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안사건처럼 밀어붙인 고영주의 '가짜 포르말린 통조림'

2015. 10. 1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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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토요판] 커버스토리
한홍구가 쓰는 ‘고영주의 역사’

60대 중반을 넘긴 남성이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지만, 최근 우리 사회는 두 명의 스타 탄생을 보았다. 김영만과 고영주, 한 분은 많은 사람들, 특히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종이접기로 위로와 추억을 선물했다면, 또다른 분은 말 잘하기로 소문난 의원들이 어안이 벙벙하여 할 말을 찾지 못할 정도로 말의 전당 국회를 들었다 놓으며 망언의 역사를 다시 썼다.

앞의 글에서 김의겸 기자는 고영주가 노무현 대통령을 ‘변형된 공산주의자’라고 본 것에 빗대어 고영주를 ‘변형된 출세주의자’로 불렀다. 좌절된 출세욕이 고영주의 막가파식 행동양식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있는 분석이지만, 또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고영주가 2006년 고검장 승진에 탈락하여 옷을 벗은 뒤 보여준 일련의 행동은 단순한 불만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사명감의 발로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대한민국이 검찰공화국이 되면서 차관급인 검사장 자리가 무려 55개로 늘어났다. 검사장으로 옷을 벗는 사람들의 수가 매해 십수명은 된다는 이야기다. 그중 장관이나 의원은 아니더라도 나름 물 좋은 자리를 맡게 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퇴임 후 고영주가 맡은 공직은 사학분쟁조정위원회(위원), 방송문화진흥회(감사, 이사, 이사장),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위원) 등이다. 보는 입장에 따라서 물 좋은 자리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최전선이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고영주가 누구의 추천으로 어떤 경로를 거쳐 이런 자리에 임명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전직 검사장급들이 돌아가며 맡는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수많은 공안검사들 중에서도 유독 고영주만이 아스팔트 우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일선에서 고군분투해왔다. 그가 맡은 자리는 ‘전관예우’ 차원에서 맡았다기보다는 자칭 ‘애국세력’들에 의해 공안 칼잡이로 격전지에 파견되거나 본인이 자청해서 뛰어든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엄청난 사명감

흥미있는 점은 그가 이런 활동을 통해 사법시험 기수를 중시하는 풍토와 상관없이 이명박 정권 이후 법무부 장관, 검찰총장, 청와대 민정수석 등의 후보자 물망에 꾸준히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따르면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검찰총장 인선을 하면서 고영주(사시 18회), 차동민(22회), 박한철(23회), 안창호(23회), 남기춘(25회) 등 전직 검찰간부에게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검증 동의 요청서를 보냈지만 안창호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고사했다고 한다. ‘변형된 출세주의자’ 고영주가 검찰총장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영주처럼 척 보면 공산주의자인지 판별할 수 있는 독심술을 갖지 못한 처지인지라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제일 큰 이유는 청문회 통과를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튼실한 로펌에서 7년쯤 변호사로 있으면서 벌어들였을 막대한 수임료가 공개된다면 청문회는 통과 못한 채 망신만 당하는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오죽하면 저쪽 동네에는 미운 놈 장관 추천하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다 있을까. 고영주가 맡은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황교안이 맡은 법무장관이나 총리에 비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청문회라는 번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군대는 현역으로 마쳤고, 학위는 서울공대 졸업 학사학위가 끝이니 표절 논란에 걸릴 일도 없는 고영주가 인사검증을 마다했다면 돈 문제나 위장전입 같은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거나, 아니면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 임명 가능성이 극히 낮다고 보고 들러리 서기 싫다고 검증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다.

