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모습 거의 잃은 최후의 만찬, 다빈치 때문?

박용은 2015. 10. 7.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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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미술 기행 13-4]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최후의 만찬

[오마이뉴스 박용은 기자]

'두오모 광장'의 수많은 인파를 헤치고 '암브로시아나 미술관(Pinacoteca Ambrosiana)'으로 향합니다. 밀라노 대주교 페데리코 볼로메 추기경이 자신의 수집품을 기초로 도서관과 함께 1618년에 건립한 이 미술관에는 명화들 말고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메모들과 라파엘로의 스케치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 천재들이 남긴 고민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곳이지요. 하지만 너무 큰 기대를 하고 간 탓일까요?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은 나에게 적지 않은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우선 가장 먼저 만나보려 했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스케치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직원에게 물어보니 2년 후에나 다시 외부 공개할 방침이라고 합니다. 스케치지만 실제 바티칸에 있는 벽화와 똑같은 크기로 그린 그림입니다. 수백 장의 종이를 정교하게 붙여서 그렸고 그 자체로 사실적이고 아름다운, 어찌 보면 원작보다 더 값진 그림일 수도 있는데 볼 수 없다니 크게 실망했습니다.

라파엘로의 스케치를 볼 수 없어서 실망했지만...

▲ 아테네 학당 스케치 라파엘로, '아테네 학당 스케치' (부분),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바티칸 박물관 '서명의 방'에 있는 '아테네 학당'의 스케치로 실제와 같은 스케치한 것입니다. 하지만 실물을 볼 수 없어서 위키미디어 이미지로 대체합니다.
ⓒ wikimedia commons
그 실망감 때문에 다른 그림들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습니다. 다른 곳 같으면 얀 브뤼헬의 작품들에 소름이 돋았을 텐데 왠지 기운이 탁 꺾인 느낌입니다. 게다가 관람객이 거의 없어서 그런지 미술관 직원 한 명이 내 뒤를 계속 졸졸 따라다닙니다.

동양인이라 그런 걸까요? 무슨 일이라도 벌일까 싶어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주시하는 것 같습니다. 살짝 기분이 나빠집니다. 이럴 때는 선수를 치는 것이 좋습니다.

"라파엘로의 스케치를 볼 수 없다고 들었어요. 그럼 다빈치의 메모나 '음악가의 초상'도 볼 수 없나요?"
"아니에요. 그것들은 도서관 쪽으로 가면 볼 수 있어요."
"그곳에 카라바조의 '과일바구니'도 있나요?"
"네."

그렇게 몇 가지 질문을 던지자 대번에 표정부터 바뀝니다. 의심의 눈초리는 온데간데없고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친절한 미소와 함께 대답해 줍니다. 그리고 더는 나를 따라오지도 않고 다른 관람객 쪽으로 발길을 옮깁니다.

▲ 모자이크 계단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의 계단입니다.
ⓒ 박용은
조금은 씁쓸한 기분으로 계속 관람을 이어갑니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계단을 올라 이탈리아 위인들의 흉상이 있는 회랑을 지나니 어느 순간 전시실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방이 나타납니다. 바로 '암브로시아나 도서관(Biblioteca Ambrosiana)'입니다.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으로 알려진 이곳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날 수 있습니다. 먼저 '음악가의 초상'을 봅니다. 밀라노 대성당의 합창단장 프란치노 가푸리오의 초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다빈치가 남긴 유일한 남성 초상화입니다.

'모나리자'나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등 다빈치의 다른 초상화에 비해 훨씬 덜 알려졌고, 그림 자체도 미완성이라 그런지 얼마 되지도 않는 다른 관람객들 대부분은 그냥 스쳐 지나갑니다. 다빈치의 작품 중 어쩌면 가장 대접받지 못하는 그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이 그림 '음악가의 초상'이 예술가를 아직 기술자로 생각하던 시기에 그려진 예술가의 초상화란 사실입니다.

▲ 음악가의 초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음악가의 초상',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밀라노 대성당의 합창단장 프란치노 가푸리오의 초상으로 알려진 이 그림은 다빈치가 남긴 유일한 남성 초상화입니다.
ⓒ 박용은
'음악가의 초상'에 이어 드디어 다빈치의 메모들, '코덱스 아틀란티쿠스(Codex Atlanticus)'를 만날 차례입니다.

