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 투 평창] 'NHL 한국계 영웅'과 '푸른눈의 태극전사'

박린 2015. 10. 28.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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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빙판 위의 우생순을 꿈꾸는 태극전사들
정몽원 회장 취임 이후 한국 아이스하키는 개혁의 급물살을 탔다. [중앙포토]
한국으로 귀화해 국가대표팀에 합류한 선수들. 왼쪽부터 마이클 스위프트, 브라이언 영, 브락 라던스키, 마이크 테스트위드 [중앙포토]
백지선(좌) 감독과 박용선 코치는 동양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NHL에서 맹활약을 펼쳤다. [중앙포토]
귀화한 라던스키(맨 왼쪽)와 테스트위드(오른쪽에서 둘째), 스위프트(맨 오른쪽)가 2015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리투아니아전 승리 후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고 있다. [아이스하키협회]
현역시절 백지선 감독(좌)과 박용선 코치
한국은 지난 5년간 세계랭킹 33위에서 23위까지 10계단까지 상승한 이례적인 국가가 됐다. 같은 기간 일본은 단 한 계단 올랐다. [IIHF홈페이지]

'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를 누빈 한국계 영웅'과 '푸른 눈의 태극전사'. 그들이 빙판 위의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꿈꾸고 있다.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준비 중인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대표팀의 백지선(48·짐 팩) 감독과 박용수(39·리처드 박) 코치. 그리고 우수인재 특별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을 취득한 캐나다 출신 브락 라던스키(32·한라)와 마이클 스위프트(28·하이원), 브라이언 영(29·하이원), 미국 출신 마이크 테스트위드(28·한라)다.

◇변방을 넘어 빙판의 주인공으로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는 세계무대에서 변방 중 변방이었다. 국내 남자 성인 등록 선수가 133명에 불과할 만큼 저변이 취약하다. 2003년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에서 일본에 2-11로 참패했고, 중국에 2-6으로 완패했다.

2011년 7월. 2018 겨울올림픽의 평창 개최가 결정됐다. 2013년 '아이스하키 매니아' 정몽원 한라그룹 회장을 수장으로 추대한 대한아이스하키협회는 평창 올림픽 본선 진출권 확보에 사활을 걸었다.

아이스하키는 캐나다·미국 등 전통 강호들의 전유물이다. 국가별 전력 차가 커 올림픽 예선통과가 언감생심이다. 한국은 2006년 토리노 올림픽 이후 사라진 개최국 본선 자동진출권의 부활을 원했다. 하지만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은 한국아이스하키의 국제경쟁력이 크게 떨어진다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대표팀 선발 자원이 모자란 한국 아이스하키는 귀화 선수에 눈을 돌렸다. 2010년 국적법 개정으로 체육분야 우수인재는 특별 귀화를 통해 한국 국적을 획득할 수 있다. 2013년 3월 라던스키를 시작으로 2014년 1월 스위프트와 영, 2015년 3월 테스트위드가 국적을 취득해 태극 마크를 달았다.

아이스하키에서 중요한 대회를 앞둔 개최국이 캐나다와 미국 출신 선수를 귀화시키는 건 일반적이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을 앞둔 일본은 캐나다와 스웨덴 출신 선수 8명을 뽑았고, 2006년 토리노 올림픽을 개최한 이탈리아는 캐나다와 미국 태생 선수 11명으로 대표팀을 채웠다.

한국은 지난해 4월 고양에서 열린 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A 대회에서 5전 전패로 꼴찌를 했다. IIHF 관계자들은 "장기적으로 한국 아이스하키를 발전시킬 국제화된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인으로 세계 최고 무대인 NHL에서 활약한 백지선과 박용수가 지난해 7월 난파 위기에 놓인 모국의 SOS 요청을 받아 한국 대표팀에 부임했다. 백 감독의 부임은 IIHF가 한국 아이스하키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백 감독은 지난해 9월 스페인 테네리페에서 열린 IIHF 총회에서 평창 올림픽까지 한국 아이스하키를 발전시킬 로드맵을 밝혔다. IIHF는 지난해 8월 "한국이 백지선 감독을 영입하며 빠른 대처 능력을 보였고, 한국 아이스하키는 절대 포기하지 않는 한국인 특유의 근성을 보여줬다"며 한국 남녀 아이스하키에 개최국 자격으로 본선진출권을 부여했다.

◇빙판의 차범근과 박지성, 개혁 나섰다

축구와 비교하면 백지선 감독은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98골을 넣은 차범근(62), 박용수 코치는 잉글랜드 명문 맨유에서 뛴 박지성(34)급이다. 한 살 때 캐나다로 이민간 백 감독은 1991년 피츠버그 펭귄스 수비수로 동양인 최초로 NHL 무대를 밟았고, 1991년과 1992년 스탠리컵 우승을 차지했다. 1990~91시즌 미네소타와 NHL 챔피언결정 6차전에서 마리오 르뮤(50·캐나다)의 어시스트를 받아 골을 터뜨렸다. 그의 유니폼은 NHL 명예의 전당에 전시돼 있다.
백 감독은 지도자로도 성공적인 길을 걸었다. NHL 명문 디트로이트 레드윙스 시스템에서 체계적인 수업을 받았다. 2010년과 2014년 캐나다의 올림픽 2연패를 이끈 마이크 뱁콕 감독이 백 감독의 스승이다. 2012~2013시즌 디트로이트 레드윙스의 2부팀 격인 아메리칸하키리그(AHL) 그래드래피즈의 코치를 맡아 사상 첫 우승에 힘을 보탰다.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백 감독은 한국 아이스하키를 환골탈태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박용수 코치는 NHL에서 241포인트(102골·13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세 살 때 미국으로 이민간 그는 월드주니어챔피언십에 두 번, 월드챔피언십에 네 번이나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스위스 리그에서 지난 시즌을 마친 박 코치는 현역 연장과 코치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멘토' 백 감독의 뒤를 따라 모국행을 택했다.