2006년 고검장 승진 탈락 뒤
그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을 보면
불만 표출 넘은 사명감의 발로?
사분위, 방문진, 세월호 특조위 등
간 곳마다 진보-보수 대립 최전선

이명박 정권 이후 법무장관과
검찰총장, 청와대 민정수석 물망
실제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검증
동의 요청서를 보냈지만 고사
청문회 통과 자신 없어서였을까

고영주가 걸어온 길을 볼 때 또 하나 생각해볼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엄청난 사명감일 것이다. 고영주 스스로가 보기에 ‘애국진영’에 자신의 역할을 대신할 사람은 없다. 그것은 밖에서 보아도 마찬가지다. 청문회 때문에 임명직에 나갈 수 없는 자들은 왕왕 선출직인 국회의원에 도전하는데, 고영주가 검사 옷을 벗은 뒤 고향 보령에서 국회의원 출마를 준비했다는 이야기도 없다. 국회의원이 되면 그저 300분의 1일 뿐인데, ‘애국진영’ 내에서는 가장 헌신적으로 모든 문제에 최일선에서 칼을 휘두르고 있는 자신을 대신할 사람이 없는 것이다. ‘변형된 출세주의자’ 고영주는 또 한편으로는 자나 깨나 “소는 누가 키우나” 걱정하고 있다.

고영주 주연의 막장드라마가 순기능도 갖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바로 ‘공안의 민낯’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공안검사들은 자나 깨나 나라걱정만 하는 애국자들이다. 주관적으로 말이다. 어떤 재치있는 사람은 20세기 전반 한국과 일본의 역사를 비교하여 한국은 매국노들이 나라를 망치고, 일본은 애국자들이 나라를 망쳤다고 한 바 있다. 지금 백발의 공안검사의 각별한 나라사랑이 나라의 각별한 걱정거리가 되고 있다. 고영주는 자신이 “남보다 국가적 위험을 먼저 인식”한다면서 자신에게 거슬리는 사람들에게는 모두 공산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이고 있다. 세상이 많이 변하여 이런 낙인찍기는 예전같이 효과적이지는 않다. 같은 검찰 출신의 새누리당 강경파 의원으로 고영주를 변호하던 박민식조차 우상호 의원이 친북용공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수백만이 친북용공이란 말이냐며 반발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과거 공안사건에서 수사관들은 피의자가 공산주의자라는 것을 전제해놓고 심문을 하곤 했다. “너 공산주의자지?” 이런 질문은 빨갱이로 몰린 수십만이 죽어간 한국 사회에서 치명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밀실에서는 훨씬 더한 얘기도, 훨씬 더한 질문도 마구 퍼부어지곤 했다. 간첩사건으로 고생한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너 공산주의자지?”라는 질문에 아주 편안하게 그렇다고 답하게 될 때가 있다고 한다. “너 이 자식, 김일성 몇번 만났어?” 같은 황당한 질문을 매타작과 더불어 한 이틀 받다 보면 “너 공산주의자지?” 같은 질문이 현실적으로 들려 안도감을 갖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뇌구조가 형성된 공안검사들이 자신의 독심술에 대해 엄청난 자기확신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박근혜 정권이 이런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크나큰 비극이다.

그는 ‘공산주의’란 말을 좋아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안검사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들이겠지만, 1960년대만 해도 서울지검 공안부 검사들이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인혁당사건의 기소를 거부하기도 했고, 유신 말기에는 대검 공안부장 박준양이 도시산업선교회 목사들이나 관련 여성노동자들을 불순세력으로 조사하라는 박정희의 지시에 대해, 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지키라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불순세력으로 잡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기도 했다. 1980년 광주학살을 거치면서 공안 수요가 폭증하여 공안부가 각광을 받게 되었지만, 과거 검찰이 보여준 최소한도의 양심과 자존심은 사라져버렸다. 1986년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나 1987년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는 검찰이 청와대를 등에 업은 경찰에게 밀릴 정도로 체면이 실추되기까지 했다. 그러니 군사독재 시절의 검찰이 군이나 안기부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시작되면서 군과 안기부와 보안사의 힘이 약화되자 검찰이 체제 수호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고영주는 대한민국이 검찰공화국이 되고, 검찰 내에서 공안부의 위상이 막강하던 시절 공안의 황태자라고 불리는 대검 공안기획관을 지냈다.