다빈치는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머릿속을 스쳐 갔던 모든 생각의 단편들을 메모로 남겼다고 합니다. 개인적인 상념에서 우화·철학적 명상·문학·음악·미술·수학·천문학·인체·기계 장치·무기 등 말 그대로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 아이디어를 빼곡히 기록해 두었지요. 무려 1119 페이지에 이르는 다빈치의 그 메모들을 폼페오 레오니가 집대성해서 만든 것이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메모들

▲ 암브로시아나 도서관 암브로시아나 미술관과 함께 이어져 있는 암브로시아나 도서관은 세계 최초의 공공도서관이었습니다. 좌우에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메모 '코덱스 아틀란티쿠스'가 저 멀리 중앙에 카라바조의 정물화 '과일바구니'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 박용은
눈앞에 있는 다빈치의 메모는 지난 2009년부터 2015년까지 6년 동안 24회에 걸쳐 1119 페이지 전체를 공개하는 전시회의 거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설명을 듣고 나니 라파엘로의 스케치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살짝 누그러집니다. 오래된 공공도서관의 고서들이 뿜어내는 짙은 책 향기 속에서 다빈치의 메모들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살펴봅니다.

잘 알겠지만 왼손잡이였던 다빈치는 암호문처럼 메모를 남긴 것으로 유명합니다. 거울에 비춰봐야 올바른 문장이 될 수 있도록 오른쪽부터 거꾸로 글을 쓴다거나, 문장 사이에 전혀 다른 맥락의 단어를 삽입하여 새로운 문장을 만들기도 했죠.

이런 이유로 다빈치의 메모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입니다. 나는 메모만으로는 내용을 전혀 알 수 없어서 옆에 있는 안내문만 참고합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영어가 짧은 탓에 몇 번이나 아이패드로 사전을 뒤져 봅니다.

그래도 어떻습니까? 대체불가능의 천재, 다빈치의 오리지널 메모를 눈앞에 마주한다는 것만도 가슴 뛰는 경험입니다. 다빈치는 심지어 겸손하기까지 합니다. 삶의 황혼기 무렵 다빈치는 "나는 나에게 주어진 시간을 허비했다"는 메모를 남겼다고 합니다.

▲ 코덱스 아틀란티쿠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코덱스 아틀란티쿠스'(부분),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1119 페이지에 이르는 다빈치의 메모들을 폼페오 레오니가 집대성해서 만든 것이 ‘코덱스 아틀란티쿠스’입니다.
ⓒ 박용은
그렇게 다빈치의 메모들을 하나씩 살피다 보니, 조명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곳에 낯익은 그림 한 편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입니다.

다빈치의 메모들과 함께 있는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 너무나 뜬금없는 전시입니다. 더구나 가까이서 확인할 수도 없을 정도로 먼 위치에 전시해 놓았습니다. 말했듯이 조명이 아예 없어서 작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섬세한 묘사가 일품인 카라바조의 그림을 어떻게 이따위로 전시해 놓았는지 한심할 정도입니다. 물론 임시로 옮겨 놓은 전시인 것 같긴 하지만, 라파엘로의 스케치를 만나지 못한 것까지 다시 떠올라 실망감이 커집니다.

▲ 과일 바구니 카라바조, '과일 바구니', 밀라노 암브로시아나 미술관. 이탈리아 최초의 정물화인 '과일 바구니'. 그런데 조명도 거의 없는 곳에, 제대로 확인할 수도 없는 먼 거리에 전시해 놓아서 위키미디어 이미지로 대체합니다.
ⓒ Wikimedia Commons
사실 카라바조의 '과일 바구니'는 이탈리아 최초의 정물화입니다. 그동안 인물화나 성화의 한 구석을 장식하는 데 불과했던 정물을 당당히 작품의 주인공으로 내세운, 의미 있는 작품이란 말이죠.

자세히 보면 알록달록 탐스러운 과일들 대부분이 조금씩 시들거나 벌레 먹은 상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로마 '바르베리니 국립 미술관'에서 만났던 손톱에 때가 끼고 병든 바쿠스가 떠오릅니다.

신까지도 현실적으로 묘사했던 카라바조의 리얼리즘(사실주의) 정신은 정물화에도 이처럼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그림을 열악한 환경에서 볼 수밖에 없다니, 이탈리아에 와서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가장 큰 실망감이 밀려옵니다.

하지만 여행은 계속되어야겠지요? 아쉬움이 가득한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을 뒤로 하고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를 만나러 갑니다.

