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선이는 모르고, 둘리는 아는 것

2015. 11. 21.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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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응답하라 1988>의 ‘한 골목 다섯 가족’이 동시 상영하는 최루성 가족 판타지와 판타지를 부정하는 대중문화의 조각들

“어째서 우리가 나오지 않는 거지?” 나를 포함한 전국의 88학번들은 푸념의 소리를 내뱉었으리라. 기대해 마지않던 tvN <응답하라 1988>(이하 <응팔·사진>)의 주인공은 ‘88 꿈나무’라고 불리던 당시 대학교 1학년이 아니었다. <사랑이 꽃피는 나무>의 캠퍼스를 추억할 기회라고 생각했던 건 오산이었다. 대신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 지붕 세 가족>의 확장판인 ‘한 골목 다섯 가족’이었다.

변신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건 인정한다. 1997년의 팬클럽이나 1994년의 하숙집 생활은 제법 씹어먹었다. 그래서 시간을 되감아 찾아낸 추억거리가 골목길 대가족이었나보다. 하나 88학번의 눈으로 볼 때, 인생에서 가장 예민했던 시기의 선명한 기억을 떠올릴 때, <응팔>은 너무 뒷걸음질쳤다. 저때도 석유풍로를 썼냐, 연탄은 땠지만 설비가 좋아져 가스 사고는 없지 않았냐, 하는 시대 고증의 문제가 아니다. 내가 기억하는 1988년의 가족은 저렇지 않았다. 촌스러운 단발머리에 청재킷을 걸치고 나온 성덕선은 아직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하지만 조각조각 카메오로 숨어 있는 대중문화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가족이라는 환상을 깨뜨릴 폭약이라는 사실을.

덕선이 우간다 피켓을 들고 입장하는 88 올림픽은 전쟁을 치르는 듯한 국가적 동원령을 통해 진행됐다. 군사정권은 세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안달했고, 동서 냉전의 화해자 역할에 뿌듯해했다. 대신 받아들여야 할 것이 있었다. 올림픽을 통해 찾아올 선진 국가들의 문화였다. 1980년대 초반부터 잡아당겼던 3S(스포츠·스크린·섹스)의 기어에 올림픽이라는 액셀러레이터가 더해졌다.

<응팔> 속의 영화 포스터들을 보자. <영웅본색> 시리즈는 폭력을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었다. 행복을 추구하던 개인의 비극을 신화화했다. <뽕>은 1980년대 전반의 화류계 에로영화들에 비해 훨씬 밝았다. 이미숙 같은 차세대 특급 스타가 노출 연기를 해도 괜찮다는 걸 보여주었다. <더티 댄싱>은 남녀가 신체를 접촉하며 끈적하게 추는 춤도 밝고 멋진 유흥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남학생들은 ‘리복’ 광고의 의자 넘어뜨리기 춤을 흉내내며, 1990년대 댄스음악의 도래를 준비했다.

<응팔>의 무대가 서울 쌍문동이라는 것도 상징적이다. 이곳은 김수정의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배경이다. 드라마 속에도 연재잡지 <보물섬>, ‘둘리 슈퍼 연쇄점’, ‘고길동’이라는 별명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둘리는 개인주의 혁명가다. 고길동의 집에는 여러 동물, 외계인 등이 얹혀살며 가부장의 권력을 조롱한다. <응답하라 1994>의 하숙집과 비슷한 구도이지만, 훨씬 혁신적이다. 남학생들이 드러누워 보는 해적판 만화 ‘다이나믹 콩콩 코믹스’, 여학생들이 돌려보는 ‘하이틴 로맨스’는 폭력과 성애라는 금단의 쾌락을 선사했다. 1988년은 주간 <아이큐 점프>, 월간 <르네상스> 등 소년 주간 만화지, 순정만화지가 탄생하던 때이기도 하다.

육수생이 매달려 있는 오락실의 올림픽 게임은 원래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을 테마로 했던 것이다. 역시 너무 시간을 되감은 셈이지만, 자를 이용하는 등 다양한 테크닉의 고증은 훌륭하다. 이후 찬연히 이어질 게임 덕후의 역사가 본격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의미도 크다. 당시 흔한 간판이던 ‘88 오락실’의 88은 미래의 상징과도 같았다.

<응팔>의 초반에 성덕선은 “내 끝사랑은 가족입니다”라고 말한다. 과연 드라마가 끝날 때도 그렇게 말할까? 생일 케이크를 재활용당하는 설움은 그렇다 치자. 연탄가스 사고 속에서 혼자 기어나와 동치미 국물을 마셔야 하는 각자도생은 어떻게 하나? 이제 그녀는 개인의 행복을 위한 레이스에 들어서고 있다. ‘거품 시대’ 일본 광고를 흉내낸 ‘난 느껴요, 코카콜라’의 산뜻한 도회 생활이 그녀를 유혹할 것이다.

이명석 대중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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