이 무렵, 고영주는 공안 내부에서 최고의 기획통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초임 공안검사 시절에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그는 영화 <변호인>의 모델이 된 부림사건의 검사였으며, 1982년 3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서도 담당 검사였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 당시 아직 미성년자였던 의예과 학생으로 고영주에게 취조를 당한 ‘가슴 따뜻한 달동네 의사’ 최충언은 고영주에게서 ‘참 무식하다’는 느낌을 받았다면서 “그가 좋아하는 단어는 공산주의였다. 북유럽식의 사회민주주의를 말해도 민주주의는 빼고 사회주의란다. 그래서 사회주의는 공산주의와 다름없다는 논리였다. 19살인 내가 느낀 바로는 요샛말로 하면 ‘완전 초딩 수준’이었다”고 회고했다. 공안검사 고영주는 스스로 부림사건 피의자들로부터 “‘생산력’과 ‘생산관계’니 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사회과학 용어도 처음 들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처음 공안검사를 시작했을 때는 미성년자였던 어린 대학생 피의자로부터 검사가 저렇게 무식할 수 있는가 소리를 들었던 고영주였지만, 경기고 출신의 자존심 강한 엘리트답게 학습능력은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단 학습능력과 사고방식의 과감한 단순성은 별개의 것이다.) 1985년 11월 대학생들이 민정당 중앙정치연수원을 점거했을 때 검찰은 관련 학생 191명을 모두 구속했다. 과거에는 적극 가담자와 단순 가담자를 선별하여 적극 가담자는 구속하고 단순 가담자는 즉심에 넘기는 것이 관례였는데, 김원치·고영주 등이 ‘공모 공동정범’ 이론을 제시하며 전원 구속의 강경방침을 주도했다고 한다. 1988년 13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면이 형성되면서 야당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때 고영주는 ‘북한 형법’이라는 신무기를 개발해 북한 형법이 있는 한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만들어낸 것으로 검찰 내에서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후 고영주는 야당이 국가보안법의 대체 법안으로 ‘민주질서보호법안’을 제출했을 때도 국회 토론회에 나가 이 법안은 “도저히 안보형사법으로서의 기능을 기대할 수 없는 부실한 내용”이라며 국가보안법 폐지 절대 불가의 입장을 고수하여 야당과 대립했다고 한다.

부림사건과 관련하여 고영주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부림사건 피의자 중에 한 사람인 이상록이 “지금은 우리가 검사님한테 조사받고 있지만 공산주의 사회가 오면 우리가 검사님을 심판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상록이 계속하여 “검사와 변호사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전파하려고 했던 사람들인데, 이것이 고문을 받고 겁에 질린 사람이 할 수 있는 행동이겠습니까? 너무나 당당하고, 자신감에 넘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도저히 고문을 받았거나, 강압적 경찰 조사에 주눅이 든 피의자라고 상상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부림사건’ 핵심 고호석의 증언

부림사건의 핵심인 고호석은 고영주가 “당사자가 죽었다고 멋대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고영주는 처음에 부림사건 피의자가 공산주의 세상이 오면 검사가 심판받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주장할 때는 그런 발언을 한 인물을 특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부림사건 관련자들이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냐고 반발하자 2006년 세상을 떠난 이상록이 그랬다고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고호석은 고영주가 “고인이 돌아가신 것을 악용해서 마치 사실인 것처럼 얘기하고 있다”고 그의 비열함을 규탄했다. 고영주는 대법원에서 부림사건 재심 무죄가 확정된 뒤에도 여전히 “부림사건은 공산주의 운동이며 오늘날 종북세력의 뿌리”라면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사법부가 좌경화된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공안검사들이 피의자를 직접 구타했다는 증언이 아주 드물게 나오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고 고영주에게는 이런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영주가 고문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절절한 호소를 묵살했다는 증언은 여기저기 나온다. 부림사건에서의 고문이 문제가 되자 고영주는 “나중에 재판 과정에서 고문당했다는 말들이 나왔지만 수사중엔 고문당했다는 얘기를 단 한번도 꺼낸 적이 없다”고 주장한 바 있다. 고영주가 ‘공산주의자였지만 전향했다’고 칭한 김문수는 1986년 5월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사건으로 보안사에 끌려가 죽도록 고문을 당했다. 그는 “전기고문, 고춧가루 물 고문, 전기봉 고문과 심한 구타로 수사를 받는 동안 앉지도 못하고 소변도 못 볼 지경으로 전신이 망가져 검찰에 송치된 뒤 고영주, 정진규 검사에게 고문 흔적을 보여주며 이를 호소했으나 무시당했고 3차례에 걸친 고문 흔적 증거보전 신청도 서울형사지법과 대법원에 의해 모두 기각당했다”고 밝혔다.