암브로시아나 미술관에서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만날 수 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Chiesa di Santa Maria delle Grazie)'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20분 남짓. 하지만 예약 시간 30분 전에는 도착해서 티켓으로 교환하고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고 합니다. 나는 거의 마지막 순서로 예약했기 때문에 시간 여유가 좀 있긴 하지만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다른 곳도 둘러보려고 좀 더 서둘렀습니다.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 브라만테의 솜씨가 살아있는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예약 시각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 특유의 붉은 벽돌의 우아한 성당 건물이 눈앞에 나타나자 가슴이 마구 뛰기 시작합니다. 성당을 먼저 보려던 생각은 이미 저 멀리 사라졌고, 곧장 '최후의 만찬'을 만날 수 있는 부속 식당 건물로 향합니다.

예약하지 못한 수많은 여행객이 혹시라도 예약 취소된 티켓을 구할 수 있을까 좁은 건물 안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그 비좁은 틈을 헤집고 들어가 티켓으로 교환합니다. 부러운 듯 바라보는 눈길들. 무슨 복권에라도 당첨된 듯 득의양양한 기분으로 그들 사이를 당당히 가로질러 나옵니다. 이제 남은 건 '1시간'입니다.

▲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의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스포르차 가문의 일 모로의 명령으로 초기 르네상스 건축의 거장 브라만테가 정비한 성당입니다. 특유의 붉은 빛깔 벽돌이 눈에 들어옵니다.
ⓒ 박용은
우선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보수 공사 중이라 실내를 제대로 돌아볼 수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성당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최후의 만찬'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마음을 다독입니다.

당시 밀라노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스포르차 가문. 조카의 권력을 찬탈한 야심만만한 로도비코 일 모로는 피렌체에서 온 한 예술가로부터 자기추천서를 받습니다. 그곳에는 교량·하천 건설과 같은 토목 기술부터 탄약·투석기·전차 등의 무기 제조 기술은 물론이고 궁전 건축과 조각·회화 등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내용이 담겨있었죠. 자기추천서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 다빈치였습니다.

일 모로는 이 당돌한 예술가에게 자신의 애인 초상화를 제작하게 합니다. 흔히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으로 알려진 '체칠리아 갈레라니의 초상'(폴란드 크라쿠프의 차르토리스키 미술관에 소장)이죠. 이후 다빈치는 자신이 개발한 명암법 '키아로스쿠로'와 스푸마토 기법을 이용하여 '암굴의 성모'(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를 제작하고, 비록 프랑스의 밀라노 침공으로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스포르차의 기마상을 의뢰받는 등 일 모로의 총애 속에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며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그 무렵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브라만테에게 명하여 도미니크 수도회 성당,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을 완공한 일 모로는 성당의 부속 식당 건물을 장식하기 위해 다빈치에게 프레스코화를 주문합니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입니다.

드디어 만난 '최후의 만찬'

▲ 최후의 만찬이 전시된 성당 부속 건물 '최후의 만찬'은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부속 건물인 식당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성당 입구가 아닌 바깥쪽 입구를 통해 전시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박용은
준비해 둔 자료들을 하나씩 읽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가버렸습니다. 정해진 순서대로 줄을 서서 입장합니다. 작품 보존을 위해 인체에서 나오는 습기를 낮추어 준다는 대기실을 지나 드디어 '최후의 만찬' 앞에 섭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의 가장 중요한 순간 중 하나. '최후의 만찬' 앞에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멈추고 가슴이 떨립니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그림이 큰 탓도 있겠지만 어쩐 일인지 내 눈은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할지 모르고 허둥댑니다. 어쩌면 '최후의 만찬' 앞에 섰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몸이 먼저 정신을 못 차리는 것 같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15분.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생각에 우선 다른 관람객들의 뒤편으로 향합니다. 그리고 멀리서 '최후의 만찬'을 봅니다. 오히려 뒤편이 더 적절한 위치였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자리는 바로 그곳, 식당의 중앙에서 좀 더 뒤로 떨어진 자리였습니다.

흔히 '최후의 만찬' 하면 예수의 머리 위에 있는 소실점을 말하면서 르네상스 회화의 원근법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 소실점이 단지 그림에서뿐만 아니라 건물 벽과도 이어져 깊은 공간감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인물들 뒤편의 창과 풍경도 실제처럼 보이고 예수와 제자들도 함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제야 앞서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원'에서 만난 기를란다요의 '최후의 만찬'도 그렇고, 이 그림이 수도원 성당 식당 안에 그려진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와 같은 자리에 앉아 식사하는 것 같은 느낌은 힘겨운 수도 생활을 이어가던 수도승들에게 무한한 자긍심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에 대한 제자의 배신을 이야기하는 장면을 묘사함으로써 수도승들의 마음도 되잡게 했을 것입니다.

