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스토리] 아듀~ 최희섭, 20년의 야구 불꽃

안희수 2015. 10. 22.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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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안희수] KIA 베테랑 타자 최희섭(36)이 파란만장한 현역 생활을 마감한다. 한국인 최초의 메이저리거 타자 '빅초이'의 스윙을 더는 볼 수 없다.

최희섭은 지난 20일 구단에 은퇴 의사를 밝혔다. KIA는 팀을 대표한 간판 타자이자 한국 야구의 위상을 높인 최희섭에 대해 예우를 갖출 생각이다. 김기태 KIA 감독도 "(최)희섭이에게 '구단과 상의를 하고, 박수받으며 떠날 수 있는 준비를 하자'고 했다"고 밝혔다.

광주일고 출신 최희섭은 지난 1999년 시카고 컵스에 입단해 메이저리그 문들 두드렸다. 2002년 한국인 야수 최초로 빅리그에 데뷔한 그는 플로리다와 LA다저스를 거쳐 2005년까지 뛰었다. 메이저리그 통산 363경기에 출장해 타율 0.240·40홈런·120타점을 기록했다. '빅초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대형 거포의 면모를 발휘했다.

2007년 한국 무대로 돌아온 그는 2009년 타율 0.303·33홈런·100타점을 기록하며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그러나 이후 부상에 발목 잡혔다. 올 시즌, 자신을 향한 비판을 이겨내고 그라운드에 돌아왔지만 고질적인 허리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정든 유니폼을 벗기로 결심했다.

마지막까지 빛나지 못했지만 최희섭은 한국 야구를 대표하는 최고 타자 중 한 명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야구 인생을 사진과 함께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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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국가대표 4번 타자'

광주일고 시절부터 최희섭은 유난히 돋보였다. 190cm-110kg이 넘는 거구에도 유연한 스윙을 갖고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주전으로 뛰었고 4번 타자로 꿰찼다. 1995년 선배 서재응, 김
병현과 함께 청룡기를 제패했고, 이후 봉황대기 대회에서 3년 연속 홈런을 때려내며 '초고교급' 선수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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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타자 메이저리거'

1999년 최희섭은 메이저리그 진출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향했다. 시카고 컵스가 그의 잠재력을 인정했다. 3년 동안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버텨냈다. 유망주 순위 상위권을 지키며 실력을 갈고 닦았다. 그리고 2002년 9월 3일(한국시간) 마침내 데뷔전을 치렀다. 그는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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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포들의 만남'

2002년, '국민 타자' 이승엽은 시카고 컵스의 스프링캠프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다. 당시 이승엽도 빅리그 도전 의지가 컸다. 자연스레 최희섭과의 조우도 이뤄졌다. 신구 거포의 만남은 연일 화제가 됐다. 당시 컵스 사령탑이던 돈 베일러 감독은 시범경기에서 두 선수를 함께 기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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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시작'

2003년, 최희섭은 80경기에 나서 8홈런·28타점을 올렸다. 4월에는 '이달의 신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시련이 닥쳤다. 6월 내야 뜬공을 잡는 과정에서 투수와 충돌해 뇌진탕을 당했다. 이후 후유증에 시달리던 그는 반등하지 못했고 시즌 후 플로리다(마이애미 전신)로 트레이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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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월 만에 또 트레이드'

플로리다 시절인 2004년, 최희섭은 플레툰 시스템에도 불구하고 전반기에만 15홈런을 때려내며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다. 그러나 후반기 시작과 함께 다시 한 번 LA 다저스로 트레이드 됐다. 박찬호가 전성기 시절 몸담은 익숙한 팀, 그러나 이적 직후 나선 31경기에서 단 한 개의 홈런도 때려내지 못하며 다시 시련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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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기 3홈런'

다저스 유니폼을 입고 보낸 첫 시즌은 최희섭은 타율 0.161·0홈런·6타점에 그쳤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5년 다시 한 번 '거포 본능'을 발휘했다. 다저스에서도 플래툰 시스템을 피하지 못했지만 133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3·15홈런·42타점을 기록해 주전 도약 가능성을 밝혔다. 6월 13일 열린 미네소타전에서는 한 경기 3홈런을 때려내는 괴력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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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마크를 달고 홈런을 때리다'

최희섭은 2006년 3월 열린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2라운드 미국전에서 '큰 일'을 냈다. 전성기에 있던 이승엽에 밀려 벤치를 지키던 그는 3-1로 앞선 4회 2사 1·2루에서 우측 폴대를 넘기는 스리런 홈런을 때려내며 팀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김인식 감독은 "이 경기 후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희섭은 이 대회를 4강으로 이끌며 병역 면제 혜택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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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품으로'

국제 대회에서 한국 야구의 위상을 드높였지만 돌아온 현실에서는 다시 한 번 시련이 닥쳤다. 2005시즌 선전했지만 주전을 꿰차지 못했던 그는 스프링캠프 도중 보스턴으로 트레이드됐고, 25인 로스터에 포함되지 못해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다. 시즌 중엔 40인 명단에서 제외되며 사실상 전력 외 자원으로 분류됐다. 2007년 템파베이와 계약을 맺으며 다시 한 번 빅리그에 도전했지만 그해 5월, 결국 꿈을 접고 해외선수 특별지명으로 지역 연고팀 KIA에 입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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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후유증, 저버린 기대'

2007년 5월 19일, 최희섭은 두산을 상대로 국내 무대 데뷔전을 치렀다. 구름관중이 몰렸다. 어쨌든 그는 메이저리거였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팬들의 시선도 차가워졌다. 첫 해 1군에서 52경기, 2008시즌 55경기에 나서는데 불과했다. 성적도 안 좋았다. 2군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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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거즈 V10을 이끌다'

2009년은 최희섭의 야구 인생에서 가장 빛난 시즌이다. 시즌을 앞두고 체중 감량을 통해 재기를 노렸고 성공했다. 타율 0.308(2위), 100타점(3위), 98득점(1위), 33홈런(2위)를 기록하며 타이거즈의 10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그해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최고의 1루수로 인정받았다. 이듬해인 2010년에도 21홈런을 치며 준수한 활약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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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세, 불꽃이 사라지다'

이후 최희섭은 다시 부상에 시달리며 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부진한 성적에도 연봉 협상에 진통을 겪어 비난도 컸다. 재활이 더디자 취미인 '등산'을 비아냥대는 '산악인'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올 시즌, 김기태 감독의 독려 속에 부상을 털고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허리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난 20일 은퇴를 선언했다.

정리=안희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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