검사를 평가할 때 다른 무엇보다도 수사능력이 중요하다. 과연 고영주는 뛰어난 수사검사였을까. 고영주가 처리한 사건 중 꼭 기억해야 할 일로 1986년 이돈명 변호사를 구속하여 8개월간 징역을 살린 일이 있다. 당시 수배중이던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이부영을 숨겨준 혐의로 구속된 것인데, 실제로 이부영을 숨겨준 것은 나중에 국가정보원장이 된 고영구 변호사였다. 고영구 변호사의 부인이 당시 건강이 안 좋았는데 이돈명 변호사는 후배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자신이 이부영을 숨겨주었다고 나서서 옥고를 치른 것이다. 이 사건은 고영주의 구형 논고문이 <월간조선>에 실릴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고영주는 자신의 수사능력에 자부심을 갖고 있겠지만, 복잡하지 않은 사실관계를 밝혀내지도 못하고 환갑이 훨씬 넘은 원로 변호사를 구속하였으니 수사 면에서나 도덕 면에서나 씻을 수 없는 잘못을 범한 것이다.

수사검사 고영주의 자질을 의심하게 만드는 사건으로는 ‘포르말린 통조림’ 사건을 들 수 있다.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검찰 내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공안검사들이 ‘구공안’으로 몰리면서 인권을 중시하는 ‘신공안’이 득세하게 된 것이다. 이때 고영주는 본인의 소망과는 달리 서울지검 형사 2부장으로 전보되었다. 공안검사는 언론의 주목을 받는 데 익숙해 있다. 갑자기 조명이 사라지는 것, 주목을 받지 못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안사건이라는 것이 부림사건의 예에서 보듯이 친구들과 선후배들이 책방에서 파는 <역사란 무엇인가> 같은 정평있는 고전이나 사회과학 서적을 읽은 것을 무리하게 엮어서 공산주의 서클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형사사건도 이렇게 만들었다. 고영주가 서울지검 형사 2부장으로 있으면서 각광을 받은 사건이 바로 유명한 포르말린 통조림 사건이다.

1998년 7월, 형사 2부장으로 간 지 약 100일 만에 고영주는 “통조림이 부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체에 치명적인 유독성 방부제 포르말린을 사용해 골뱅이 등 통조림을 만들어 팔아온 혐의”로 업자 여러 명을 구속 또는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당연히 “먹는 것 갖고 장난치는 건 용서할 수 없다”는 여론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통조림에서 검출된 것은 포르말린이 아니라 포르말린의 원료 포름알데히드였다. 포름알데히드는 자연 상태에서 생길 수도 있고 식품으로 섭취할 경우 인체에 무해한 것이었다.

