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하나뿐인 수제 도구는 내 삶의 밑천

박서강 2015. 10. 21.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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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ew&] 서민의 삶 묻어나는 거리의 발명품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서 군밤을 파는 정모(70ㆍ남)씨의 알루미늄 호일 깔대기에 군밤이 한 가득 쌓여 있다.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는 서민들자신의 손으로 '생계 도구' 만들어

“집중해서 조심조심 쌓으면 절대 안 무너져.” 19일 서울 남대문로에서 만난 군밤장수 정모(70ㆍ남)씨가 연탄 화덕에 붙인 은박 깔때기에 군밤을 쌓으며 말했다. 족히 200알은 됨직한 군밤 더미를 아슬아슬하게 떠받친 깔때기의 정체는 알루미늄 호일로 만든 100% 수제품. 정씨는 높이 40cm, 지름 50cm의 깔때기를 매일 아침 만든다. “초벌 구운 밤을 깔때기 안쪽에 비스듬히 쌓아 두면 열기가 골고루 전해져 맛이 깊어지지.” 모양도 성능도 신기하기만 한 군밤장수의 깔때기는 불법 노점상의 고달픈 현실도 함께 담고 있다. 화력도 세고 연기도 덜 나는 군밤기계야 흔하지만 갑작스런 단속에 대처하는 데는 작고 가벼운 연탄 화덕 만한 게 없다. 화력이 약한 연탄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호일 깔때기는 이제 딸과 함께 쪽방촌을 벗어나고 싶은 정씨의 유일한 희망이자 밑천이 됐다.

투박하고 거칠지만 실용성은 탁월

커피 한잔부터 아파트 설계까지, 손쉽게 ‘나만의 아이템’을 주문하고 즐기는 요즘 세상에 단돈 1,000원, 2,000원을 아끼기 위해 스티로폼을 자르고 나무조각을 짜맞추는 사람들이 있다. 동전 한 닢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웬만한 건 제 손으로 뚝딱뚝딱 만든다. 원래의 용도와 전혀 다른 쓰임새로 발탁된 물건들이 다소 황당해 보이기도 한다. 비록 투박하고 거친 모양새지만 물건 하나는 실용적이다. 어느 전문가가 주문제작을 해 준들 이보다 더 사용자의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까.

스티로폼을 오려 묶어 쿠션으로 활용한 간이의자.

서울 중구 칠패로의 한 공영주차장 관리인이 만든 쿠션 의자. 간이 의자에 방석을 접어 얹은 다음 테이프를 감았다.

왼쪽이 휴지통에 버려진 의자 쿠션을 조합해 만든 손님용 의자.

광역버스 기사 정희선(57ㆍ남)씨의 운전석 옆에 조그만 바구니가 달려 있다.

정씨의 버스엔 구토 증세가 있는 승객을 위한 비닐봉지가 매달려 있다. 정씨는 "반으로 자른 PET병을 씌우지 않으면 날려서 좋지 않다"고 말했다.

18일 중구 장충단로 거리에 놓인 간이 의자에 스티로폼 쿠션이 얹혀 있다. 슈퍼 주인은 “쉬었다 가는 사람들 엉덩이 시리지 말라고 스티로폼을 오려 덮었다” 고 말했다. 방석을 접어 올린 후 테이프를 여러 겹 감은 간이 의자는 중구 칠패로의 주차장 관리인 김필호(67ㆍ남)씨의 작품이다. 김씨는 버려진 의자의 쿠션을 휴지통과 조합해 손님용 의자도 만들었다. 따로 돈 주고 쿠션 의자를 살 형편은 못 되지만 가끔 찾아오는 벗을 위하는 마음만은 따뜻하다.

서울과 경기 용인을 오가는 광역버스 기사 정희선(57ㆍ남)씨는 4년 전 운전석 옆에 바구니를 달았다. 졸음을 쫓기 위한 껌과 상비약, 볼펜 등을 담아 두기 위해서다. 정씨는 “필요한 물건을 바구니에 담아 놓으면 언제든지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구토증세가 있는 승객을 위한 비닐봉지 역시 날리지 않도록 페트병을 잘라 씌우고 매달았다.

보통 반찬통으로 사용하는 밀폐용기가 오토바이 계기판 앞에 달렸다. 택배기사가 휴대폰 거치대로 사용 중이다.

보통 반찬통으로 사용하는 밀폐용기가 오토바이 계기판 앞에 달렸다. 택배기사가 휴대폰 거치대로 사용 중이다.

나무토막과 플라스틱 판을 이용해 투박하게 만들어낸 거치대.

주문제작 상품이 된 퀵서비스 기사들의 휴대폰 거치대.

물품 적재함을 개조한 오토바이.

중구 동대문시장에서 활동하는 오토바이 택배 기사 이모(76ㆍ남)씨는 계기판 앞에 플라스틱 밀폐용기를 달았다. 냉장고가 더 어울릴 듯한 이 반찬통은 이씨만의 휴대폰 거치대다. “하루5만~6만원 벌어 기름값, 점심값, 세금 떼고 2만~3만원 가져간다.”는 이씨에게 10여만원이나 하는 퀵서비스 전용 거치대는 사치다. “을지로에 가면 아크릴판으로 만들어 주는데 그냥 내 손으로 만들었어요. 돈 들이는 게 싫어서….” 옆에 있던 다른 택배 기사가 나무와 플라스틱 조각을 철사, 못으로 거칠게 조림한 자체 제작 거치대를 보여 주며 웃었다.

속칭 ‘짐바리’라고 부르는 오토바이 적재장치는 크게 개조하려는 수요가 늘면서 아예 주문제작 상품으로 자리 잡은 경우다. 그러나 개조에 앞서 교통안전공단의 승인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이런 과정을 생략한다. 시간과 돈이 문제다. 주문을 하는 사람도, 만들어 주는 사람도 불법 개조임을 알고 있지만 생계를 위해서 눈을 딱 감는다. 중구 남대문로에서 만난 한 퀵서비스 기사는 “법대로 개조 승인받고 그러면 일을 못한다. 먹고살 길이 이것뿐이라 불법인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한다” 라고 말하며 훌쩍 오토바이에 올랐다.

박서강기자 pindropper@hankookilbo.com

류효진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최민영 인턴기자 (숙명여대 법학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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