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이 미쳤어요

2015. 10. 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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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미친 국어사전
: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비판
박일환 지음/뿌리와이파리·1만2000원

기사를 작성하는 노트북 컴퓨터에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즐겨찾기로 설정해 놓았다. 말뜻이 아리송하거나 표기가 헷갈릴 때마다 사전에 물어본다. 예문이 적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잘못을 줄이고 그나마 읽을 만한 글을 쓰는 데에 적잖은 도움을 받아 왔다.

그러나 사전에 대한 지금의 믿음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졌다. 책 한 권 때문이다. <미친 국어사전: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 비판>이 그 책이다. 제목이 사뭇 자극적이지만, 책을 읽어 보면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이해가 갈 법도 하다.

569돌 한글날에 돌아보는
표준국어대사전의 현주소
배추 설명에 김치가 빠져서야
우리말보다 한자, 외래어 우대
청나라 용어는 왜 그리 많은지
전문가 중심주의에 실생활 무시
10년, 20년 내다보고 다시 만들어야
편찬자들 소명의식 강조

지은이는 시인이자 국어 교사인 박일환(54·서울 영남중). 그가 불과 두 달 만에 초고를 썼다는 이 책에서 만나는 <표준국어대사전>은 아무리 보아도 정상이 아니다. ‘낱말’을 찾으면 ‘단어’(單語)라는 한자어 항목으로 가라는 국어사전, ‘현상액’ 뜻을 “현상액과 아황산소다, 탄산소다 따위를 혼합한 수용액”으로 풀어 놓은 사전, ‘아귀찜’은 있는데 ‘아귀탕’은 없고 ‘해물탕’은 있는데 ‘해물찜’은 없으며 ‘중산간도로’는 있는데 ‘중산간’은 없고 ‘희곡집’ ‘동화집’ ‘수필집’은 있는데 ‘소설집’ ‘동시집’ ‘산문집’은 없는 사전, 필리프(프랑스 배우)·콜먼(미국 배우)·야닝스(독일 배우)·윌리엄스(미국 작곡가)·멜바(오스트레일리아 오페라 가수)·미스탱게트(프랑스 가수) 같은 낯선 외국 대중 예술가들은 대접하면서 이난영·남인수·서영춘·박노식·허장강·백년설 같은 한국 대중 예술가들은 외면하는 사전, 프네우마·프라디오마이신·프라세오디뮴·로브몽탕트·가네팅·클리페 같은 외래어(외국어?!)는 잔뜩 올려놓고 아우라·미메시스·파놉티콘·클리셰·시뮬라크르처럼 인문·사회과학과 예술 분야에서 자주 쓰는 개념어들은 쏙 빼놓은 사전, ‘갈가마귀’를 “‘갈까마귀’의 방언”이라 풀어 놓고 정작 ‘만아’(晩鴉)를 설명하면서는 “해가 저물 때 날아가는 갈가마귀”라 능청 떠는 사전을 정상이라 할 수 있겠는지. 지은이의 개탄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겠는가.

“국립기관에서 펴낸 국어사전이라면 당연히 그 나라의 언어 정책과 연구 성과가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어야 하는데, 오히려 <표준국어대사전>이 그런 성과를 갉아먹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지은이는 전에도 <우리말 유래사전> <미주알고주알 우리말 속담> <국어선생님 잠든 우리말을 깨우다> 같은 우리말 책을 몇 권 낸 바 있다. 그런 책들을 쓰느라 사전 뒤질 일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사전이 지닌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왔으며, 그중에서도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는 생각에서 이 책을 쓰게 되었노라고 밝혔다. 이번 책에서 지은이는 <표준국어대사전>과 <다음한국어사전>의 뜻풀이를 자주 비교하는데, 이런 식이다.

액세서리: 복장의 조화를 도모하는 장식품(표준), 몸치장을 하는 데 쓰는 여러 가지 물건(다음). 립싱크: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화면에 나오는 배우나 가수의 입술 움직임과 음성을 일치시키는 일(표준), ⑴무대 위의 가수가 미리 준비한 반주곡과 노래에 맞추어 입만 벙긋대는 일. ⑵텔레비전 드라마나 영화에서, 화면에 나오는 인물의 입술 움직임과 음성을 일치시키는 일(다음). 커미션: 국가나 공공 단체 또는 그 기관이 특정한 사람을 위하여 공적인 일을 하였을 때, 그 보상으로 받는 요금(표준), 공적 또는 사적 영역에서, 어떤 일을 맡아 처리해 주거나 거래 따위를 주선해 준 데 대한 대가로 받는 보수(다음). 어쩌다 보니 외래어들만 꼽았는데, 이런 몇 가지 사례만 보아도 <표준국어대사전>의 무성의와 무감각이 얼마나 심각한지 알 수 있지 않겠나.

