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관이 감정노동자 된 대한민국

곽래건 기자 2015. 10. 14.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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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집행의 최일선에서 주폭·민원인에 시달려.. 고용정보원 730개 직업 분석 - 휘둘리는 경찰 술취해 경찰서에서 대변보고 경찰 폭행 혐의로 잡혀와서 "체육관에서 한판 뜨시죠" 술값 안 내고 난동부리다 "우리 아빠가 구의원이야" 징계·승진 스트레스보다 악성 민원 고통이 더 커

경찰관은 치안 유지와 법 집행의 최일선에 선 공무원이다. 정상적 국가에선 제복 입은 경찰은 그 자체로 법과 권위를 상징한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선 민원인과 범죄자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감정노동자'로 분류되는 현실이다. 한국고용정보원이 13일 발표한 분석 결과에 따르면 경찰관은 한국의 주요 직업 730개 중 '화나게 하거나 무례한 사람을 대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화나게 하는 사람을 상대하면서도 자기 감정을 억제하고 나타내선 안 되는 대표적 감정노동자로 꼽히는 텔레마케터, 보건위생·환경검사원과 함께 공동 1위였다. 경찰들이 매일같이 부닥치는 현장 상황을 짚어봤다.

#1 지난 8월 원피스 차림의 여성 A(31)씨가 서울 강남경찰서 1층 형사당직실로 잡혀왔다. A씨는 새벽까지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 사람과 시비가 붙어 손찌검을 해 경찰서까지 오게 됐다. 당직 형사들은 만취한 A씨가 난동을 부리자 수갑을 채웠지만, A씨는 "담배 가져와"라고 고함을 치며 욕설을 내뱉었다. 경찰이 대꾸를 안 하자 A씨는 "×××들, ×돼봐라"고 하더니 옷을 입은 채로 그 자리에서 대변을 봤다. 경찰은 여경을 불러 샤워실에서 A씨를 씻게 하고 체육복으로 갈아입혔다. 당직실에 있던 형사는 "'내가 이런 꼴을 보려고 경찰관이 됐나' 하는 생각에 갑자기 분노가 치밀어올랐다"고 했다.

#2 지난 7월 서울의 한 파출소엔 B(23)씨가 담배꽁초 투기를 단속하는 경찰을 폭행한 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었다. B씨는 경찰들에게 "억울해서 그러는데 체육관에서 복싱 스파링 한번 뜨시죠"라고 말했다. B씨가 입건됐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그의 아버지도 "내가 체육관을 잡아주겠다"고 거들었다. 해당 경찰서 관계자는 "당시 B씨 측이 서장은 물론 국정원, 검찰 등에 전화를 걸어 관련 경찰들이 가슴앓이를 했다"고 털어놨다.

#3 지난달엔 정모(여·20)씨가 술값을 안 내고 난동을 부리다 출동한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법원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정씨는 출동한 경찰에게 "우리 아빠가 구의원이야, 너희 다 죽었어. 아빠한테 전화할 거야"라고 폭언을 했다. 정씨는 "도망간 내 남자친구나 찾아보라"며 경찰의 다리와 급소를 걷어찼다.

경찰관들은 그래도 경찰이 폭행을 당하면 공무집행방해로 처벌이라도 할 수 있지만, 악성 민원 대부분은 처벌은커녕 어디에다 하소연할 곳도 없다고 한다. 지난달 서울의 한 경찰서 수사관에게 "인터넷에서 명예훼손을 당했다"는 여대생이 찾아왔다. 증거 사진도 없고 진술도 오락가락해 수사를 이어가기가 어려웠다. 이런 사정을 설명하자 여대생은 욕을 하며 짜증을 냈다. 점심을 먹으러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 보니 그의 노트북엔 여대생이 마시던 커피가 부어져 있었다.

경찰대학 부설 치안정책연구소가 지난해 5월 경찰관 8526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전체 경찰관의 53.2%가 매달 1~4건의 악성 민원을 겪는다고 응답했다. 23.2%는 월평균 5~9건, 10.4%는 20건 이상을 겪는다고 답했다. 경찰관들은 이 조사에서 가장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으로 '감정노동'을 꼽았다. 악성 민원에 대한 스트레스 지수는 5점 만점에 4.15로 '강력범 대처'(3.62) '징계나 승진'(3.85) '동료나 상관'(3.7)보다 높았다.

경찰서 민원실은 경찰 여러 부서 가운데 감정노동의 강도가 가장 센 곳이다. 서울의 한 경찰서 민원실장은 경찰서 민원실을 '쓰레기통'에 비유했다. 경제팀이나 형사계 등 수사를 받는 곳에선 불이익을 받을까 봐 큰소리를 못 치다가, 집에 돌아가기 전 경찰서 입구에 마련된 민원실에 들어와 "경찰은 왜 이따위냐"며 불만을 내뱉고 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수사 부서도 수사 결과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수사가 왜곡됐다거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며 악의적인 민원을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일단 민원이 제기되면 이쪽저쪽 불려다니며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지난 8월 서울 강남 지역의 한 경찰관은 피의자에게 '수갑을 채우고 밥을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소됐다. 해당 경찰관은 "사무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보는 가운데 밥을 줬다"며 "결국 해명이 되겠지만 해명을 하는 과정 자체가 스트레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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