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간다

2015. 11. 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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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한창훈의 산다이]문학 강연 가서 만난, 불안이 학습된 아이들. 그 시절 내가 5·18을 만났듯 이들도 세월호를 맞닥뜨렸구나

간혹 문학 또는 인문학 관련하여 시민단체나 기관의 교육 프로그램 같은 곳에 강연을 간다. 예전에는 국문학과와 문예창작학과에도 종종 다녔는데 몇 년 전부터 대학교에는 가지 않는다. 모 대학에서 소설 창작 강사 노릇을 두 해 정도 한 경험이 있는데 그때에 비해 학생들과의 세대 차이가 너무 커져버렸다는 생각이다. 환경과 유행의 변화가 원인이겠지만 어쨌든 내 식의 창작방법론이 얼마나 먹힐지, 과연 필요한지, 회의가 들었기 때문이다.

황석영 선생을 납치하듯 학교에 데려간 이유

대학교도 그러니 고등학교에서 요청이 들어오면 거의 가지 않았다. ‘거의’라고 말한 것은 두어 번 가긴 했다는 소리다. 한번은 잘 알고 지내는 선배가 자신이 근무하는 고등학교에 와달라고 해서 갔다. 인정상 거절할 수가 없었는데 그때 내건 조건이 하나 있었다. 원하는 학생들만 따로 모아서 강연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그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다.

이유가 있다. 오래전 작가회의에서 사무국장 노릇을 할 때 널리 이름이 알려진 작가를 학생들과 만나게 해주는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었다. 전국에서 신청이 너무 많이 온 탓에 학교 고르느라 애 좀 먹었다. 심사라는 게 여러 가지를 따지는 것이지만, 이제 와서 밝혀보자면, 작가를 초청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지극한지가 중요 요인으로 작용됐었다. 사람이라는 게 지극한 마음에 끌리기 마련 아닌가.

그래서 고은, 신경림, 윤흥길, 황석영, 송기원 이런 굴지의 양반들께서 졸지에 중·고등학교에 한 번씩 가셔야 했다. 고은 선생은 따로 만나 택시로 모시고 갔고 자꾸 뒤로 빼는 황석영 선생은 집으로 찾아가 거의 나포하는 수준으로 모시고 갔었다. 신경림, 윤흥길 선생 두 분은 그나마 중학교엘 가셔야 했다. 시간이 지난 다음 윤흥길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대강당에 애들을 잔뜩 모아놨는데 그 애들 입장에서는 내가 간 게 재밌겠어? 교사들이 막대기를 뒤로 숨기고 다니면서 떠드는 애들 옆구리를 찌르는 게 훤히 보이는데 하이구, 괴롭대.”

나는 죄송하다고 연거푸 사과드려야 했다. 대강당에 줄지어 세워놓은 게 아이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힘든 것인지, 내가 학교 다녔을 때 운동장 조회의 고통을 기억하듯이, 새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자, 나도 갔다. 내 입에서도 하이구,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대강당에 전교생을 모두 세워놓은 것이다. 약속과 다르다고 따지자 선배는 실실 웃었다.

“학교 축제 기간이라 모든 학생을 대상으로 해야 된대. 그냥 좀 참고 해줘.”

어쩔 수 없이 연단에 올라섰는데 역시나 아이들은 상당히 떨떠름하고 적잖이 귀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씨발, 저건 또 뭐야?’ 이런 분위기 말이다. 벌써부터 교사들이 돌아다니면서 아이들 윽박지르는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먼저, 연예인이 아니라서 미안하다고 말했는데 그 애들은 웃지도 않았다. 그리고 교사가 지나가면 남학생, 여학생 모두 곧바로 몸을 비틀고 다리를 떨며 떠들기 시작했다. 맨 앞줄 몇몇만 빼고. 이럴 땐 문학이고 지랄이고 방법 하나밖에 없다.