이제 다시 '최후의 만찬' 앞으로 다가섭니다. 그리고 한 부분이라도 놓칠세라 읽었던 자료들을 떠올리며 하나 하나 꼼꼼히 그림을 살펴봅니다. 자신을 배신할 제자가 있을 거라는 예수의 말에 놀라고 당황한 제자들. 때론 절망하기도 하고 분노하는 그들 사이에서 뻔뻔하게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유다의 모습.

그들의 동작과 표정에서 심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제 막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 르네상스. 조화로운 화면 구성과 해부학에 바탕을 둔 사실적인 인물 묘사에 관심을 두던 그 시기, 다빈치는 벌써 인물들의 극적인 심리 묘사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것입니다.

▲ 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최후의 만찬', 밀라노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 이제 막 전성기를 맞기 시작한 르네상스. 조화로운 화면 구성과 해부학에 바탕을 둔 사실적인 인물 묘사에 관심을 두던 그 시기, 다빈치는 벌써 인물들의 극적인 심리 묘사에 깊은 관심을 두었습니다.
ⓒ Wikimedia Commons
익히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희미한 화면. 한눈에 봐도 그림의 훼손 상태가 심각합니다. 누구 말처럼 어쩌면 몇 세대 지나지 않아 더는 '최후의 만찬'을 볼 수 없을 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하도 많이 보수와 복원을 되풀이하다 보니 다빈치가 남긴 원화는 10%도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그림의 상태가 이처럼 훼손된 가장 큰 이유는 다빈치가 애초에 전통적 벽화 방식인 프레스코가 아닌 유화(혹은 템페라) 방식으로 그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빈치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 짧은 시간에 그날그날 정해진 분량의 작업을 빨리 마쳐야 하고, 또 화면을 억지로 나누어서 작업해야 했던 프레스코 방식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모두 표현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훨씬 더 섬세한 묘사가 가능하고 다양한 색채를 구사할 수 있었던 유화 방식을 선택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 선택이 불행의 시작이었습니다. 수도원 식당이라는 환경과 당연히 그림을 고려하지 않고 건축된 건물 벽체의 부실함으로 '최후의 만찬'은 다빈치가 생존해 있을 때부터 이미 손상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최후의 만찬'의 역사는 예수의 삶처럼 고난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홍수와 침수, 전쟁, 서투른 보수 작업 등을 거치면서 '최후의 만찬'은 원래의 모습을 거의 잃고 말았죠.

지금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최후의 만찬'은 최신 과학 기술의 도움을 받아 1999년에 전체적인 복원을 마친 결과물입니다. 그것도 15분 동안 20명 내외의 사람들만 볼 수 있죠. 사진 촬영 금지는 물론이고 앞서 말했듯 습기를 제거하는 방에서 대기 시간도 필수입니다. 하지만 사진을 찍을 수 없어도 좋습니다. 어차피 '최후의 만찬'은 사진보다 화보로 보는 게 훨씬 더 선명할 테니 말입니다.

그저 '최후의 만찬'을 보고 느끼면 그만인 것입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5분 남짓. 온 신경을 집중해서 다시 하나하나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최후의 만찬'을 보기 위해서 살아온 것처럼, 숨 쉬는 시간조차도 눈물 흘리는 시간조차도 아깝습니다.

어떤 이들은 너무 유명한 그림이라 많이 봐 왔고, 실제로 보면 희미하고 많이 훼손되어서 생각보다 감동이 덜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하고 싶습니다. 그림은 보는 게 아니라 함께 호흡하는 거라고. 그림의 작가와 작품 속 주인공과 그림이 지나온 역사와 함께 말입니다. 나는 '최후의 만찬'에서 흘러나오는 다빈치의 숨결과 예수와 제자들의 이야기와 이 그림을 지키고 되살리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땀을 함께 느끼려고 노력합니다.

▲ 1번 트램 '최후의 만찬'을 만나고 이탈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 밀라노.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교통수단인 1번 트램(노면 전차)을 타고 숙소로 돌아갑니다. (화면의 여인은 모르는 이라 모자이크 처리했으니 양해해 주시길)
ⓒ 박용은
'최후의 만찬'의 감동을 안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이번에는 걷지 않고 트램(노면 전차)에 올랐습니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현대적인 도시, 밀라노.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교통수단인 1번 트램.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 밀라노의 야경 속을 흔들흔들 트램을 타고 천천히 숙소로 돌아가는 내 마음은 누구보다 행복합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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