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의 어리석은 결정으로 일본은 고립될 것이다"

2015. 10. 1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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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짬] 중국 우한대 국제문제연구원장 후더쿤 교수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체결, 1952년 4월 발효)은 사실상 미국 일본 두 나라간 거래였다. 2차대전 때 적국이었던 일본과의 강화조약은 미국 소련 영국 중국 등 4대국이 모두 합의 한 바탕 위에 체결돼야 했다. 하지만 소련은 서명을 거부했고 중국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모두 초청도 되지 않아 참석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그 결과 중국은 댜오위다오(센카쿠열도) 등의 귀속(영유권)문제는 상정조차 할 수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최대 피해자는 중국이다.”

중국의 항일운동과 반파시즘전쟁 분야에서 중국 내 최고 권위자로 알려져 있고, 국제수로(해양) 분야 전문가이기도 한 중국역사학자 후더쿤(湖德坤. 69) 우한대 국제문제연구원장은 지난 8일 성균관대 초청 강연 뒤 질의응답시간에 그렇게 얘기하면서 “한국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항일운동·국제수로 중국 최고 권위자
지난주 방한 ‘2차 대전과 중국’ 강연
“샌프란시스코조약 최대 피해는 중국”

전후 독도·댜오위다오 문제 ‘불씨’는
식민지 연쇄독립 꺼린 영국에 ‘책임’
‘일본 안보법안’ 미국에도 나쁜 영향

오늘날의 ‘독도 문제’가 바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당시 일본의 전후 영토 주권문제를 모호하게 처리한 미국·일본의 ‘담합’의 결과인 만큼, 후 원장의 말은 거기에 대해 한국도 할 말이 있지 않느냐는 투로 들렸다. 한국 또한 애초에는 초안을 작성한 미국이 전승국에 포함시키고 독도도 한국 귀속으로 명기했다가, 일본의 항의로 그 내용을 빼버렸다. 결국 한국은 공식초청도 받지 못했다. 일본의 침략전쟁 최대 피해국들과 주요 교전국들을 배제한 채 미군의 일본 주둔과 오키나와 귀속 및 미일안보조약 등을 교환조건으로 미국과 일본이 전후 처리 문제를 사실상 단독으로 결정한 거나 다름없는 그 조약은 전후 동아시아 질서재편에 핵심적 역할을 했고 그 영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서울 명륜동 성균관대 600주년 기념관에서 열린 이날 강연 제목은 ‘제2차 세계대전과 중국의 항일전쟁’. 우한대를 나와 1970년부터 모교에서 제2차 세계대전사, 일본 근현대사, 중국외교사 등을 강의하며 부총장까지 역임한 후 원장은 “2차대전의 승리는 중국과 세계 각국의 수백만 인민들의 희생과 맞바꾼 것”이라며 “그것은 쉽게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국민당의 전방전쟁(정면전장)과 공산당의 후방전쟁(적후전장)을 축으로한 중국 인민들의 전면적 항일전쟁이 일본군의 소련을 겨냥한 북진정책, 동남아와 남서태평양을 겨냥한 남진전략, 인도와 인도양·중동을 겨냥한 서진전략 모두를 무산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한·중 항일전선 협력과 전후 한국 등의 독립과 유엔 창설 등 국제질서 재건에도 중국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의미도 축소·폄훼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난 4일 방한해 제주도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해양지리문제 회의에도 참석한 후 원장은 최근 일본 아베 정권의 행보와 관련해 “한국, 중국에도 영향을 주는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말했다. “위헌적이며 위험한 신호다. 일본이 과연 평화적으로 발전할 수 있을지 이웃나라 사람으로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은 일본의 ‘평화헌법’ 제정을 주도했으면서도 그 취지에 위배되는 안보법안을 통과시키도록 일본정부에 압력을 가하면서 일본 편향적인 정책을 취하고 있다. 장차 미국의 외교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일본의 최근 행보는 윈-윈으로 가는 시대조류에 역행하는 것이어서 계속 그럴 경우 일본은 고립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역사학자로서는 적절치 않은 발언일진 모르겠으나, 우리는 항상 경각심을 갖고 주시하면서 경고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후 원장은 질의응답 시간에 “1946년에 독도가 전후 한국에 귀속돼야 한다고 명기한 중국공산당 연안 총사령부 작성 당안자료를 내가 직접 봤다”고 했다. 그는 1943년 12월에 카이로에서 열린 미국·영국·중국 정상회담에서 “1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강탈한 모든 영토에 대한 권리를 박탈하고 조선의 독립을 지원하며, 동북지역(만주)·타이완(대만)·펑후제도 등 일본이 점령한 중국의 영토를 중국에 귀속한다고 합의했고, 이에는 장제스의 주장이 큰 역할을 했다”고 했다. 그때의 카이로 선언 내용은 1945년 7월 포츠담 선언에서도 재확인돼 2차대전 이후 국제질서(얄타체제)의 토대가 됐다. 후 원장은 현대중국은 항일전쟁과 전후 국제질서 재편과정에서의 국민당과 장제스의 역할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며, 9월 3일 열린 항일전쟁과 반파시즘전쟁 승리 70년 기념 천안문 열병식에 항일전쟁에 참전한 대만 퇴역군인들을 초청한 사실도 상기시켰다.