김대중 정부 이후 ‘신공안’ 득세
그는 서울지검 형사2부장으로 전보
주목받지 못하는 걸 못 견뎠을까
그가 수사한 ‘포르말린 통조림’은
터무니없는 가짜 사건으로 드러나
한총련을 베었던 그 칼로
전교조를 찌르고 통진당을 베고
공영방송과 세월호를 겨누고
‘종북인사’ 이름 새기라 하는
아스팔트 위의 ‘공안 칼잡이’

포르말린 통조림, 형사사건도 공안사건처럼

그러나 검찰이 발표한 수사 결과가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통조림 생산업체들은 치명적 타격을 입고 줄줄이 도산했다. “검찰에서도 그것을 우리가 안 넣었다는 것을 자기네가 알면서도 기소를 했다”고 분통을 터트렸던 업자들은 2년여의 지루한 법정 투쟁 끝에 대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회사는 이미 망한 뒤였다. 고영주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기소한 포르말린 통조림 사건의 피고인들이 무죄를 선고받고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내자 “국가 측이 패소할 경우 담당검사가 구상금을 청구당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공안세력에게 너무나 관대하여 고영주에게 국가가 입은 손실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한 사건으로는 1989년 11월의 공업용 우지(소 기름) 라면 사건과 2004년 6월의 쓰레기 만두 사건을 들 수 있다. 모두 세상을 뒤흔들고 업체가 망하거나 시장 판도가 확 바뀌는 소동이 벌어졌지만 법원에서는 무죄가 나왔다. 이 중 공업용 우지 라면 사건은 고영주의 선배 공안통인 김기춘이 검찰총장으로 있을 때 야심차게 추진한 작품이었다.

공안검사 고영주의 전성기는 김영삼 정권 후반기에 대검 공안기획관을 지낼 때였을 것이다. 이때의 대검 공안부장은 최병국, 부림사건의 콤비가 공안의 사령관과 참모장이 된 것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면서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반란과 광주학살의 주역들에게는 면죄부를 주려 한 검찰은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96년 8월 이른바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사태 당시 대학생을 5715명 연행한 것이다. 고영주는 1997년 6월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한총련을 탈퇴하지 않을 경우 학생회 간부들을 구속하겠다고 겁박하여 한총련을 와해시킨 일등공신으로 꼽혔다. 이때 고영주는 ‘(가칭) 범죄단체 등 해산에 관한 법률’을 추진했는데, 위헌성이 다분한 이 법은 입법화되지는 않았지만, 수구세력은 이 법의 제정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고영주는 199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는 공안검찰이 외국어대 이장희 교수가 초등학생 등의 글을 모아 펴낸 <나는야, 통일 1세대>라는 책자를 문제삼아 구속영장을 청구하거나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유홍준 교수나 납북시인 정지용, 김기림 등의 글을 문제삼는 교과서 검열을 시도한 데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교육계와 학계는 당연히 공안검찰의 이런 시대착오적인 행태에 대해 “한마디로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려는 처사”라고 크게 반발했다.

김대중 정권 출범 후 구공안의 대표 격인 고영주는 공안에서는 밀려났지만 서울지검 1차장검사, 서울지검 서부지청장, 동부지청장 등 요직을 지냈다. 사시 18회 동기 중 첫번째 검사장 승진을 전 동국대 총장 김희옥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다음 인사인 2002년 8월 검사장으로 승진하여 광주고검 차장검사로 나갔다. 고영주는 1986년 11월 당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 대변인이었던 한광옥 청와대 비서실장을 구속한 적이 있었음에도, 김대중 정권 시절 큰 불이익을 받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고영주는 자신이 “김대중 정부 때 나는 ‘제거 대상 검사 10걸’ 가운데 1명이었다. 날 내보내려고 비리나 인권침해 사례 등을 찾았는데 그런 게 없으니까 결국 좌천으로 끝났다”고 주장한다.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젊은 여성 변호사 강금실이 법무장관이 되면서 검사장급 15명이 옷을 벗었다고 하나, 고영주는 살아남았다. 그는 2003년 8월 청주지검장이 되었고, 9개월 만에 대검 감찰부장으로 전보되었다. 1년 뒤인 2005년 4월 그는 지검장 중에서 요직으로 꼽히는 서울 남부지검장이 되었다.

