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표절' 파문,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임지영 기자 2015. 11. 17. 0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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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가장 많이 세간에 오르내린 문장 중 하나는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였다.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과 신경숙 작가의 <전설>에서 공통적으로 쓰이는 이 표현은 ‘표절의 기쁨을 아는 몸이 되었다’ 따위로 패러디되기도 했다. 15년 전 신예 평론가의 문제 제기가 묻힌 원인으로 지목된 문단권력의 해체, 표절에 대한 가이드라인 마련, 비평의 부활 및 무용론 등 대안과 비판이 동시에 나왔다. 주로 창비,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등 문학 계간지를 발행하는 출판사를 겨냥했다. 당시 차미령 <문학동네> 편집주간은 '폭발적인 논의가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거의 동일한 얘기들이 재생산되고 있다'라면서 ‘문학권력’ 비판을 주도한 평론가들의 좌담을 추진했다. 그러나 일방적이라는 비판에 부딪혀 무산되었고 대신 젊은 작가들이 참여한 좌담이 가을호 잡지에 담겼다.

당시 논의를 지켜보던 한 원로 작가는 이번 일이 단지 한 개인의 표절 여부, 절필 논의에 그치기엔 아까운 기회라며 두 가지 숙고할 점을 지적했다. '개인의 윤리 문제를 넘어 훨씬 근본적인 차원에서 한국 문학의 태생적인 취약성이 깔려 있다. 식민지 시대를 거치며 일본 근대 문어체가 우리 문학 속에 관철되었다. 1960~70년대 계간지를 이끌어온 리더 역시 영문·독문·불문학자였다. 국문학이 어떤 원천성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통렬한 자각이 없다면 우리 문학은 다 베껴 쓴 거라는 자학에 빠질 수 있다. 또 한 가지, 표절이라고 얘기하면서도 표절이라는 말이 어떤 개념, 어떤 차원이나 눈높이에서 쓰여야 하는지에 대한 화두나 사유가 우리 사회 안에 아직 없는 것이 한계다. 논의가 확장되길 바란다.' 그로부터 5개월여가 지났다. 과연 진전이 있었을까.

ⓒ연합뉴스 : 7월15일 서울 마포구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문화연대 주최로 ‘신경숙 사태’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연합뉴스 7월15일 서울 마포구 서교예술실험센터에서 문화연대 주최로 ‘신경숙 사태’ 관련 토론회가 열렸다.

독자인 동시에 창작자인 작가들은 이번 사건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은 당사자다. 황정은 소설가 역시 '사태가 전개되는 동안 한국 문학에 대한 비아냥과 비판이 쏟아졌는데,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수치감과 모멸감을 상당히 느꼈고 작업하는 원고에도 영향을 미쳤다'라고 밝힌 바 있다. 한 문학평론가는 '창작자와 독자의 의지가 꺾인 게 가장 우려스럽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작가는 쓸 테고 독자들은 더 높은 윤리성을 요구할 거다. 문학하는 사람 스스로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신 작가의 표절을 부인하다 뒤늦게 말을 바꿔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창비는 이후로도 계속해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주로 전문용어, 모호한 단어 선택 등이 구설에 올랐다. 가을호 계간지에는 이미 발표된 원고를 일부 수정한 형태로 실었고, 권두언에서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 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라고 밝혔다.

창비의 좌장 격인 백낙청 편집인의 행보 역시 주목을 받았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창비의 1차 보도자료는 잘못된 것이라 밝히면서도 '그렇다고 그것이 일부러 베껴 쓰지 않고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라고 보는 문학관·창작관에는 원론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더구나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저자의 파렴치한 베껴 쓰기로 단정하고 거기다 신경숙은 원래가 형편없는 작가였다는 자의적 평가마저 곁들여 한국 문학에 어쨌든 소중한 기여를 해온 소설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에는 결코 합류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일찍이 신경숙 작가를 ‘한국 문학의 보람’으로 일컬어 문단 내 입지를 공고히 한 당사자로서 기본적인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한 문학평론가의 글