카이로 회담 당시 장제스는 전후 한국을 독립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도 동의했으나 영국은 다만 “한국을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한다”고만 명기하도록 내용 수정을 요구했다고 후 원장은 밝혔다. “이에 대해 (당시) 황총후이 중국대표는 즉각 반대했다. 왕총후이는 한국은 일본이 침략해 합병한 국가로, 일본의 대륙정책이 한국의 합병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만약 ‘일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게 한다’고만 언급하고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향후 중대한 문제들이 남게 되어 일본이 새로운 계략을 꾸밀지도 모른다’고 지적하였다.”

후 원장은 한국 독립 명기를 바라지 않았던 영국의 태도와 관련해, “그때 영국은 만약 한국 독립을 명기할 경우 홍콩과 말레이반도, 미얀마 등 영국이 지배하던 나라·지역의 연쇄독립으로 연결될 것이라 보고 이를 꺼렸다. 영국은 일본이 점령했던 중국 서남해 섬들의 영유권도 단지 일본서 분리돼야 한다고 했을 뿐이다. 그것이 지금의 댜오위다오 분쟁 등의 소지를 남기는데 일조했다. 영국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식민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당시 미국의 태도는 영국의 이런 태도를 닮았다. 미국은 일본을 냉전의 동아시아 교두보로 확보하고 미군주둔을 보장받기 위해 댜오위다오와 류큐(오키나와) 등의 귀속문제를 전범국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타결지었고, 애초에 한국 귀속을 명기했다가 그 내용을 빼버림(그렇다고 일본 귀속을 명기한 것도 아니다)으로써 발생한 오늘의 ‘독도문제’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2차대전 당시 중국의 역할 및 평가와 관련해, 후 원장은 중일전쟁 시작 다음해인 1938년 10월 일본 육군 총병력은 34개 사단이었는데 그 중 32개 사단이 중국에 배치(94%)됐으며, 1941년 말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일본 육군 총병력 51개 사단 중 35개 사단(70% 이상)이 중국에 투입된 반면 태령양전장 동원 병력은 총 병력의 20%도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의 주력부대가 중국에 발이 묶여 있었고 그것이 2차대전 향방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얘기다. 독일-소련 전투의 명암을 가른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때 일본의 소련 동시공격을 집요하게 요구한 히틀러의 요청을 거부하게 만들고, 영국·프랑스의 약세로 전략적 공백이 된 서남아·중동으로의 일본군 진출(서진전략)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도 중국인민들의 대규모 항전으로 일본이 중국 파병 자국군을 뺄 수 없게 된 탓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고 평가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그는 냉전을 가장 큰 원인으로 지목했다. “냉전 당시 중국은 미국 영국 일본 등 서방의 적대국이었다. 1950~60년대에 2차대전 연구들이 활발했고 그 성과들도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때 서양의 저서들에서 중국의 역할은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축소되고 폄훼됐다. 중-소 분쟁도 한몫했다. 당시 소련의 2차대전 관련 저서에서도 중국의 역할은 의도적으로 축소·폄훼됐다. 중국 자체 문제도 있다. 공산당, 국민당의 역사관이 달랐고 서로 적대하면서 교류도 없었다. 지금은 양당 관계가 크게 달라졌으나 항전 당시의 자료수집, 정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세계와의 교류, 외국어로의 자료번역, 소개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글·사진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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