회 지도층의 부정축재를 막는 가장 효과적인 정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 OECD 회원국 자부심과 IMF 관리체제 망신 공존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제 호황기가 정점에 달한 시기였다. 단적으로 1996년 10월에는 선진국 모임으로 알려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해 높아진 한국 위상을 확인했다. 우리나라는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 회원국이었다.

그러나 정권 말기에는 외환 부족으로 외채를 갚지 못하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은 외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서 긴급 구제자금 20억달러를 융자받았다.

외환위기 원인으로는 동남아시아 금융 불안과 급격한 자본시장 개방이 지적됐다. 김 전 대통령은 OECD에 가입하면서 이전까지 닫혀 있었던 자본시장을 전면 개방한다. 그런데 당시 동남아시아 금융 불안으로 불안감을 느낀 외국 자본들이 급격히 아시아에서 빠져갔다. 이에 외채를 갚을 달러가 부족해지는 한편 환율이 급격히 상승한 것이다.

◆ 각종 인명사고와 김일성 사망, IMF 구제기금 등 다사다난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아현동 가스폭발 사고, 대구 상인동 가스폭발 사고,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아시아나기 추락사고 등 초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한 시점도 김 전 대통령의 문민정부 때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동 대형쇼핑몰인 삼풍백화점이 붕괴되면서 사망 502명, 부상 937명, 실종 6명 등 인명피해가 났다. 부실한 시공과 불법적 용도변경 등 관계와 제계의 총체적 비리가 사고를 빗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또 서울 한강을 가로지르는 성수대교가 1994년 10월 21일 붕괴돼 32명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했다. 사고 당일 이원종 당시 서울시장이 경질됐다. 재건설을 거친 다리는 1999년 재개통됐다.

아현동에서는 1994년 12월 7일 도시가스가 폭발하면서 사망자 12명, 부상자 101명 등 인명피해와 건물 145동, 차량손실 92대 등 피해가 발생했다. 불과 넉 달여 뒤인 1995년 4월 28일에는 대구 상인동에서 지하철공사 도중 가스가 폭발하면서 101명이 사망하고 202명이 부상했다. 건물과 차량 등 피해액만 540억원에 달했다.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는 1993년 10월 10일 전북 부안에서 서해 훼리호가 돌풍과 파도로 인해 침몰하면서 사망자 292명이 발생한 사건이다. 한편 1993년 7월에는 아시아나항공 여객기가 전남 해남에 추락하면서 68명이 사망했다.

◆ 남북정상회담 무산되며 전쟁 공포 속으로

문민정부는 김일성 주석이 1994년 7월 사망하면서 남북 관계에도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김 전 대통령은 1993년 취임 초부터 김일성과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해 호응을 이끌어냈지만 김일성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됐다.

이후 북한은 1996년 9월 강원도 강릉에 잠수함을 보내 무장공비 26명을 침투시킨다. 그해 2월 동해에서 실시된 한·미 합동 군사훈련을 문제 삼으며 4월부터 북이 간헐적으로 경비정을 이용해 북방한계선을 넘나들면 항의를 표하던 상황이었다. 정부는 그해 9월 18일부터 11월 5일까지 약 200만명을 투입해 살해된 11명을 발견하고 13명은 사살, 1명은 생포했다.

[김종훈 기자]
[정치뉴스의 모든 것 레이더P 바로가기]
기사의 저작권은 '레이더P'에 있습니다.
지면 혹은 방송을 통한 인용 보도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