전교조·사학 분야에서 ‘혁혁한’ 전과

그러나 그는 2006년 2월 고검장 인사에서 자신의 승진이 좌절되자 “지금 공산주의 사회가 된 것도 아닌데 내가 심판을 받고 있다”, “공안딱지가 붙어 있는데 더 남아 뭘 하겠느냐”며 ‘더럽다’고 옷을 벗었다. 이때 인사권자인 법무장관은 고영주보다 나이가 다섯살 아래인, 사법시험 동기 천정배였다. 고영주는 전두환 정권 밑에서 공안검사가 되어 체제 유지의 첨병으로 활동했지만, 공군 법무관 복무를 마친 천정배는 학살자 전두환 이름으로 된 임명장을 받을 수 없다며 판검사의 길을 포기하고 변호사로 취업한 바 있다. 천정배는 고영주가 부림사건의 악연 때문에 고검장 승진에서 탈락했다는 주장에 대해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고영주는 이때 <조선일보>에 “공안검사를 적대시하는 정권”이라는 글을 기고했다.

입장과 처지는 다르지만 고영주는 참 부지런하고 스스로 일을 찾고 만드는 사람이다. 그는 검찰 신분증만 반납했지, 여전히 공안검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때는 그래도 지휘체계 안에 있고 또 법이라는 것을 형식적으로라도 지켜야 했던 공안검사였지만, 이제는 아무런 거칠 것이 없이 칼을 휘두르는 공안검사(劍士)가 되었다. 한총련을 베었던 그 칼로 전교조를 찌르고 통합진보당을 베고 사립학교, 공영방송, 세월호를 겨누고 ‘종북인사’의 이름을 새길 것을 다짐했다.

고영주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가 한창일 때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이 되면서 자칭 ‘애국보수’의 전면에 등장했다. 이 위원회는 친북반국가행위자 인명사전의 편찬을 제안하였는데, 2009년 11월 1차로 수록 대상 친북 반국가 인사 100명의 명단을 발표했다.(필자도 그중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이때 일부 보수단체 회원들이 김대중과 노무현의 이름이 빠졌다며 빨갱이 감별사 고영주를 빨갱이, 간첩, 공산주의자로 모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 감별사들이 마녀사냥을 당하는 일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공안검사로 있을 때나 옷을 벗은 뒤에나 고영주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이 전교조였다. 고영주는 보수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989년 청와대에서 열린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한 발언을 정리하여 쓴 ‘전교조가 표방하는 ‘참교육’의 실체’라는 글을 정리하여 청와대와 대검이 팸플릿으로 만들어 전국 학교와 언론사에 배포했는데, 이 글 덕분에 전교조의 조합원 90%가 탈퇴했다고까지 자랑하고 있다. 그는 2008년 전교조를 퇴출시키는 것을 목표로 결성된 반국가교육척결국민연합을 대표하여 ‘이적단체’ 전교조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하는 고발장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런 행보는 2013년 전교조를 박근혜 정권이 법외노조로 만드는 과정에서 중요한 디딤돌이 되었다.

‘애국전사’ 고영주가 교육 분야에서 거둔 또 하나의 업적으로는 사학분쟁조정위원회(사분위) 위원으로 활동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은 서울시교육감에 진보 후보로 출마했던 주경복 위원이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는 이유로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위원직에서 해촉하고 고영주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고영주는 “지금까지 사분위가 사학이 좌파에게 넘어가도록 도운 측면이 있었다. 사학이 좌파들에게 넘어가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고 발언했고 이를 실천했다. 수구인사들이 장악한 사분위는 조선대와 세종대, 상지대, 광운대, 동덕여대 등에 비리재단 쪽 추천 인사들을 연이어 정이사로 선임했다. 그 불행의 정점은 사학비리의 원조라 불리는 김문기가 상지대 총장으로 복귀한 것이다.

