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자동차'의 배신에 망연자실

강성운│독일 통신원 . 2015. 10. 8.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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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태 바라보는 독일 국민들의 위기감.. 무너지는 '메이드 인 저머니' 자존심

세계 금융위기 여파가 한창이던 2009년 1월, 독일 연방의회는 법안 하나를 통과시켰다. 9년 이상 된 헌 차를 폐차시키고 배기가스를 덜 배출하는 새 차를 사면 국가가 지원금 2500유로를 준다는 ‘환경보조금법’이었다. 자동차산업을 지렛대 삼아 내수 경기를 부양하고 대기오염도 줄여보자는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이른바 ‘폐차 보조금’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지원금 지급이 시작된 2009년 상반기에만 개인 승용차 구매가 23%나 증가한 것이다. 보조금이 내수 활성화와 고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자 독일 의회는 두 달 만에 관련 예산을 50억 유로로 늘렸다. 이 돈이 자동차 시장에 풀리면서 2010년 7월31일까지 193만대의 차량이 폐차되었고, 157만대의 신차와 36만대의 신차급 중고차가 팔렸다. 독일경제수출관리청(BAFA)은 환경보조금 결산보고서에서 “독일이 지난 금융위기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데는 환경보조금의 역할도 컸다”고 평가했다.

↑9월25일 독일 볼프스부르크의 폭스바겐 공장 정문 앞에서 한 시민이 폭스바겐의 배기가스 조작에 항의하며 ‘더 이상 거짓말은 안 돼!’ 라고 적힌 포스터를 붙들고 서 있다. ⓒ AP연합

폭스바겐은 ‘독일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 보조금제도의 숨은 수혜자는 따로 있었다. 바로 독일의 ‘국민차’ 회사인 폭스바겐(Volkswagen, VW)사다. 이 기간 동안 폭스바겐사의 골프·제타가 25만대, 스코다(Skoda)의 파비아와 폭스바겐 폴로가 각각 9만대씩 팔려 판매량 톱3에 올랐는데, 스코다는 폭스바겐의 자회사다. 게다가 신차의 총판매량을 보면 폭스바겐 46만대, 스코다 15만대, 세아트 5만대 등 폭스바겐과 자회사가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42%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폐차 보조금은 ‘폭스바겐 살리기’였던 셈이 됐다.

이처럼 독일 국민들이 폭스바겐에 보낸 지지와 신뢰는 특별하다. 경제심리학자인 슈테판 그뤼네발트에 따르면, 독일인들에게 폭스바겐은 단순한 자동차 브랜드가 아닌 ‘독일 정체성의 상징’이다. 독일인들이 생각하기엔 폭스바겐이 ‘믿음직스러움’ ‘기술력’ ‘진보’ 등 전형적인 독일적 가치를 대변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민중의 차’라는 회사 이름의 뜻에서 엿보이듯 폭스바겐은 특정 사회 계층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전쟁 직후 거리를 누비던 ‘딱정벌레차’에 대한 독일인들의 향수는 1970년대에 생산된 국산차 포니에 대한 한국인의 그것과 비교할 만하다.

하지만 지난 9월19일 미국환경보호청(EPA)이 “폭스바겐이 디젤 차량에 대한 대기오염 검사를 통과하기 위해 배기가스 검출량을 조작했다”며 차량 50만여 대에 대한 리콜을 요구하면서 독일인들은 쓰라린 배신감을 맛보고 있다. ‘메이드 인 저머니’에 대한 독일인의 자부심에 큰 상처가 생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무려 1100만대의 차량에 불법 소프트웨어를 설치하고 내부 고발자의 경고를 묵살하는 등 배기가스 조작 사건이 의도적으로 행해졌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면서 폭스바겐의 도덕적 회생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지고 있다. 사건이 터진 후 독일의 시사주간지 슈피겔은 표지 사진으로 노란색 비틀(Beetle)의 장례식 장면을 싣고 ‘자살’이라는 제목을 달았을 정도다.