내 고등학교 때 이야기 하는 거 말고 뭐가 있겠는가. 나는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녔다. 2학년 때 5·18을 겪었으며 사람들이 총 맞고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나서 술과 담배를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혼자 이렇게 선언했다. ‘학업은 이 정도에서 마치는 걸로 한다.’

수업하다 밥 안치러 가는 아이

그 전까지는 공부를 못하지 않았으니, 커다란 비극을 겪고 나서 인간의 잔인성에 대한 충격 때문에 내린 결심으로 보이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여파는 있었지만 세상만사 그저 다 귀찮고 의미 없게 느껴졌을 뿐이다. 될 대로 되라지. 그런 마음 말이다.

본격적으로 피우고 마시며 뒷골목을 싸돌아다녔다. 그렇게 다니다보면 싸움도 곧잘 일어나기 마련이라 때리기도 하고 맞기도 했다. 열댓 명에게 둘러싸여 린치를 당한 적도 있었다. 그때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가격당했는데 순간 다섯 개의 꼭짓점이 있는 별이 보였다. 아주 크고 노란.

밤하늘 별은 그저 반짝이는 작은 점이다. 그런데 그림으로 그릴 때는 다섯 개의 꼭짓점이 있는 별이다. 그건 어디에서 왔을까. 뒤통수를 사정없이 가격당한 사람이 그리기 시작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애들은 내가 얻어터지는 장면을 재미있어했다. 덕분에 그럭저럭 시간을 때울 수 있었고 윤흥길 선생처럼 앞으로는 절대 안 온다, 고 마음먹었다. 그래놓고 얼마 뒤 중학교에 갔다. 거문도 가까운 초도 중학교. 이번에도 안면 있는 교사분이 한번 와달라고 해서 여객선 타고 갔다.

그곳 중학생은 모두 열 명이었다. 글쓰기 수업을 두 시간 하고 나자 점심시간이었다. 애들이 뛰어간 곳은 취사실 겸 식당이었다. 그들은 그곳에서 직접 밥을 해먹었다. 수업 도중에 한 아이가 잠깐 나갔다 왔었는데 밥 안치러 간 거였다. 그러니까 그날 밥 짓는 당번이었던 것.

반찬은 각자 도시락에다가 싸왔다. 그걸 두 번으로 나눠서 점심때 다섯 명 것을 먹고 저녁은 그다음 다섯 명 것으로 먹는단다. 방과 후 저녁 시간은 자유였다. 공부를 원하는 학생은 담당 교사가 맡고 운동하고 싶은 아이는 운동을, 그림 그리고 싶은 아이는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초도에는 마을이 세 군데 있다. 결손 가정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엄마·아빠가 뱃일·밭일로 바빠서 아예 저녁까지 먹고 가는 방법이 나왔다는 설명. 학교가 자연스럽게 생활공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그것을 괴롭게 생각 안 한다는 것. 학교의 역할 중에 뜻밖에 좋은 것을 봤다고 할까.

정작 괴로운 것은 교사들이었다. 여객선 기다리는 동안 초청한 분이 나를 슈퍼마켓으로 데려갔다. 그 마을에서 유일한 가게였다. 가게 안쪽에 시멘트벽으로 된 두어 평짜리 공간이 있고 탁자 두 개에 열 개 정도의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다. 맥주병을 따면서 그가 말했다.

“여기가 우리 교사들 회식하는 유일한 곳이야. 회식비가 생겨 다른 곳 가고 싶어도 식당 하나 없으니 원. 안주도 매번 같아. 복숭아와 포도 통조림.”

그 두 번이 전부였다.

