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허기진 군상](2)미래 없는 청년들-광탈·흙수저·지잡대.."우리를 위한 나라는 없다"

이혜리·김상범 기자 2015. 10. 7.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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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귀' 취업문에 매번 좌절"노력해도 계층 상승 어려워"

“한국에는 희망이 없어요. 여기서 뭐가 더 나아질까요?”취업준비생부터 대기업 정규직까지, 경향신문이 만난 청년들은 하나같이 한국 사회에 절망감을 토로했다. 신분도 처지도 달랐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꿈을 잃기는 매한가지였다. ‘희망이 없다’는 무력감은 이들로 하여금 ‘헬조선’에 공감하고 ‘탈조선’을 꿈꾸게 했다.

■좁은 취업문

지방대 학생들의 절망감은 유독 심하다. 정부가 ‘지역인재할당제’를 제시하고, 대기업은 학력을 보지 않는 ‘열린 채용’을 지향한다지만 장벽은 여전히 높다. 지방의 한 사립대 도시공학과에 재학 중인 김덕현씨(26·가명)는 일주일에 3~4일은 밤을 새워 전공 과제에 매달린다. 김씨는 얼마 전 ‘이 고생을 해 학점을 잘 받아 뭐하나’ 싶어 한 달 가까이 공들여 만들던 스티로폼 모형을 바닥에 던져버렸다. 설계사무소에 취직하고 싶다는 그는 “어차피 나 같은 ‘지잡대(지방대를 비하하는 말)’ 출신이 갈 수 있는 자리는 계약직밖에 없다”며 “요즘은 아예 아르바이트를 계속 하다가 영업직으로 취직할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스펙이 워낙 올라가다 보니 서울 소재 대학의 취업준비생도 ‘바늘귀’를 통과하기 위한 고행길을 걷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7월 연세대 4학년 변철우씨(27·가명)는 2년간 준비하던 행정고시를 접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다.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난 후배들을 보며 ‘더 이상 시간을 끌다가는 추월당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토익이나 오픽(OPIc) 점수도 낮지 않고, 테샛(TESAT) 점수도 땄는데 서류를 내는 족족 ‘광탈(빛의 속도로 탈락한다는 뜻)’당하기 일쑤”라며 “올해 안에 어디든 취업을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어두운 미래

비정규직 일자리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은 평생 불안정한 직업을 전전해야 한다. 공공기관 계약직인 현재홍씨(24·가명)는 하루 12시간 일하고 월 145만원을 받는다. 계약은 오는 12월 만료된다. 1년 더 계약을 맺을 수 있지만 2017년엔 실직자 신세가 예고돼 있다. 현씨는 “변변한 스펙이 없다보니 인력소개소와 구인공고를 다시 기웃거려야 한다”면서 “계약직으로 시작한 사회생활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것 같다”고 말했다.

정규직에 ‘안착’한 청년들도 긴 노동시간과 빠듯한 임금 때문에 버티기 바쁘다. 박계덕씨(33·가명)는 4년간 파견직으로 시화공단을 떠돌다 2013년 한 자동차 부품업체의 정규직이 됐다. 박씨는 “정규직 명찰이 생겼을 때 비로소 내 이름을 되찾은 것 같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하루 12시간 기계를 돌리는 생활은 여전하고 180만원 남짓한 월급은 부모 용돈과 월세 등으로 모두 빠져나가기 일쑤다. 그는 “정규직이 돼도 기계의 부품이 된 것 같은 느낌은 똑같다”고 말했다. 대기업 계열사에서 4년째 근무하는 성동현씨(31·가명)는 입사 1년차 시절을 떠올리며 “ ‘열정’을 구실로 팀 내 모든 업무가 당연한 듯 몰려왔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회사를 그만두고 동남아에 게스트하우스를 차리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꿈일 뿐이다. 성씨는 “입사할 땐 회사의 비전과 내 미래 모습이 일치할 것이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느는 건 경력도 연봉도 아닌 성인병 수치밖에 없다”고 말했다.

■연예·결혼·출산 포기

정부는 지난 10년간 저출산 대책 예산으로 80조원 넘게 쏟아부었지만 청년들은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로 자신을 규정한다. 생존이 제1의 목표인 마당에 ‘재생산’은 엄두도 못 낸다. 대기업 사원 성동현씨는 “급여가 많다고 하지만 세금과 국민연금, 건강보험료가 빠져나가고 나면 월급이 진짜로 많은 건가 생각하게 된다”면서 “숨만 쉬고 살아도 결혼자금을 모으려면 몇 년이 걸릴지 모르겠다”고 했다. 간호사로 일하는 황경미씨(35·가명)도 같은 처지다. 꾸미기를 좋아하지만 학자금 대출을 갚느라 올해도 티셔츠만 딱 한 장 샀다. 황씨는 “비용 문제 때문에 결혼은 생각도 않고 있다. 결혼해도 아이는 낳지 않는 쪽으로 생각 중”이라고 말했다.

청년들의 ‘꿈’마저 밥벌이에 위협받고 있다. 웹툰 작가 지망생인 이지혜씨(21·가명)는 고등학교 졸업 후 생활비와 28만원인 작업실 월세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 최근 일했던 빵집에선 최저시급의 80% 남짓한 급여를 받았고 신분은 수습이었다. 노래방 도우미 일도 해 봤다. 그렇게 번 돈이 아까워 5500원으로 하루 두 끼를 때운다. 이씨는 “시급이 조금만 높으면 알바 하면서도 (미술)공부를 할 수 있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만화가로 데뷔하지 못하면 평생 알바만 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우울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남은 것은 자조와 저주뿐

현대경제연구원이 지난 8월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 20~30대 청년 5명 중 4명은 ‘노력해도 계층상승이 어렵다’고 답했다. 올라갈 사다리가 없는 청년들에게 남은 것은 ‘흙수저’라는 자조와 ‘금수저’를 향한 저주뿐이다.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서빙 알바를 하며 등록금을 버는 대학생 조세환씨(28·가명)는 평소 “나는 흙수저”라는 말을 자주 한다. 조씨는 “술을 먹어도 동네에서 소주만 마시는데, 부모님 잘 만나 외제차 끌면서 몇십만원짜리 샴페인 마시는 또래들을 보면 화가 난다”고 말했다.

현재홍씨는 “정치인들은 청년이 주역이라고 얘기하지만 정작 나 같은 고졸자가 사회에 제대로 발을 붙이기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박계덕씨는 “아무리 고함을 쳐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개인 악기공방을 차리기 위해 지게차 운전을 했던 이태혁씨(28·가명)는 “대한민국은 청년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야만적인 사회”라고 했다. 그는 “이 나라는 ‘망하기 전 조선’이다. 지금처럼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는 청년들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기회만 된다면 이 나라를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이혜리·김상범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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