<문학동네>는 그보다는 명징하게 독자에게 사과했고 비평과 표절, 권력을 주제로 한 글과 대담을 실었다. 강태형 대표와 편집위원 7명이 퇴진을 결정했다. <문학과사회> 역시 평론가들의 대담을 통해 표절의 범위, 문학장의 변화 등에 대해 논의했다. 문학권력 당사자로 지목된 매체들은 대개 15년 전에 문제 제기를 묵살한 건 ‘침묵의 카르텔’이 아니라 단지 부주의함이었다는 데 동의하고 마녀사냥식 여론몰이의 위험성을 지적하기도 했다. 이후 <리얼리스트> <실천문학> <오늘의 문예비평> <황해문화> 등의 계간지는 토론회를 마련해 가을호 계간지 일부를 비판하고 대안적인 문학 생산 주체들이 출현하고 자리 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즈음에 창간한 문학잡지 <악스트> 창간호에서 천명관 작가는 문단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박민규 작가가 데뷔작인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서 인터넷 게시글 일부를 표절했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시사IN 윤무영 : ‘창비’의 백낙청 편집인(왼쪽)은 신경숙씨를 옹호하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문학동네는 기존 대표와 편집위원 사퇴 후 염현숙(오른쪽) 대표 체제로 바뀌었다.

ⓒ시사IN 윤무영 ‘창비’의 백낙청 편집인(왼쪽)은 신경숙씨를 옹호하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문학동네는 기존 대표와 편집위원 사퇴 후 염현숙(오른쪽) 대표 체제로 바뀌었다.

최근 다시 표절 문제가 수면 위에 떠올랐다. 퇴진한 <문학동네> 편집위원 중 한 사람인 남진우 문학평론가가 <현대시학> 11월호에 발표한 글이 알려지면서다. 그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며-표절에 대한 명상 1’에서 '표절이라 하면 거의 자동적으로 양심의 문제,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되어 선악 이원론적 판결이 요구되는 법정으로 직행하곤 하는데 문학 예술의 창작에서 표절은 종종 텍스트의 전환, 차용, 변용 등의 문제와 결부되어 숙고해야 할 점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 숙고를 회피한 채 이루어지는 표절 논란은 대부분 무분별한 여론 재판이나 ‘잘못의 시인’ ‘선처에 대한 호소’ ‘대중의 망각’으로 이어지는 막간의 소극으로 귀결되기 쉽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표절에 대한 논의를 확장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표절 논란의 당사자인 신경숙 작가의 남편이라는 점이 입길에 올랐다.

이응준 작가가 신경숙 작가의 표절 의혹을 제기한 최초의 글 중 남 평론가를 향한 내용이 다시 부각되기도 했다. '하일지를 비롯한 여러 문인을 표절 작가라며 그토록 가혹하게(아아, 정말로 가혹하게!) 몰아세우고 괴롭혔다.' 결과적으로 남 평론가의 발언은 대중의 망각을 늦췄다.

창비 역시 다양한 형태의 창구를 통해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시즌2를 시작한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이 대표적이다. 박혜진 아나운서와 송종원 문학평론가 겸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의 진행으로 재개된 시즌2는 3회 연속 표절 사태에 대해 다뤘다. 송 평론가는 이 문제를 다루고 가자는 박혜진 아나운서의 제안에 처음엔 부정적이다가 생각을 바꾼 계기에 대해 '가을호 계간지 논의가 일반 대중에겐 접근이 어렵겠다, 대중이 이해하는 주된 통로가 언론일 텐데 부정확하고 대안과 담론에 대해 다룰 때 방향이 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라고 밝혔다. 계간지 가을호를 지켜본 소감으로는 패배주의를 지적했다. '한국 문단 안에 여러 문제가 있는 건 맞지만 문단 안에 자정기능도 있고 이뤄놓은 성과도 있는데 문제 자체를 심각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지 않나.'

창비와 직간접으로 연관된 패널을 불러놓고 사안을 다룬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됐다. 3회에 출연한 전 시즌 진행자 황정은 작가의 날카로운 반격도 있었다. '왜 이렇게 자꾸 창비에서 ‘하지만’을 붙여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대중이 정말 궁금해하는 것과 창비가 설명하려는 것하고 괴리가 있는 것 같다. (중략) 이 사태에 가장 어이없는 건 한국 문학을 계속 읽어온 독자들일 텐데 이들에게 뭔가 삿대질하는 느낌이 있다. ‘미안해. 하지만 당신들이 몰라서 그러는데…’라는 투다. 창비가 ‘하지만’을 바깥에 호소하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향해 묻는 집단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재까진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문학동네>와 ‘창비’ 모두 지속적으로 논의를 이어나갈 거라며 지켜봐주길 당부했다. 곧 2015년 겨울호 문예지가 나올 시기다.

임지영 기자 /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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