고영주가 임기 2년의 사분위원으로 있던 기간(2009~2011년) 처리한 사건에 김포대학 분규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고영주와 그가 소속된 로펌 케이시엘(KCL)이 이 소송을 맡았다. 이 사례는 검찰이 과거사위원회에서 취급했던 사건을 수임했다는 이유로 민변 변호사 여럿에 대해 수사를 시작하면서 심각한 형평성 문제를 야기했다. <한겨레21>에서 이 문제를 보도하자, 고영주는 명예훼손 혐의로 담당 기자를 검찰에 고발했다.

왜 하필 세월호 조사위원으로 앉혔나

고영주가 스토커처럼 달라붙은 또 하나의 조직은 통합진보당이었다. 이른바 애국진영 내에서는 고영주가 통합진보당 해산의 숨은 주역으로 꼽히고 있다. 법무장관 황교안이 정부를 대표하여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청원서의 대부분이 고영주가 작성한 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고영주는 이 작업을 통합진보당이 만들어지기 전,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준비했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해산의 공로는 모두 황교안이 차지하여 총리까지 되었으니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중국 사람이 가져간 꼴이 되었다.

고영주는 2014년 12월말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에 새누리당 추천으로 위원이 되었다. 그런데 고영주는 문화방송(MBC)이 전원구조 오보를 낸 것을 옹호하고, 정부 쪽이 무슨 잘못을 했느냐고 비호하고, 유가족들을 “떼쓰는 사람들”이라고 비하하고, 또 이미 검찰과 언론에서 밝혀낸 것이 많기 때문에 “별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없는 것 같다”고까지 말한 바 있다. 이런 사람에게서 어찌 제대로 된 진상조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더 중요한 것은 왜 하필 고영주를 세월호 조사위원으로 앉혔느냐는 점이다. 박근혜 정권에는 세월호의 진상규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진상을 인양하는 작업을 막아 나설 검투사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영주는 2012년 7월 방송문화진흥회 감사가 되었고, 3년 뒤인 올해 8월 이사에 선임되어 이사장이 되었다. 한국방송(KBS) 이사장은 한때 러시아혁명사를 전공한 진보 지식인으로 분류되다가 할아버지의 친일 문제 거론 이후 극우로 변신한 이인호이니, 한국방송과 문화방송 두 공영방송이 모두 극우 인사에게 장악당한 것이다. 고영주가 방문진 이사장이 되자 문화방송은 철지난 박원순 시장 아들의 병역비리 문제를 들고나왔다. 이 문제와 대통령선거 직후인 2013년 1월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는 발언이 알려지면서 국정감사장에 불려나왔고, 거기서 또다시 ‘확신범’의 면모를 과시한 것이다.

국가정상화추진위원장 고영주는 대한민국의 정상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자신의 발언과 행위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정상화를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가 빨간 색안경을 쓴 채 아무나 공산주의자라고 떠들어대는 저런 공안세력을 해체하는 일이다. 저들이야말로 과거에는 내란과 학살과 고문조작으로, 현재에는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파괴하는 반헌법행위자들이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변호인>의 실제 검사가 전교조와 통합진보당을 아웃시키고, 세월호의 진실 인양을 가로막고, 공영방송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목 조르면서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이라는 정치공동체를 정식으로 출발시키면서 국민들과 맺은 계약서 원본인 제헌헌법에 나타난 대한민국은 정의가 살아있고, 평등이 실현되는 나라였다. 고영주에게 대한민국 제헌헌법과 현행헌법을 꼼꼼히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다. 그런 나라를 불의와 불평등이 판치는 헬조선으로 이끈 자들이 과연 누구일까. 친일세력과 그를 이어받은 공안세력이다. 2015년 10월12일,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가 정식으로 출범한다. 친북반국가행위자 인명사전 편찬위원장 고영주의 반헌법 행위부터 기록해야 할 모양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 시민편찬위원 참여 연락처 badmen0815@gmail.com, 후원계좌: 국민은행 006001-04-198120 ㈔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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