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인과 집] 집 없어 더 서럽소.. 늙어서도 이곳저곳 전전

신훈 기자 2015. 10. 19.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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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한국 노인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일러스트=서민호 화백

집 없는 노년은 서럽다. 산업화가 국가의 목표였던 시절, '내 집 마련'은 모든 서민의 목표였다. 그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렸는데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채가 없다. 월세 내는 날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전세 보증금은 해마다 오른다. 돈 나올 구석 없는 노년의 '전세 난민'. 자식들에게 면이 안 선다. 이삿짐 쌌다 풀었다 하는 것도 이제 그만하고 싶다. 누구나 내 집 마련의 꿈을 꿨지만, 그 꿈을 누구나 이룬 건 아니었다. 보건복지부의 지난해 노인실태조사에서 65세 이상 노인의 30.8%는 '내 집'에 살고 있지 못했다. 11.5%는 월셋집, 8.4%는 전셋집에 살고, 나머지는 자녀 집이나 노인복지시설에 거주하고 있었다.

노년의 ‘전세 난민’

1945년 태어난 ‘해방둥이’ 김모(70)씨는 “집 사려고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고 했다. 그는 행상을 30년쯤 했다. 트럭에 채소를 싣고 서울을 비집고 다녔다. 경주 신혼여행 말고는 제대로 된 휴가 한 번 가본 적이 없다. 그래도 평생 내 집을 가져보지 못했다.

벌어들이는 돈보다 집값이 늘 한발 먼저 올랐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1986년부터 지난달까지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4.71배나 상승했다. 가방끈 짧고 물려받은 재산도 없는 김씨가 열심히 채소 팔아 따라잡기에는 상승세가 너무 가팔랐다.

현재 아파트 경비원인 김씨는 서울 영등포의 방 2칸 다세대주택에 보증금 8000만원 전세로 살고 있다. 요즘 동네 부동산 유리벽의 전세 매물에 자꾸 눈길이 간다고 했다. 내년 1월이 재계약인데 집주인이 보증금을 1000만원 올렸다.

월 120만원 벌이로 감당하기에 벅찬 액수다. 주변 집값이 다 올라서 올린다는데 달리 할 말도 없다. 큰길에서 조금 더 멀리 떨어진 조금 더 작은 전셋집을 구할 생각이다.

대기업 부장으로 명예퇴직한 김모(65)씨. 그의 자랑은 명문대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한 두 아들과 30년 가까이 살뜰히 모아 마련한 서울시내 40평대 아파트였다. 남부러울 것 없던 삶은 2005년 퇴직 후 시작한 주식 때문에 어긋나기 시작했다.

소일거리로 손댄 주식에서 조금씩 수익을 보자 퇴직금 3억원을 몽땅 털어 넣었다. 주식으로 돈 벌어서 강남에 아파트를 사고 아들 결혼 밑천도 대주려 했다. 빚까지 내서 주식을 샀는데 2008년 세계 금융위기로 증시가 폭락했다. 빚을 갚기 위해 집을 내놓아야 했다. 김씨는 아내와 함께 경기도 성남의 큰아들 집에 얹혀산다.

허모(66·여)씨는 서울 노원구 다세대주택에 전세로 혼자 살고 있다. 지난 8월 전세 계약서를 다시 썼다. 보증금 7000만원 전세를 보증금 4000만원에 월세 25만원으로 바꿨다. 집주인이 전셋값을 1500만원 올려달라는데 그만한 돈이 없어 월세로 돌려야 했다.

허씨의 옆집·아랫집은 이미 보증금 8500만원에 살고 있다. 분식집에서 일하며 밥벌이하는 허씨로선 목돈을 마련할 방법이 없다. 나이 들어 새로 집을 구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 허씨는 “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하고, 남은 보증금 3000만원을 최대한 아껴 쓰는 수밖에…”라고 했다.

이렇게 수입이 늘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는 노년에 전셋값이 오른다는 건 치명적이다. 서울 노원구 부동산중개사 김모(51)씨는 “다세대주택 세입자 노인들은 전셋값 상승을 감당치 못해 더 작은 집, 반전세, 월세로 도미노처럼 옮겨가는 추세”라고 했다.

노년에 내 집이 없을 확률

김모(67)씨는 서울 종로구 쪽방에 혼자 산다. 1평 쪽방은 몸을 뒤척일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다. 식사 준비할 공간도 마땅치 않아 휴대용 가스버너로 라면을 끓인다. 같은 건물 주민 11명이 화장실을 함께 쓴다. 김씨는 하루 8000원씩 월 24만원을 내고 이곳에 살고 있다.

노년에 내 집이 없을 확률은 배우자, 학력, 일자리에 큰 영향을 받는다. 지난해 노인실태조사에서 배우자가 있는 노인의 78.0%는 내 집에 살고 있었지만, 없는 경우는 이 비율이 55.2%로 뚝 떨어졌다. 전문대 이상 학력을 가진 노인은 77.4%가 내 집에 사는 데 비해 저학력 노인은 55.9%만 그랬다. 미취업 상태 노인의 자가 거주 비율은 66.8%로 뭐든 일자리를 가진 노인(75.0%)보다 10% 포인트 가까이 낮았다.

김씨는 결혼을 하지 못했다. 초등학교 졸업장이 학력의 전부다. 젊어서는 건설 현장을 돌아다니며 일용직으로 일했지만 지난 10년 넘게 일을 하지 않았다. 기초생활수급자로 지원받는 생계비만 통장에 들어왔다가 이내 빠져나간다. 이 시대 집 없는 노인의 조건을 고루 갖춘 그는 “내 집은 꿈도 꾸지 않는다. 두 다리 뻗고 누울 임대주택에 들어갈 수만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고 말했다.

신훈 기자 zorb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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