폭스바겐 사태로 독일산 제품 전체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갈 것이라고 염려하는 목소리도 들려온다. 마르셀 프라처 독일경제연구소 소장은 “그동안 폭스바겐은 ‘메이드 인 저머니’의 얼굴이었다”며 폭스바겐 추문(醜聞)이 다른 수출업체에도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했다. 독일의 진보 성향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도 온라인판에서 “이 기업의 미래가 독일 전체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폭스바겐 사태의 파급력을 진단했다.

폭스바겐은 지난 몇 년간 세계 자동차 시장 선두를 지키기 위해 연구·개발 분야에 아낌없는 투자를 해왔다. 하지만 이제 폭스바겐의 미래는 ‘전기자동차’가 아니라 이미 시작되고 있는 ‘줄소송’에 달려 있다. 가장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2007년부터 이 기업을 이끌어온 마르틴 빈터코른 전 최고경영자의 가담 여부다. 빈터코른은 지난 9월23일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임했지만, 자신은 배기가스 검출 조작 등 위법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독일 검찰은 9월28일 그의 사기 혐의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향후 벌어질 소송전에서 최대 관건은 ‘고의성’ 여부다. 빈터코른 전 회장이나 다른 책임자가 고의적으로 소비자와 기업, 정부기관을 속인 것으로 밝혀질 경우, 벌금과 배상금이 천문학적 규모로 높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EPA가 폭스바겐에 180억 달러(약 20조원)라는 사상 최대 규모의 벌금을 부과할 예정이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EPA의 벌금은 자동차의 기능 오류에 대한 벌금이지 고의적 조작이나 사기에 대한 벌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독일의 손해배상법 전문 변호사인 위르겐 헨네만은 ‘슈피겔 온라인’과의 인터뷰에서 “특히 미국 소비자들의 집단소송이 이어질 경우, 폭스바겐사의 운명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헨네만은 자동차 배기가스는 환경과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연비 조작보다 보상액이 훨씬 클 것으로 내다봤다.

금융 시장은 법정보다 먼저 판결을 내렸다. ‘쥐트도이체 차이퉁 온라인’ 보도에 따르면, 폭스바겐사의 시가총액이 220억 유로나 폭락한 이후 관련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은 75점에서 300점으로 급등했다. 투자자들이 폭스바겐의 파산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판단했다는 이야기다. 이 같은 불안 기류가 확산되면 폭스바겐의 회생은 더욱 어려워진다.

“분데스리가도 위기” 불안감 확산

폭스바겐 사태로 발생한 불안은 이미 진원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감지되고 있다. 폭스바겐 본사가 위치한 볼프스부르크 시(市)는 9월29일 세수 감소를 이유로 “추가 지출을 즉시 중단하고 신규 채용도 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인구 12만명 규모의 소도시 볼프스부르크에서는 모든 일자리가 폭스바겐과 관련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 기업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2014년 월드컵 우승 이후 세계 축구 최강자로 군림하는 독일 축구 역시 폭스바겐 사태로 인한 여파를 두려워하고 있다. 폭스바겐사는 도이체텔레콤, 아디다스 등과 함께 독일 프로축구 분데스리가의 최대 돈줄이기 때문이다. 이 기업이 소유하거나 후원하는 구단은 1·2부 리그를 통틀어 무려 16개에 이른다. 1부 리그 팀인 브라운슈바이크와 잉골슈타트의 유니폼에는 각각 폭스바겐 계열사인 세아트와 아우디의 로고가 박혀 있으며, 현재 4위를 기록 중인 볼프스부르크의 구단주는 폭스바겐사다. 축구팬들 사이에 불안감이 퍼지자 클라우스 알로프스 볼프스부르크 서기가 직접 나서 “경영진과 대화한 결과, 구단에 대한 VW의 투자에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며 위기론 진화에 나섰다. 그러나 이 같은 해프닝은 진원지인 폭스바겐 배기가스 조작 사태가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계속 이어질 전망이다. ‘메이드 인 저머니’가 과연 여진(餘震)을 버텨낼 수 있을지, 또 한 번의 ‘폭스바겐 살리기’가 이뤄질지 지켜볼 일이다.

강성운│독일 통신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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