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보다 더 무섭고 혐오스러운 건 '생존 이데올로기'"

권영미 기자 2015. 11. 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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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성장소설 '양철북' 펴낸 이산하
성장소설 '양철북'을 펴낸 이산하 작가가 6일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뉴스1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 News1

(서울=뉴스1) 권영미 기자 = "좌우이념보다 더 무서운 것은 딱 한가지다. '생존이데올로기'다. 어쨌든 어떤 상황에서라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 이데올로기로 모든 악행이 합리화되면서 역사는 더 진보할 수 있는데 못하거나 후퇴했다."

지난달 성장소설이자 구도소설인 '양철북'(양철북)을 낸 시인 이산하는 문단에서 대표적인 강성 진보 인사로 꼽히는 인물이다. 80년대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하던 와중에 당시 터부였던 4.3항쟁을 전면적으로 다룬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써서 옥고까지 치렀다.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 저자의 신분을 꽁꽁 숨겨 '고정간첩이 작품을 쓴 것 아니냐'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6일 상수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산하 작가와 나눈 이야기는 권력과 저항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다. '(죽음까지) 각오하고' '한라산'을 써 펴냈기에 그의 인생은 저항의 고단한 '상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의외로 이산하 시인은 "적을 미워하지 않는다. 적을 미워하면 똑같은 모습이 된다. 그것을 경계해야 한다. 적이라고 생각해도 사이좋게 지내며 조용히 싸운다"고 말했다. 그리고 "좌우 이데올로기보다 더 무서운 것은 생존 이데올로기다. '살기 위해 어쩔수없이 이 일을 했다'는 말이 혐오스럽다"고도 했다.

다음은 이산하 시인과 나눈 일문일답이다.

-이번에 펴낸 '양철북'은 어떤 책인가.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젊은 스님 법운과 이제 막 성년식을 앞둔 문학소년 철북이의 여행기를 담아낸 구도소설이자 성장소설이다. 2003년 시공사에서 낸 것을 이번에 전면개작해 양철북이라는 출판사에서 냈다. 기존에 썼던 부분을 들어내고 400~500매를 추가했다. 깨달음을 얻으려는 스님의 여정의 기록이자 문학소년인 주인공이 여러 경험을 통해 글밭 토양을 단단히 다지는 내용이기도 하다.

-권력의 문제는 정치 뿐 아니라 문학에서도 존재한다. 지난 6월 소설가 신경숙의 표절 논란이후 표절과 문학권력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문학권력이 존재한다고 믿는가. 이들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문학에서의 권력은 자본력과 권위다. 권위있다고 믿어지는 문학지를 갖고 있고 자본력이 있는 출판사라면 그는 권력을 갖고 있는 것이 된다. 그런데 책을 내고 문학지로 칭찬하고 광고를 많이 낸다고 해서 그 작품과 작가가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광고를 받쳐주는 것은 외부의 공신력있는 매체에서 낸 기사다. 문학권력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부 언론도 한 몫을 했다.

-신경숙 작가의 표절문제는 10여 년전에도 불거졌다. 그때는 이슈가 되지 않았다.

▶기자들이 언론 본연의 임무인 감시를 제대로만 했어도 이렇게까지는 안됐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보면 이는 기자 개인으로서는 힘든 일이었을 수도 있다. 10여 년전 신경숙을 문제삼는다는 것은 신씨의 책이 나오는 창비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사 세 곳 모두에 등을 돌리는 것인데 그것을 기자 개인이 할 수 있었을까. 문학기사를 거의 포기해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때문에 문제가 커졌고 기자들도 어쩔 수 없이 이 이슈를 다뤄야만 했다.

-왜 한 작가를 여러 출판사가 공유하게 되었나.

▶출판사들이 탐을 내는 한 작가가 한 출판사에서 책을 내면 문예지를 갖고 있는 B출판사 소속 평론가들이 집중공격한다. 작가는 하는 수 없이 B출판사에 원고를 주고 B는 공격을 멈춘다. 그러자 C가 문예지로 공격해온다. 그럼 또 C에 원고를 준다. 비판의 목소리가 잦아진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이 작가는 적이 없어진다. 결국 3군데 출판사에서 다 내는작가들을 향해서는 누구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일부러 돌아가며 내는 작가들도 있다.

-독립적이고 권위에 저항해야 할 작가들이 어째서 이렇게 되는 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책이 덜 팔리면 덜 팔고, 비판을 들으면 싸워야 하는 것 아닌가.

▶작가들의 속물근성, 노예근성 때문에 그렇다. 자존심을 지키는 작가들은 1%나 될까. 표절문제도 그렇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작가들의 사유의 깊이가 깊다면 표절문제는 나올수가 없다. 표절은 얕아진 사유를 미문주의로 포장하려 했기 때문에 불거진 것이다.

-왜 사유의 깊이가 얕아졌나.

▶작가들이 형용사와 부사에 익숙해진 것이다.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방식이 여럿 있는데 정치인들이 기여하는 방식과 예술가들이 기여하는 방식이 다르다. 자본주의를 비행기로 보면 여러 힘이 필요한데 예술가는 날개의 역할이다. 문장은 품사들의 배치를 통해 자본주의의 구조와 의식을 닮아간다. 작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은 저항한다고 생각한다면서도 부사와 형용사를 통해 자본주의를 날게 한다.

-그렇다면 제대로 싸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주어를 강화해야 한다. 부사와 형용사가 난무하며 주어의 존재를 망각시키고 그러면서 기득권과 체제가 공고화된다. 전체그림을 보고 싸우는 작가들이 별로 없다. 예술가들은 어떤 식으로 싸워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정치건 예술이건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하다고 본다.

-상당히 비관적으로 들린다.

▶언젠가 유럽의 한 동물원을 간 적이 있다. 한 칸이 비어있어서 들어갔더니 거울이 걸려있고 내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그 밑에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고 써 있었다. 인간이 지구상 가장 위험한 동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라면 그 문구를 '가장 비열한 동물'이라고 쓸 것이다.

제주 4.3 사건때 (좌익)무장대 뿐아니라 서북청년단 등의 극우단체와 군경 토벌대에 의해 수만명이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 살았을까. 지리산 빨치산은 토벌대가 총으로 직접 쏴서 죽였다. 하지만 제주도는 대살(대신 죽임)의 방법을 썼다. 토벌대가 무장항쟁에 관여한 것 같은 A를 잡아온다. 그리고 A의 친구 B도 잡아와 '동조자가 아니냐'며 추궁하다가 친구인 A를 죽여 결백을 증명하라고 몰아세운다. A를 죽이면 너를 살려준다는 말에 B는 친구를 찔러 죽인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남을 죽임으로써 살아남은 것이다.

-상대를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 상황을 만든 사람이 나쁜 것 아닌가. 자신이 살기 위해 A를 죽인 B를 비난할 순 없을 것 같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약400만명의 유태인과 집시들을 죽게 한 나치 실무자다. 그의 재판이 열렸는데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나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너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죄',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죄'라면서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을 지켜본 뉴요커 기자이자 철학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은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다 시스템과 명령의 탓으로 돌리면 전범도 살인자도 있을 수 없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니 지배하기가 쉬운 것이다. 거부하고 자기가 죽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좌우 이념보다 더 무섭고 혐오스러운 것이 생존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 생각 때문에 역사는 더 진보할 수 있었는데 진보하지 못하거나 후퇴해왔다. 그렇게 살아남아서 뭐하나. 그냥 죽으면 되는 것이다.

ungaunga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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