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국민車로 출발.. 람보르기니-벤틀리 등 인수 '포식자'로

입력 2015. 10. 10. 03:04 수정 2015. 10. 10. 0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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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크스바겐 '제국의 몰락']폴크스바겐 부침의 역사
[동아일보]
미국 경제주간지 포브스가 지난해 5월 발표한 ‘글로벌 2000대 기업’ 가운데 독일 폴크스바겐그룹은 19위였다. 자동차회사 중엔 도요타에 이은 2위, 전체 독일 기업 중엔 1위였다. 폴크스바겐(Volkswagen)이 ‘국민의(volks) 차(wagen)’를 의미하듯 폴크스바겐은 독일인들에게 ‘기술의 독일’을 표상하는 자존심 같은 존재였다. 1937년 설립된 폴크스바겐그룹은 12개 브랜드를 거느리며 올해 상반기(1∼6월) 도요타를 제치고 판매량 세계 1위에 올랐다.

현재 폴크스바겐그룹이 보유한 브랜드는 △최고급 고성능차 람보르기니, 부가티, 벤틀리 △고급차 포르셰, 아우디 △대중차 폴크스바겐 △저가차 세아트, 슈코다 △상용차 폴크스바겐 상용차, 만, 스카니아 △모터사이클 두카티 등이다.

폴크스바겐의 시작은 국민차 ‘비틀’

아돌프 히틀러는 1934년 독일 총통에 오른 뒤 ‘누구나 탈 수 있는 차’를 개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성인 2명과 아동 3명을 태우고 시속 100km로 달릴 수 있어야 하며 가격은 1000마르크를 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근로자 평균 주급은 32마르크였다.

다임러, 벤츠 등에서 명성을 날리던 자동차 개발자이자 포르셰 창업자 페르디난트 포르셰는 히틀러를 만나 개발 의지를 밝혔다. 결국 그해 990마르크짜리 ‘KdF바겐’이 탄생했다. KdF는 ‘즐거움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이라는 의미였다. 1938년 시제품이 도로를 달릴 때 대중들은 이 차를 ‘비틀’이라고 불렀다.

피에히가(家)와 포르셰가의 지분 경쟁

포르셰 박사의 아들인 페리 포르셰는 1948년 포르셰 브랜드를 단 최초의 스포츠카 ‘포르셰 356’ 모델을 제작했다. 356은 ‘포르셰 911’의 전신이다. 그러나 페리 포르셰와 그의 누나인 루이제 포르셰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루이제의 아들 페르디난트 피에히와 페리의 아들 페터 포르셰는 포르셰에서 개발자로 일했지만 사사건건 의견이 부딪쳤다. 양측은 포르셰 후계자 선임 문제로 극심하게 대립하다 1972년 경영 일선에서 모두 물러나기로 했다.

이 여파로 포르셰를 나온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아우디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아우디의 4륜구동 기술인 ‘콰트로’ 개발을 이끌었다. 1988년 아우디 회장이 된 뒤 1990년 그룹 내 최초로 터보직분사엔진(TDI)을 ‘아우디 100 2.5’에 탑재했다. 엔진 연소실에 고압으로 압축된 연료를 직접 분사해 출력과 연료소비효율(연비)을 높이는 기술이었다. 1993년 폴크스바겐 회장에 취임해 올해 4월 물러나기까지 최고경영자(CEO)만 9년, 이사회 의장만 12년을 하며 ‘황제’로 군림했다.

2000년대 들어선 포르셰와 폴크스바겐이 한 둥지를 틀었다. 포르셰 지주회사인 포르셰SE는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폴크스바겐 지분을 50.76%까지 늘렸다. 그러나 지분 취득 과정에 과도한 부채를 끌어들인 데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포르셰는 위기에 처했다. 이때 피에히는 포르셰 사업회사인 포르셰AG 지분을 2012년 100% 인수해 버렸다.

표면적으로는 포르셰가 폴크스바겐을 적대적 인수합병(M&A)하려다 오히려 먹힌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속내를 보면 ‘포르셰SE→폴크스바겐→포르셰AG’의 지배구조가 만들어졌다.

1990년대 적자 이겨내고 부가티, 벤틀리 인수

폴크스바겐은 1969년 아우디의 전신 아우토유니온을 인수하고 1974년 ‘골프’ 생산으로 성장가도를 달렸다. 1985년엔 수입차 최초로 중국에 진출해 상하이(上海)폴크스바겐을 설립했다. 1986년엔 스페인 세아트, 1990년엔 체코 슈코다를 인수하며 유럽 최대 자동차회사가 됐다.

그러나 1991년 폴크스바겐은 7억7000만 마르크 적자를 냈다. 1995년 독일 내 직원 수는 적정 인력보다 30%(3만1000명) 초과된 상태였다. 임금은 포드, 오펠보다 20% 높았다. 폴크스바겐은 근무시간을 주 36시간에서 28.8시간으로 줄이는 방식으로 인건비를 줄였다. 또 여러 차종이 플랫폼을 공유하도록 해 원가를 줄였다.

위기를 이겨낸 폴크스바겐그룹은 1998년 부가티와 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와 그 자회사 벤틀리를 인수하며 한 단계 도약했다. 벤틀리는 1924∼1927년 ‘르망 24시간 레이스’에서 4연속 우승을 차지할 정도로 스포츠카로 명성을 떨쳤던 브랜드였다. 폴크스바겐은 1996년 파산한 부가티를 인수한 뒤 ‘베이론’의 첫 차 ‘EB 18/4 베이론’을 내놓았다. 람보르기니 인수 후 내놓은 첫 차는 ‘아벤타도르’의 전신 ‘무르시엘라고’였다.

2000년엔 독일 볼프스부르크 본사와 공장 옆에 12개 브랜드 전시관과 호텔, 자연 시설, 공연장 등을 한데 모은 자동차 테마파크 ‘아우토슈타트’를 개장하며 브랜드 경영에 나섰다.

폴크스바겐그룹은 최근까지만 해도 ‘클린 디젤’ 전략으로 승승장구했다. 8월 기준 유럽연합(EU)에서 그룹 점유율은 25.1%로 1위였다. 세계 최대 자동차시장 중국에서도 17.5%로 1위였다. 미국에서만 3.5%(9월)로 부진했다. 그러나 이번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스캔들로 성장가도를 달리던 폴크스바겐은 시계제로 상태에 빠졌다.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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