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순간 한혜진

2015. 10. 23.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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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등진 몸의 실루엣은 비현실적이었지만, 그녀는 멋진 현실주의자였다.

“어디서부터 사진 찍을 거예요? 문 앞? 알겠어요.”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한혜진은 포토그래퍼에게 질문을 던졌고, 아무렇지 않게 포즈를 취했다. 불현듯 촬영이 시작됐다. 살짝 살짝 앙큼하게 몸을 움직일 뿐인데, 보란듯이 온몸으로 톱모델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최근 발간한 에세이집 때문에 아침 7시 반부터 일정을 소화했다는 그녀는 다소 지친 표정이었지만 촬영이 진행될수록 피어났다. “여기 계단에서 한 컷 찍어도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직접 포즈와 콘셉트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했다. 촬영은 순식간에 끝났다.“얼마 전에 출간한 에세이집 홍보 일정 때문에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 작년이 제가 모델을 시작한 지 15년이 되는 해였거든요. 어떻게 기념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글로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애초에 자기의 만족을 위한 글이었기 때문에, 바쁜 일정 속에서도 조금씩 써 내려갔어요.”

17살 때 모델 일을 시작한 한혜진. 올해로 16년째를 맞는다. 데뷔 이후 국내에서는 빠르게 톱모델로 자리 잡았다. 뉴욕으로 진출해 샤넬, 구찌, 루이비통, 돌체앤가바나, 버버리 등 세계적 브랜드의 해외 컬렉션 무대를 장식했다. 이후 JTBC <마녀사냥>에 출연하며 의외의 재치와 입담을 선보였고 최근까지도 활발하게 방송 활동을 해오고 있다. ‘일도 연애도 잘하는 멋진 언니’ 같은 느낌이라고 하니, 그녀가 웃는다.“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꼭 반문해요. ‘대체 누가 저를 그렇게 본다는 거죠? 기자님요?’(웃음) 아직도 저는 스스로 너무나 미성숙하다고 생각해요. 누구에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는 절대 아니죠. 저를 통해 좋은 자극을 받는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누군가를 가르치려 든다거나 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17살 때부터 자신의 커리어를 책임져온 16년 차 프로의 노련함일까. 한혜진의 대답에는 군더더기가 없었고 자신을 향한 미사여구에도 담담하게 반응했다.

“참 부지런한 것 같다”는 칭찬에도 손사래를 쳤다.“모델은 게으를 것 같은가 봐요?(웃음) 저는 많은 시간과 여유를 오롯이 자신에게 쏟아부을 수 있어요. 연애도 안 하고,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았죠. 그 모든 것을 다 감당하는 여성분들 앞에서 제가 어떻게 부지런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완벽주의 기질이 있고 좀 예민한 건 사실이지만, 유별나게 부지런한 건 아니에요.”일도 사랑도 능동적으로 쟁취할 것만 같은 그녀는 JTBC <마녀사냥>에서 진솔하게 자신의 연애담을 풀어놓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에서 얻는 만족감과 가족, 친구 그리고 남자친구에게서 얻는 만족감은 다르잖아요. 가을이 되니 부쩍 외롭지만, 많이 바빠서 그나마 다행이네요. 인기 많을 것 같다고요? 아니, 저를 보세요. 어떤 남자가 쉽게 다가오겠어요?”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는 달리 대시하는 남자들이 별로 없다며 그녀는 웃었다.

“요즘 인스타그램 하시는 거 보니까 배우 이규한씨와 잘 어울리던데”하며 농담을 던지니 한혜진의 눈이 커진다. 두 사람은 트렌디(TRENDY)채널의 <스타일 라이킷>에 함께 출연 중이다.“설마 규한 오빠에게 여자친구가 있다는 거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하하. 여자친구 있는 남자랑 프로그램을 같이 진행한다는 게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웃음) 촬영하는 내내 아주 즐거웠어요. 한 번도 그런 성격의 남자와 만나거나 일해본 적이 없었거든요. 저는 언제나 적극적이지만 유머러스하지는 않은 차분한 남자들과 사귀었어요. 그런데 규한 오빠처럼 감정의 기복 없이 늘 밝고, 건강하고, 사고방식도 열려 있는 남자도 정말 매력적이더라고요.”

그녀는 욕하는 남자는 싫다고 했다. 아무리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어도, 한순간에 와르르 호감이 무너질 정도로 싫단다. ‘허공에 뿌리는 말조차 가볍지 않은 남자’이길 바란다고 한혜진은 말했다.“가벼운 거랑 재치 있는 거랑은 분명히 다르잖아요? 그걸 구분하지 못하는 남자는 싫어요. 어떤 부분에서든 저보다 나은 점이 있고, 제가 절대로 할 수 없는 부분을 능숙하게 해내는 남자에게 매력을 느껴요. 그래서 단 한 번도 모델 분야 종사자와는 교제한 적이 없어요.”운동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본인이 새롭게 태어나지 않는 이상 잘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잘하는 남자에게 늘 매력을 느껴왔다는 그녀. 맘에 드는 남자에겐 어떻게 다가갈까?“표현은 늘 먼저 해요. 결국엔 상대방이 만나자는 말을 먼저 입 밖으로 꺼내게끔 만들죠. 저는 칠 수 없는 공에는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아요.그래서 타율이 높죠. 받아들여지지 않을 게 뻔한데 굳이 힘 빼고 싶지는 않거든요.”이토록 주관이 분명하니 모델 일을 대하는 시각이나 자세도 왠지 남다를 것 같다.

