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유산 등재는 도시엔 죽음의 키스

심진용 기자 입력 2015. 10. 13. 22:07 수정 2015. 10. 14.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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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출신 도시사회학자 겸 언론인 마르코 데라모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 연간 나라당 등재 신청이 2건, 전체 심사는 45건으로 제한돼 있어 ‘본선’ 진입부터 빡빡한 데다 등재 후보에 올라도 통과를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일단 등재되고 나면 결실은 달다. 해당 지역 유적이나 자연경관은 유네스코의 모니터링 아래 강력한 보호를 받는다. 세계유산 이름표를 내세워 더 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보전과 경제 활성화를 동시에 이룰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다.

그런데 “유네스코의 세계유산 등재는 ‘죽음의 키스’”라고 말하는 이가 있다. 이탈리아 출신 도시사회학자 겸 언론인인 마르코 데라모(68)는 지난해 학술지 ‘뉴레프트리뷰’에 세계유산 제도의 폐해를 조목조목 따지는 글을 기고했다. 그의 글은 최근 출간된 ‘뉴레프트리뷰’ 한국어판 6호(도서출판 길)에도 ‘유네스코가 도시를 죽이고 있다’는 제목으로 실렸다. 지난 8일 서울 코엑스몰 서울국제도서전 현장에서 그를 만났다. 데라모는 주한 이탈리아문화원 초청으로 도서전에 참가해 이날 같은 내용으로 강연했다.

이탈리아 작가 마르코 데라모. 김정근기자 jeongk@kyunghyang.com

데라모는 “세계유산 이름표가 붙으면 해당 도시는 박제가 된다”면서 “도시 전체가 보전이란 명목으로 방부처리되고 나면 성장이나 변화는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유네스코가 기원전 450년에 그리스 아크로폴리스 일대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면 (이후 세워진) 파르테논 신전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탈리아 산 지미냐노의 세계유산 등재 이전과 이후의 모습. 마르코 데라모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도시는 과거 간직했던 고유성을 잃어버린다”고 비판했다. 주한 이탈리아문화원 제공

데라모는 이탈리아 산 지미냐노와 그리스 로도스를 돌아보았고 프랑스 몽 생 미셸과 라오스 루앙 프라방을 방문했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그는 “독특한 풍취를 자아내던 장소들이 다 똑같은 모습이 되었다”면서 “거리마다 장신구며 엽서 따위를 파는 가게가 넘치고 원주민들이 살던 곳은 모조리 숙박업소가 되었다”고 했다. 고유성을 지키려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지역이 막상 등재 후에는 고유성을 상실하고 만다. 데라모가 발견한 세계유산의 역설이다. 그는 “생명체가 그러하듯 유적과 유물 역시 자연스럽게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런 모습이 더 아름답다”고 믿는다. “건설 당시 그리스 신전들은 지금 보듯 하얗지 않았습니다.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칠했고 무겁고 갑갑해 보이는 지붕을 얹었습니다. 신전들이 당시 모습 그대로 보전됐다면 지금처럼 아름답지 않았을 겁니다. 지금 신전이 아름다운 건 세월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무너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탈리아 로마의 마르첼로 극장. 아래 2층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티누스가 지은 극장건물이고 그 위로 16세기에 지은 대저택이 보인다. 마르코 데라모 교수는 “서로 다른 시대의 건축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이탈리아관광청 홈페이지

그가 박물관과 예술품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살아 있는 도시를 원할 뿐이다. “브라질 상파울루나 미국의 시카고는 큰 도시이면서 동시에 문화적으로 생기가 넘치는 도시입니다. 훌륭한 식당과 큰 대학, 좋은 박물관과 연주회장이 있습니다. 상파울루를 찾는 관광객은 많지만 그런 사람들만을 위해 억지로 만든 시설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게 상파울루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오로지 관광만을 위해 작동하는 도시는 죽은 도시라는 얘기다. 지나치게 가혹한 비판인지도 모른다. 1972년 협약 채택 이후 유네스코는 세계유산 제도를 운영하며 자본과 개발의 논리 앞에 인류의 유산을 보호하려 노력해왔다. 데라모는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어느 시대나 사람들은 자신을 현대인이라 생각했고 늘 자신들이 전에 없던 파괴를 일삼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대 로마시대 유목민들은 염소 떼를 몰고다니며 리비아의 울창한 숲을 사막으로 만들었고, 기독교인들은 신전 기둥을 뽑아다 교회를 지었다”고 말했다. 로마시대 유목민과 현대인의 ‘파괴 역량’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그는 또 “멋진 탑이나 궁궐을 밀어버리고 아파트를 짓자는 게 아니다”라면서 “개별 기념물이 아니라 도시 전체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는 것은 곤란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여기에도 반론이 나온다.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인 최재헌 건국대 지리학과 교수는 “도시 전체를 세계유산으로 지정하는 건 여러모로 고민해야 하는 게 맞다”면서도 “한국처럼 역사는 깊은데 땅은 좁은 나라, 파기만 하면 유물·유적이 나오는 나라에서 특히 경주 같은 옛 왕경을 개별 유물·유적 단위로 보전한다면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민은 필요하다. 한국만 해도 2015년 현재 세계유산 12곳을 보유하고 있다. 데라모가 지적한 문제점은 국내 세계유산 곳곳에서 발견된다. 조용하던 시골 마을 경주 양동마을은 2010년 세계유산 등재 이후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몸살을 앓았다. 공장제 기념품을 파는 노점이 줄지어 선 경주나 부여 거리에서 ‘이게 최선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보다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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