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발] 아씨와 머슴, 늑대와 양 / 박찬수

2015. 10. 8.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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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정치투쟁에서 이기려면 온화한 미소에 때론 무자비할 정도의 강인함을 지녀야 한다. 양의 탈을 쓴 늑대가 제격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딱 그런 경우다. 어머니를 닮아 얼굴은 포근하지만 한번 마음이 어긋난 사람에게 타협과 자비란 없다. 당대표 시절의 박 대통령을 기억하는 국회의원들은 그가 고개를 돌리고 침묵할 때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지경이었다고 말한다. 외모와 성향의 완벽한 부조화가 ‘박근혜 카리스마’를 극대화하는 원천이다.

반면에 김무성 대표는 기골이 장대하고 말투도 거친 상남자 스타일이다. 동료 의원들에게 ‘느그들’이라 말하고 기자들에게도 ‘야’ ‘니’라며 서슴없이 반말을 한다.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훨씬 여리다. 부잣집에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자란 성장 배경이 안하무인격의 태도를 심어줬지만, 모질지 않고 뒤끝이 없다. 늑대의 형상을 했으나 속은 양이다. 새누리당의 한 의원은 두 사람을 이렇게 비교했다.

“김 대표는 전날 밤에 아무리 싸워도 다음날 아침이면 금세 마음이 풀어져 미안해한다. 박 대통령은 다르다. 모래 한 알도 마음 한구석에 켜켜이 쌓아 안고 가는 사람이다. 이번 갈등이 김 대표에겐 총선 공천권의 문제겠지만, 박 대통령에겐 오래전부터 김 대표에게 가졌던 감정의 분출이란 측면이 클 것이다.”

두 사람은 2005년 야당 시절 박근혜 대표가 김무성 의원을 사무총장에 발탁하면서 정치적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스타일이 영 맞질 않았다. 김 대표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에서 정치를 시작했다. 군사독재와 싸운 경험을 지닌 상도동계나 동교동계는 계파라 해도 동지 의식이 강했다. 보스 앞에서도 절절매진 않았다.

그에 반해 박 대통령은 절대 권력의 청와대에서 자라난 ‘대통령의 딸’이었다. “박근혜 대표를 대할 때 ‘아씨와 머슴’이라고 생각하면 나도 마음이 편하고 박 대표도 편하게 받아들인다”는 친박계 전직 의원의 얘기는 상징적이다. 김 대표는 박 대통령 앞에서도 말을 가리지 않았다. 여기에 특유의 거칠고 투박한 말투가 더해졌으니, 생리적으로 김 대표를 좋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와중에 ‘가시내’ 발언이 터졌다고 한다. 2006년 무렵이다. 김 대표가 술자리에서 박 대통령을 ‘가시내’라고 불렀다는 얘기가 박 대통령 귀에 들어갔다. 당시 친박계에 속했던 인사는 “김 대표는 부산 사투리로 그냥 여성을 지칭했을지 몰라도 서울에서 자란 박 대통령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때 이미 두 사람 사이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라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해 7월 새누리당 대표로 뽑힌 뒤 여러 차례 박 대통령에게 무릎을 꿇었다. 개헌 발언 때도 그랬고, 유승민 원내대표가 쫓겨날 때도 그랬다. 지금 공천권 싸움에서도 김 대표는 한 걸음씩 물러서고 있다. 전략공천을 사실상 받아주겠다고 했지만, 그에 대한 청와대의 답은 “민경욱 대변인 외에 총선 출마자는 없다”는 것이다. 공천권 배분으로 타협하진 않겠다는 게 박 대통령 생각인 듯하다.

늑대와 양의 싸움의 결과는 자명하다. 다만 양이 무리를 지어 있을 때 늑대와 맞섰다면 상황은 좀 달라질 수 있다. 김 대표에겐 6월의 국회법 개정안 파문이 그런 기회였다. 박 대통령이 유승민 원내대표를 내쫓으려 하자 김 대표는 “대통령을 이길 수는 없다”고 받아들였다. 그때 의원총회에서 무기명투표로 원내대표 신임을 물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복수의 비박계 의원은 아쉬워했다. 이제 선거를 앞둔 양들은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지고 있다. 동화는 양이 절묘한 지혜로 위기를 벗어나거나 늑대와 양이 공존하는 모습을 그린다. 현실은 다르다. 대개는 훨씬 비극적으로 막을 내린다.

박찬수 논설위원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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