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함차 환불·교환, 한국은 왜 안 되나

2015. 10. 7.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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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미국은 일명 ‘레몬법’으로 소비자 보호… 우리나라는 법제화 여전히 안갯속

만약 슈퍼마켓에서 ‘오렌지’를 사왔다고 알았는데 집에 와서 보니 시큼하기만 한 ‘레몬’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당연히 가서 원래 사려던 오렌지로 바꿔오거나 돈을 돌려받는 수순을 밟을 것이다. 게다가 문제 제품이 값싼 오렌지가 아니라 수천만원을 호가하는 자동차라면 더더욱 교환 또는 환불을 받는 게 상식적으로 마땅해 보인다. 미국에는 수리가 안 되는 결함 차량(레몬)은 신차(오렌지)로 교환하거나 환불을 해주도록 하는 일명 ‘레몬법’이 있다.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 장면은 미국과 비교해보면 바로 나온다. 현대차는 2013년형 싼타페 누수 문제로 국내 소비자에게 버티다가 교환·환불은커녕 리콜도 아닌 무상수리를 했지만, 미국에서는 신차로 바꿔준 일이 있었다. 필라델피아의 경우 펜실베이니아주 레몬법에 따라 해당 싼타페는 신차로 교환해줬다. 투싼은 블루투스와 핸즈프리 이상으로도 신차로 바꿔줬다. 지난해도 싼타페 엔진 경고등 문제로 45일 만에 새 차로 교환하는 등 다른 브랜드를 포함해 유사 사례가 즐비하다. 자동차 기업들이 미국 소비자를 특별히 사랑해서가 아니라 레몬법이 버티고 있어서다.

한 자돋차 회사의 사후서비스(AS)센터에서 정비직원이 리콜된 차량의 엔진 작동상태를 들여다보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심각한 결함에도 교환은 하늘의 별따기

이런 차이를 한국 소비자들이 순순히 받아들이긴 힘든다. 국내는 결함 차량을 신차로 교환하거나 환불을 받아내려면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될까말까다. 소비자 시민단체를 동원해 압력을 가하거나, 그것도 모자라면 최근 광주에서 일어난 것처럼 2억원짜리 벤츠 S63 AMG를 골프채로 부순 동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창피라도 주는 이벤트라도 만들어야 슬며시 해결해주곤 한다.

그처럼 용감하지 못한 대다수 소심한 소비자들은 힘겨운 싸움을 감내한다. 현대차 싼타페를 지난해 1월 산 최모씨는 머플러에서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오더니 트렁크까지 그을리는 일을 겪었다. 동네 정비소에 네 차례 갔으나 고쳐지지 않아 서울의 한 사업소를 찾아갔고, 완전히 수리된 줄 알았다. 그러나 다시 냄새가 진동했고, 설상가상으로 주행 중 시동이 꺼지기 시작했다. 그 뒤로도 네 차례 정도 시동이 꺼져 목숨을 걸고 운전하는 불안함이 가시질 않았다. 다시 사업소에 차를 맡겼지만 증상이 안 나타난다고 더 타보라고 했다. 하지만 20㎞를 가는 동안 5차례나 시동이 꺼졌고, 그 뒤 약 1시간 동안 시동이 안 걸렸다. “누가 죽어야 하겠느냐”며 새 차로 교환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콧방귀를 뀌며 ‘당연히 힘들다’는 비아냥만 들었다고 한다.

답답한 마음에 한국자동차소비자연맹에 도움을 요청한 최씨가 미국에서 같은 일을 겪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곧바로 환불이나 교환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미국 제38대 제럴드 포드 대통령 때인 1975년에 나온 일명 레몬법(맥너슨-모스법)은 자동차의 경우 구입 후 1년 또는 주행거리 1만9312㎞ 미만 자차 또는 임대 차량에서 안전과 밀접한 고장으로 2회 이상 수리를 받았거나, 일반 고장으로 4회 이상 수리를 받게 될 경우 교환·환불을 해주도록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주별로도 1982년부터 모두 시행 중이다.

한국은 어지간한 일반 문제는 소비자가 감내해야 할 몫이다. 시동꺼짐, 오일누수 같은 심각한 결함도 새 차로 바꾸거나 환불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깝다. 소비자기본법 시행령에 따른 공정거래위원회 고시 형식인 ‘소비자분쟁해결 기준’이 있지만, 의무가 아닌 권고 사항에 그쳐 실제 집행권은 자동차 제조사에 있다.