백 감독은 "아버지가 '언젠가 조국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꼭 해라'고 말씀하셨다. 한국 대표팀 감독을 항상 꿈꿨다"고 말했다. 박 코치는 "올림픽 출전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선수 시절 경험을 한국 선수들에게 전수하고 싶었다"고 답했다.

한국 남자 아이스하키는 평창 올림픽 조별리그 A조에서 세계 최강 캐나다, 1998년 나가노 올림픽 우승국 체코, 신흥 강호 스위스와 맞붙는다. 백 감독은 "NHL에서 연봉 1000만 달러(약 100억원) 이상 받는 선수들과 경쟁은 쉽지 않다"면서도 "2002년 한·일 월드컵은 환상적이었다. 축구 대표팀처럼 최선을 다한다면 행운까지 따라와 기적을 만들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백 감독과 박 코치는 포부대로 기적의 서막을 열고 있다. 한국(세계랭킹 23위)은 지난해 11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로 아이스하키 챌린지에서 2승1패로 준우승을 차지했다. 지난 4월 네덜란드에서 열린 2015 IIHF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1 그룹 B에서는 4승1패로 정상에 오르며 디비전1 그룹A(상위 두번째 단계) 승격을 이뤄냈다.

백 감독은 자신의 하키 철학인 열정(Passion)·연습(Practice)·인내(Perseverance) 등 '3P'를 강조하며 선수들에게 "매일 발전하라(Getting better everyday)"고 역설하고 있다. 선수들 역시 백 감독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

◇라동수(拏東水)와 강태산(姜太山)의 제2의 조국

아이스하키 선수들에게 올림픽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돈과 명예를 모두 거머쥔 NHL 스타 플레이어들 역시 올림픽 출전에 강한 의욕을 보인다.

2018 평창 올림픽에 NHL 선수들이 출전할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캐나다의 조나던 테이브스(시카고 블랙호크스), 러시아의 알렉스 오베츠킨(워싱턴 캐피털스) 등 각국의 간판 스타들이 평창 올림픽 출전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푸른 눈의 태극 전사들' 역시 평창에서 ‘제2의 조국’을 위해 뛰는 영광을 누리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재까지 벽안의 태극전사들의 효과는 긍정적이다. 라던스키는 태극마크를 달고 15차례 세계선수권에서 18포인트(6골·12어시스트)를 올렸다. 지난 4월 IIHF 디비전1 그룹B 우승 당시 스위프트가 포인트 1위에 올랐다. 테스트위드도 이 대회에서 4골·4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지난 14일 안양 한라의 아시아리그 아이스하키 일본 원정 중에 만난 라던스키와 테스트위드는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라던스키는 한국어로 "안녕하세요. 라던스키입니다"라고 인사를 했고, 테스트위드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라며 능숙하게 애국가를 불렀다. 여전히 한국어가 완벽하지 않지만, 두 사람 모두 한국인으로서 어울리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안양 한라는 지난 9일 한글날을 맞아 팬들의 공모를 통해 라던스키와 테스트위드에게 '라동수(拏東水)'와 '강태산(姜太山)'이란 한국 이름을 지어줬다. 라던스키는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 아이스하키의 희망찬 물줄기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테스트위드는 "태산처럼 상대를 강하게 압도하는 선수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2008년 한국에 온 라던스키는 7년째 머무르고 있다. 테스트위드는 지난 3월 국적 취득 기념으로 안양 한라 라커룸에서 애국가를 독창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쭈꾸미 볶음이다. '한국 스타일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스피드를 늘려야 한다'는 주문에 테스트위드는 체중을 8kg이나 뺐다.

라던스키와 테스트위드는 "은퇴할 때까지 최대한 빙판에서 애국가를 많이 듣는 것이 목표"라고 한 목소리를 냈다. 아이스하키는 세계선수권과 올림픽 등 국가 대항전에서 승리한 팀의 국가만 연주한다. 태극 마크를 달고 1승이라도 더 올리겠다는 각오다.

'올림픽에서 캐나다나 미국을 적으로 만나면 어떨 것 같냐'는 질문에 테스트위드는 "라커룸에 들어갈 때도, 빙판에 섰을 때도 난 코리언이다. 한국 대표팀 승리를 위해 뛸 것"이라고 다짐했다. 라던스키는 "난 22살 때처럼 뛸 순 없겠지만 한국의 자긍심을 갖고 임하겠다. 업셋(하위팀이 상위팀 꺾는 이변)과 미라클(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먹을 꽉 쥐었다.

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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