학생들을 만나 사과부터 하자

요즘은 반대이다. 성인들 상대로 하는 강연은 일정이 맞지 않으면 못 가기도 하는데 고등학교에서 초청이 오면 꼭 간다. 지난해 4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뒤부터 그렇다. 비참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아이들 생각이 떠나지 않았고 노란 리본을 달고 집회에 나가는 것 말고 내가 따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를 고민했다. 길거리에서 스치는 고등학교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나는 그 나이에 5·18을 만났는데 이 아이들은 세월호를 만나버렸구나, 어쩌면 이렇게 안 바뀔까, 이 애들은 조국에 대해 나중에 어떤 기억을 하게 될까, 하다가 내린 결론이었다.

학생들을 만나자. 우선 사과부터 하자. 너희 친구들을 터무니없는 죽음으로부터, 너희들을 충격과 공포로부터 지켜주지 못한, 못난 어른이어서 미안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바다에 대한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 미워해야 할 대상은 바다가 아니라 그런 사고를 내고 먼저 도망가버린,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뒷수습이라고 한, 아직도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피해자들을 이간질하는 것도 모자라 악랄하게 공격하고 있는, 같은 시대 같은 공간 속의 어떤 사람들이니까.

강연은 보통 두 시간 한다. 한 시간은 바다에 대한 사진을 보여준다. 내가 여행했던 인도양과 지중해, 대서양, 북극해의 풍경과 수많은 어패류들. 그리고 섬마을 사람살이 모습들을. 바다란 처음부터 그 자리에서 그 모습으로 출렁이고 있는 존재니까 두려운 곳이 아니라 우리가 기댈 수밖에 없는 어미이자 보듬어야 할 대상이니까. 둘째 시간에는 글쓰기 방법에 대해 설명하고 책 내용에 관한 질문에 대답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이 부탁을 한다.

“어떤 사람이 되라고는 말 못한다. 각자의 인생이 있으니까. 단지, 타인에게 평생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만큼은 절대 되지 말아달라….”

아이들은 밝고 맑았다. 하지만 너무 과하게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모습을 매번 확인하게 된다. 그 나이에 벌써부터 먹고사는 문제에 끙끙대고 있는 것이다. 불안이 학습되어 지레 겁에 질려 있다고 할까. 십 대 후반이란 책을 읽고 여행을 하며 타인을 만나 서로 이해하는 법을 터득해야 할 때인데 말이다. 그 시기에 얻은 것으로 평생을 사는 게 자연스러운 과정인데 그럴 기회가 애초에 박탈된 상태. 내가 그랬던 것처럼 시작부터 뒤틀려 있는 인상이라서 되돌아오는 발걸음이 늘 무거웠다(취직 걱정이 심한 아이들에게는 해양대학을 가서 항해사나 기관사가 돼보는 건 어떠냐고 권한다. 요즘 우리나라 해양산업이 쪼그라들기는 했지만).

주눅 든 학생과 화려한 교장실의 거리

불편한 게 하나 더 있다. 바로 교장실에서 교장과 차 마시는 것. 이거 정말 안 하면 좋겠는데 하게 된다. 말 그대로 형식이다. 그때마다 교장실이 너무 크고 화려한 것에 나는 놀랐다. 내 기억 속의 교장실이란 온갖 트로피와 깃발 따위가 잔뜩 모여 있는 좁은 방 정도였는데 정말 달라졌다.

어느 학교에서는, 직접 눈으로 본 적은 없지만, 대기업 회장실이 아마 이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단 한 명을 위해, 그것도 학교에서, 이렇게 넓고 고급스러운 방이 있어야 할까. 이 비용만 줄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 안 들 수 없었다.

교장이라는 직책도 그렇다. 그곳에서는 우두머리겠지만 학교만 벗어나면 그저 머리 벗겨지고 나이 든 중늙은이 아닌가. 아이들이 학교만 벗어나면 생생한 생명체가 되는 것과 반대로. 주눅 든 학생과 화려한 교장실. 그 둘의 거리가 우리나라 교육 현실 아니겠는가. 난 오랫동안 학교 교장이나 이사장이 호미 들고 화단 정리하는 모습 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아직 한 번도 못 봤다.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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