모델로 살아온 10대와 20대 그리고 30대. 그녀에게는 작지 않은 변화를 체험하는 시간이었다.“10대 때는 우쭐했어요. 어린 나이에 돈 버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죠. 사실 저는 무명 시절이 없었거든요. 여태껏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고 수없이 많은 도시에서 일했고요. 20대 때도 열심히 일했죠. 하지만 슬럼프를 겪어야 했어요. 23살쯤 되니 매너리즘도 생기고, 모델로서 더 이상 새로운 걸 보여줄 수 없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기 때문이죠. 뉴욕에 가지 않았다면 30살이 되기 전에 모델을 그만두지 않았을까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쯤 되면 여유가 생기지 않을까 했는데 웬걸, 더욱 바빠졌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오래도록 모델로 일하고 싶지만 제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죠. 그래도 인생의 절반은 모델로 살았으니 다음에 다른 일을 하더라도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수없이 많은 슬럼프를 맞닥뜨렸지만 그녀는 도망가지 않았다. 많이 괴로워하고 한껏 자책하고 우울감에 몸부림치기도 했다. 그 시간을 부정하기 위해 굳이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많이들 물어보시는 게, 17살로 다시 돌아간다면 모델이 될 거냐는 거예요. 한 가지 확실한 건 인생의 모든 시간을 모델 일에 쏟지는 않을 거예요. 뉴욕에서 일할 때 가장 충격받았던 것은, 많은 톱모델들이 모델 일 이외에 학업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어요. 인생 전부를 모델 일에 쏟고 싶지는 않다고 하더군요. 그들에게 모델 일은 풀타임 잡(Full-time job)이 아닌 파트타임 잡(Part-time job)이었어요. 제가 한국에서 한창 모델 일을 하던 시절에는 학교를 다니거나 모델 일 이외의 새로운 정보를 접하거나 다른 일을 꾸준히 이어온 선배는 단 한 명도 없었어요.”

후배 모델들에게 강의를 할 때 한혜진은 늘 강조한다. “‘모델 일을 인생의 전부로 생각하지 마라’. 모델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요소가 절대적으로 중요한데, 그것만 믿고 다른 데 눈을 돌리지 않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느냐”고. “그 누구도 저에게 혹시 모를 경우에 대비해 다른 것을 병행하라고 말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가 말해주는 거예요. 가끔 외국 모델이나 배우들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내 연기의 원천은 대학 시절 경험에서 비롯된다’는 내용이 많아요. 부러워요.”

뉴욕에서 일하며 인생에 대한 시야가 넓어진 것에 감사하다는 한혜진. 뉴욕 진출은 물 흐르듯 지내던 끝에 만난 우연한 기회였다. 몇 살 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고, 결혼을 하는 일반적인 삶을 살아본 적 없는 그녀는 지금도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계획대로 살아온 적이 없어요. 그렇지만 목표를 세우면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성격이죠. 목표에만 매몰되어 다른 기회까지 놓쳐버리는 스타일이라 함부로 설정하지 않아요. 모델 일 역시 별생각 없이 엄마와 주변의 권유로 시작한 거예요. 이렇게 오래 할 줄도 몰랐어요. 결혼은 늘 생각하죠. 가족이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요. 하지만 그 역시 계획을 세울 만한 일이 아니잖아요? 흘러가게 두고 싶어요.

그저 오늘을 사는 데 집중한다는 그녀가 요즘 빠져 있는 취미는 웹툰. 좋아하는 작가들의 작품을 하나하나 짤막하게 코멘트하고 각 사이트별로 차이점을 분석하는 내용이 제법 날카롭다. “콘텐츠를 읽는 것도, 구상하거나 글 쓰는 것도 좋아해요. 모델 분야에 오래 몸담았으니 쓰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웹툰 작가와 협업해서 콘텐츠를 만드는 건 어떨까 생각해본 지 벌써 5년이 되었어요. 허구의 세계를 글로 풀어내는 것에도 관심이 많고요. 좋은 작가 아시면 추천 좀 해주세요.(웃음)” 몇 년 전에는 기타 연주에 한창 몰두했지만 지금은 전혀 안 친단다. 악기와는 연이 없는 것 같다며 웃었다. 피아노도 콩쿠르에 나갈 만큼 꽤 오래 쳤는데 다 잊어버렸다고.

“과외 선생님이 집에 오시면 독방에 갇혀 피아노만 치는 게 싫었어요. 혼자 고군분투하는 건 잘 안 맞아요. 모델 일은 ‘따로 또 같이’하는 작업이라 오래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제가 운동만큼은 꾸준히 하는 게 신기해요. 물론 질리지 않으려고 꾀를 내요. 실내에서도 하고 실외에서도 하고, 어제 등산을 했다면, 오늘은 수영을 하고요. 다양한 시도를 하죠. 죽기 전까지 운동은 계속하고 싶거든요.”

한혜진은 닮고 싶은 인생의 롤 모델로 어머니와 오드리 헵번을 꼽았다. 자기 관리에 철저하고 늘 배우려는 자세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화려한 삶을 뒤로한 채 ‘나누는 삶’을 살았던 오드리 헵번. 그렇게 나이 들어간다면 참 좋겠단다. 어떤 모델로 남고 싶은지 물으니 고개를 저었다.“그런 질문은 현역 모델에게는 답이 없는 질문이에요. 지금도 너무나 할 게 많은데 미래까지 생각해야 하나요? 기회가 왔을 때 하고 싶으면 하고 아님 마는 거예요. 전 그래요.”‘지금 이 순간’을 사는 그녀는 꽤 멋있다.

취재 / 정지혜 기자 | 사진 / 하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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