<미친 국어사전>은 <표준국어대사전>의 문제를 아래와 같은 13개 장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한자어를 사랑하는 국어사전, 외래어를 사랑하는 국어사전, 이상한 뜻풀이, 사전에 없는 말, 신어(新語)의 문제, 차별과 편견을 부추기는 국어사전, 어설픈 백과사전 흉내 내기, 낱말 분류 항목에 대해, 방언의 문제, 순화어의 문제, 북한말의 문제, 용례와 출처에 대해, 그 밖의 문제들. 학문적 체계를 갖춘 지적은 아닐지 몰라도 피부에 와 닿는 구체적 예시는 이 책의 장점이다. 지은이는 특히 일상생활에서 동떨어진 ‘전문가 중심주의’를 맵차게 꼬집는다. 한자어와 외래어 사랑, 백과사전 흉내가 이 문제와 관련이 깊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설명이 무슨 식물에 대한 것인지 알 수 있는 이가 얼마나 될까.

“십자화과의 두해살이풀. 길이가 30~50㎝이며, 잎이 여러 겹으로 포개져 자라는데 가장자리가 물결 모양으로 속은 누런 흰색이고 겉은 녹색이다. 봄에 십자 모양의 노란 꽃이 총상(總狀) 화서로 핀다. 잎·줄기·뿌리를 모두 식용하며, 비타민이 풍부하게 함유되어 있다. 한국, 중국,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같은 식물에 대한 설명을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한 <보리 국어사전>에서는 이렇게 해 놓았다.

“밭에 심어 가꾸는 잎줄기채소. 둥글고 긴 잎이 뿌리부터 여러 겹 포개어 자라는데, 속잎은 누런 흰색이고 겉잎은 푸르다. 잎으로 김치를 담근다.”

정답은, 당연히, 배추다! 배추에 관해 설명하면서 밭과 김치 얘기를 빼놓아서는 곤란하지 않겠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서 가장 화가 나는 부분이 식물 이름에 대한 풀이들”이라고 지은이는 썼다. 왜 그럴까. 삭과, 대포자, 우상, 원추 화서, 장과, 선점, 자모, 가장과…. 한자를 곁들여 놓아도 도무지 요령부득인 이 말들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떠올릴 이가 몇이나 있을까. 식물학자들이 (아마도 일본의 영향 아래) 전문서적에 쓴 말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결과가 이런 기형적인 뜻풀이로 나타났다고 그는 본다.

경우는 다르지만, 청차염·십종곡·강두홍·교록 같은 청나라 관련 한자어, 승홍중독·리솔중독·바르비탈중독·보툴리누스중독 같은 갖은 중독 종류, 기동계획·동적계획·뱅가드계획·벨라계획·포인트포계획 등 온갖 계획 관련 용어들 역시 전문가 중심주의의 흔적이라는 게 지은이의 판단이다. 왜전골·갈낙전골·닭전골·고기전골은 있는데 김치전골·불낙전골·오리전골·해물전골은 없다는 사실은 전문가 중심주의의 이면이라 할, 실생활 경시의 반증이라 하겠다.

더 큰 문제는 <미친 국어사전>에서 지적한 문제들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명사가 아닌 낱말들과 한자 표기의 정확성, 발음, 속담, 관용구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접근해 보지도 못했다”고 지은이는 설명한다.

그렇다면 문제의 원인은 무엇이고 해결책은 어떠해야 할까.

“가장 큰 문제는 사전 편찬자들에게 우리말에 대한 사랑과 제대로 된 사전을 만들겠다는 소명의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10년, 20년을 내다보면서 완전히 새롭게 편찬한다는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지금이라도 <표준국어대사전> 개정·보완 팀을 꾸려서 어디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국어사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은 569돌 한글날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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