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노벨상 '전성기' 일본, 자긍심·미래 불안 교차
'종이와 연필' 이론물리학 중심으로 전개하다 실험물리학까지
경기 침체 속 연구환경 불안정 중국에 논문 실적 추월당해 위기감
(도쿄=연합뉴스) 이세원 특파원 = 일본 과학계가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과 물리학상 수상자를 한꺼번에 배출하면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특히 일본이 두각을 나타낸 소립자론은 초기에는 비용이 적게 드는 이론 물리학이 발전했고 실험물리학은 한동안 정체돼 있었으나 투자가 뒷받침되면서 성과를 내고 있다.
이에 일본에서는 노벨상의 성과를 자랑스러워 하는 분위기가 역력하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과거에 뿌린 씨앗이 지금 열매를 맺고 있을 뿐 미래에도 일본이 기초과학 분야에서 선도적인 역할을 계속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 이론 물리학에 이어 실험 물리학도 성과
이번에 가지타 다카아키(梶田隆章·56) 일본 도쿄(東京)대 우주선(線)연구소장이 노벨상에 선정됨으로써 일본은 소립자 연구에서 노벨상 수상자 7명을 기록했다.
일본은 소립자 연구에서 이론 물리학을 중심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중간자의 존재를 예상해 1949년 일본인으로서는 첫 노벨상을 받은 유카와 히데키(湯川秀樹·1907∼1981)가 소립자론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
이후 일본의 소립자론은 이론 물리학을 중심으로 발전했고 독일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밑에서 수학한 도모나가 신이치로(朝永振一郞·1906∼1979)가 양자역학의 재규격화 이론(renormalization theory)으로 1965년에 노벨상을 받았다.
소립자론에서 이론 물리학으로 노벨상을 받은 이들은 2008년에 상을 탄 고바야시 마코토(小林誠·71) 마쓰카와 도시히데(益川敏英·75), 난부 요이치로(南部陽一郞, 1921∼2015, 미국 국적 취득)까지 5명이다.
당시 아사히(朝日)신문은 '종이와 연필로 시작한 연구가 한꺼번에 꽃을 피웠다'고 이론 물리학의 성과를 평가했다.
이에 반해 실험 물리학은 패전 직후 어려움을 겪었다.
대형 관측 장치를 설치하거나 가속기를 사용해 이론을 검증해야 하나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아사히(朝日)신문에 따르면 패전 직후 미군 점령과 함께 원자폭탄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이유로 이화학연구소에 있던 입자가속기 '사이클로트론'이 폐기됐다.
그러다가 일본은 1970년대에 이바라키(茨城)현에 세계 유수의 대형 가속기를 설치하면서 실험 물리학에서 속도를 낼 수 있게 됐다.
이후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89) 도쿄대 특별영예교수가 2002년 노벨상을 받은 것에 이어 제자인 가지타 소장이 뉴트리노(중성미자) 연구에서 노벨상 수상자가 돼 이론과 실험 양축이 모두 공고하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다.
◇ 국가의 과감한 투자가 성과로 이어져
일본이 과학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것은 연구자들이 특유의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연구에 임한 결과임은 두말할 것도 없지만, 여기에는 국가의 과감한 투자가 뒷받침됐다.
특히 가지타 소장이 이번에 노벨 물리학상을 받으면서 일본이 초대형 관측 설비인 '슈퍼 가미오칸데'를 건설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확인됐다.
산케이(産經)신문은 아리마 아키토(有馬朗人·85) 전 도쿄대 총장이 정치인들에게 기초과학연구의 중요성을 호소하며 발벗고 뛴 사연을 9일 전했다.
아리마 전 총장은 슈퍼 가미오칸데 건설비를 마련하기 위해 "이 장치가 만들어지면 노벨상을 2번 정도 받을 수 있다"고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현재 부총리 겸 재무상)를 설득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수십억 엔의 예산이 투입됐다.
아리마 씨의 약속은 고시바 마사토시(小柴昌俊·89) 도쿄대 특별 영예교수(2002년 수상)와 가지타 소장이 뉴트리노(중성미자) 연구로 노벨상을 받으면서 실현됐다.
슈퍼 가미오칸데는 기초과학 발전에서 정부 투자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일본 정부는 2001년에는 '향후 50년간 노벨상 수상자 30명 정도를 배출한다'는 목표를 세웠는데 벌써 목표의 반을 달성했다.
올해 선정된 수상자를 포함해 일본의 역대 노벨상 수상자는 24명(미국 국적 취득자 2명 포함)이고 이 가운데 21명이 과학 분야에서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2001년 이후 과학분야 수상자가 15명으로, 같은 분야에서 50명 넘는 수상자를 배출한 미국에 이어 일본이 2위인 셈이다.
일본 문부과학성의 노벨상 목표 책정에 관여한 아리모토 다테오(有本建男·67) 일본 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는 "일본은 20∼30년 전부터 다양한 분야 수만 건에 연구 자금을 원조해 시야를 넓혔으며 연구자를 육성해 왔다. 그 성과"라고 산케이신문과 인터뷰에서 밝혔다.
아리모토 교수는 이런 노력의 결과 일본에는 노벨상급 성과를 올리는 연구자가 상을 받은 이들 외에도 수십 명 있다고 자부했다.
◇ 지금 노벨상은 과거 노력의 산물…"미래가 불안하다"
한국의 처지에서 보면 일본은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앞서 가고 있으나, 내부에서는 미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근래에 일본이 받은 노벨상 수상 실적 등은 과거부터 이어진 투자의 성과이며 현 상황을 보면 미래에도 이런 흐름이 이어질 것으로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 학자들이 안정적인 자리를 얻지 못해서 연구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것이 문제로 지적된다.
과거에는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온 이들이 일본으로 돌아와 연구를 이끌었지만, 경기 침체가 장기화하는 가운데 젊은이들이 유학을 주저하고 있으며 과거처럼 적극적인 연구비 지원을 기대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연구 실적 변화에서도 위기감이 엿보인다.
일본의 논문 수는 1990년대에 계속 증가해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었으나, 21세기에 들어 제자리걸음을 하다 현재는 5위 수준이라고 산케이는 전했다.
반면 1990년대에 논문 실적이 일본의 절반에 미치지 못했던 중국은 2006년에 일본을 따라잡고 놀라운 속도로 연구 실적을 내놓고 있다.
시라베 마사시(調麻佐志) 도쿄공업대 준교수(과학기술사회론)는 "앞으로 10년 정도 있으면 중국으로 노벨상이 몰리는 현상이 당연히 생긴다. 정체된 일본은 힘들다"고 말했다.
가지타 소장은 8일 보도된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닛케이)과 인터뷰에서 "젊은 연구자들이 박사학위를 받고 나서 종신 고용되는 자리에 취직할 때까지의 길이 너무 험난하다"며 "장기적 안목으로 보면 일본의 연구력을 확실하게 깎아 먹고 있다"고 상황을 진단했다.
sewon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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