국내에서도 ‘한국판 레몬법’을 만들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무산됐다. 2012년 조원진 새누리당 의원이 중대 하자로 3회 이상 수리하고도 같은 고장이 나면 국토교통부 장관이 교환·환불을 명령할 수 있도록 하는 자동차관리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이 법안은 상임위 소위원회에서 폐기될 직전에 조 의원의 항의로 살아났지만 결국 통과되지 못한 채 폐기됐다. 반대에 앞장선 측은 현대·기아차, 한국GM, 르노삼성, 쌍용차 등 완성차 업체의 이익단체인 한국자동차산업협회(KAMA)다. 이 단체 상근부회장은 산업통상자원부 등 고위공무원 출신들이 주로 맡아 왔다.

국회 국토교통위 위원들도 소극적

정부도 대체로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해 왔다. 일차적 소관부처인 국토부는 물론 고시를 운영 중인 공정위 또한 환불·교환과 관련한 최신 통계조차 파악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중대 결함인 주행 중 시동꺼짐에 대해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11월 펴낸 보고서에서 교환이나 환급이 미미하다고 지적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소비자원은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위해감시시스템(CISS)에 접수된 사례자 128명에게 물어 보니, 39.1%(50건)는 시동꺼짐으로 4회 이상 수리를 받았고, 36.0%(46건)는 수리기간이 3개월 이상 걸린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46.1%(59건)는 수리 후에도 시동꺼짐 현상이 개선되지 않았다. 교환이나 환급을 받은 경우는 4.7%(6건)뿐이다. 소비자원은 중대 결함의 구체적 범위 명시와 더불어 교환 및 환불 조건을 완화하는 방안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전향적인 입장을 내놨다.

최근 심재철 의원 발의안을 계기로 자동차 교환·환불 제도가 다시 시험대에 올랐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국내에서도 중대한 하자가 2회 이상 발생하면 차량 인도일에 관계 없이 교환·환불이 가능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용석 국토부 자동차기획단장은 지난달 16일 “자동차산업과 소비자 모두 부작용이 없도록 균형을 찾아 연구·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번에도 검토로만 끝날지, 한국판 레몬법의 앞날은 여전히 안갯속에 있다.

국회 국토교통위 위원들의 경우 적극적이지는 않은 편이다. <주간경향>이 최근 국토교통위 위원 31명에게 긴급 설문지를 돌려 수차례 답변을 종용했으나, 14명(45.1%)은 응답 자체를 거부하거나 국감으로 바쁘다며 외면했다. 그나마 응답한 의원 17명 중 14명은 현행 결함 차량 교환·환불 제도는 불만족스럽다고 답했다. 또 거의 모두가 한국판 레몬법이 필요하다는 인식은 보여줬다. 새누리당 이우현 의원은 “현재 자동차 관련법이 소비자 중심이 아니라 자동차 회사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새정치민주연합 김경협 의원은 “교환, 환불, 리콜을 위한 세부적 기준을 시행령이나 시행규칙 등이 아닌 법 자체로 상향시킬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들이 기업체 감싸기를 넘어 법 개정까지 이뤄낼지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논란의 자동차산업협회나 업체로부터 로비를 받아봤느냐는 물음에는 응답자 중 야당 의원 한 명을 빼고는 모두 ‘없다’고 부인했다.

완성차 업체 관계자는 “차를 교환해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해당 부품만 바꾸면 된다”고 말했다.

반면 실제로 환불이나 교환할 만한 차량은 많지 않기 때문에 모호한 기준으로 소비자와의 불필요한 갈등을 겪기보다는 선을 분명하게 긋는 게 업체들도 이로울 것이라는 견해도 많다. 한국자동차소비자연맹 이정주 회장은 “교환과 환불 기준만 정하면 오히려 소비자의 혼란을 덜어줄 수 있어 한국판 레몬법 같은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말했다. 설문에 응한 다수 의원들도 비슷한 견해를 드러냈다. 새누리당 이학재 의원은 “가전제품의 경우 수리 후에도 정상 작동이 불가한 제품을 교환해 주듯이 (자동차도) 교환 가능한 기간과 기준을 정하면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한국 자동차 소비자들도 ‘레몬은 레몬이다’라고 지칭하며 마음 편히 오렌지로 바꿀 날이 언제나 올까.

<전병역 기자 junb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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