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하는 '영리한 관찰자' 타일러 라시

전혜원 기자 2015. 10. 6.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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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우리가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이방인이 등장했다.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이 미국인은 첫 회부터 ‘수어지교’ ‘근묵자흑’ 같은 사자성어를 줄줄 읊고 맹자를 인용했다. 시카고 대학 국제학부를 졸업하고 서울대에서 정치외교학 석사과정을 밟는 그는 ‘학구적 엘리트 외국인’이라는 새 영역을 개척했다. 정갈한 필체의 한글 필기는 현지인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다(심지어 한자를 병기하기도 한다). 타일러 라시(27) 얘기다.

한국에서 외국인이라서 받곤 하는 질문에 타일러는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그가 가장 빛나는 대목도 여기다. ‘일도 아이도 포기 못하는 나, 비정상인가요?’라는 안건이 <비정상회담>에 상정됐을 때 타일러는 되물었다. '남자한테는 ‘너 진짜 욕심 많은 거 아니야?’ 이렇게 얘기 안 하잖아요. 여자는 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되죠?' <뇌섹시대-문제적 남자>에 등장한 S전자 면접 질문 ‘여자친구와 왜 헤어졌는가?’에 대해서도 타일러는 의문부터 제기했다. '그런 질문이 어떻게 제 업무 수행 능력을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 파악하고 있지 못합니다.'

한국 사회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동시에, 미디어가 자신을 어떤 방식으로 소비하는지 파악하는 영리한 관찰자 타일러를 9월17일에 만났다. 세속적인 질문부터 했다.

ⓒ시사IN 조남진 :

ⓒ시사IN 조남진

도대체 몇 개 국어를 하나?

정확하고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외국어는 한국어와 프랑스어 정도예요. 대학교에서 포르투갈어·스페인어·독일어를 배워봤어요. 기본적인 소통, ‘빵을 먹고 싶다’ 정도는 할 수 있는데 그런 건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10주 동안 일본어 수업을 들으면서 기본적인 문장 구조랑 문자만 익혔어요.

미국 동북부에 있는 버몬트 주에서 자랐다. 프랑스어를 잘하는 건 지역 때문인가?

버몬트는 경제적으로 퀘벡 주와 교류가 되게 많아요. 그래서 버몬트 사람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외국어가 프랑스어죠. 학교에서 일곱 살부터 배우기 시작했고 중학교 때 교사가 거기서 온 사람이었어요.

미국은 연방국가여서 어느 주에서 왔는지 물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맞아요. 미국 건국 시기에 사람들이 보통 식민지 13개가 있었다고 하죠. 버몬트는 식민지가 아니었거든요. 버몬트에서는 1777년 민병을 만들어서 자기만의 공화국을 만들었어요. 그래서 버몬트 사람들이 자기 주권, 독립적인 삶에 대한 생각이 강해요. 호머 헐버트(고종 황제를 도와 한국의 항일운동을 적극 지원한 인물. 버몬트 출신이다)가 한국이 주권을 빼앗기는 걸 보면서 항일운동을 한 것도 그래서일 거예요. 그 사람이 한반도를 사랑했겠지만, 주권이나 독립을 본질적인 진리라 여긴 가치관 때문이기도 했지 않을까 해요. 버몬트적인 정체성 때문에.

유럽 중심주의에서 벗어나고 싶어 2007년 한국어를 처음 공부했다고 했다.

우리 아버지가 오스트리아에서도 완전 시골 사람인데, 그럼 독일어 사투리일 거 아니에요. 독일어 수업에서 자기소개를 했더니 '타일러가 제대로 된 독일어를 배워야 할 것 같아요' 하는 거예요. 독일에서 쓰는 말만 독일어인가? 모차르트가 오스트리아 사람인데! 그런 계기가 종종 있었던 것 같아요. 프랑스어권이 얼마나 넓은데 전부 파리, 파리, 파리…. 왜 이것만 중심이고 원본이지? 한국어를 선택한 것도 그래서일 수도 있어요. 중국도 일본도 아닌 또 다른 거. 중심 외의, 관심을 덜 받는 곳에 가면 숨은 보석을 찾을 수 있다는 그런 거 좋아하거든요.

처음 검색한 한국어가 ‘북한’이었다고 했다.

전공이 국제학이어서 관심이 많았어요. 이란 북한 미얀마, 국제 질서에 따라가기 싫어하는, 자기 방식대로 하겠다는 국가에 관심이 많았던 거죠.

학사 논문 주제가 북한 대기근이다.

자료를 찾기 어려운 게 북한이잖아요. 기근 전후의 변화를 어떻게 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법조항의 변화에서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되게 흥미로운 거 하나 발견했어요. 국가가 소유한 걸 정리한 조항이 있어요. 모든 바퀴가 있는 것. 이렇게 나와요 원래. 바퀴 달린 건 다 국가 소유야. 그런데 기근 이후에 법조항이 이걸 더 자세히 써요. 기차, 차, 이렇게 구체적으로. 그러면 수레는 사람이 가져도 된다는 거네? 이게 시장의 암거래를 암묵적으로 반영하는 조항인 거죠. 아, 암시장이 생겼구나 하는 거죠. 나중에 배급제를 강화할 때 보면 그 조항이 또 없어져요.

ⓒ타일러 라시 인스타그램 : 타일러(위 오른쪽)의 어린 시절.

한국전쟁 연구로도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 교수가 지도교수였다.

수업 들은 적도 없는데, 한국 관련된 걸 쓰고 싶어서 무작정 찾아갔어요. 원래 중국 쪽으로 관심이 있었던 분인데 한국에 왔다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서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사람들이 많이 밟지 않은 길이어서. 되게 고맙게 기억하고 있어요.

2008년 여름방학 때 3개월 동안 이화여대 어학당에 다니며 어학연수를 했다. 한국의 첫인상은 ‘여기가 인천상륙작전을 했던 곳이구나’였다. 졸업한 뒤에는 주미 한국 대사관 직원으로 일하며 한덕수 당시 대사를 도왔다. 미국 국무부 시험을 봤고 마지막 단계에서 떨어졌다. 한국 정부 초청 장학생 프로그램으로 2011년 다시 한국에 와서 석사과정에 진학했다.

2013년 7월 외국인 유학생 웹진 <Seoulism (서울리즘)>을 만들었다. 계기가 있었나?

정부 초청 장학금을 받아서 공부한 친구 중에 굉장히 괴로운 경험을 한 친구가 몇 있어요. 교수들이 대놓고 돌아가라고 한다거나, 수업시간에 '어떻게 우리나라 세금을 뜯어먹으면서 한국말도 못하고!'라고 말하기도 하고. 결국 그 말을 들은 학생이 귀국했거든요. 그거야말로 세금 낭비죠. 한국에 애정이 있고 본국에 전파해주고 싶은 사람인데.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게 그냥 해보는 생각이 아니라 정말 좋아해서 그렇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어요.

한국 사회에 말을 걸어서 편견을 깨고 소통하는 첫 시도였던 것 같다.

맞아요. 제가 리더로 처음 해본 거라서 조직화가 잘 안 됐어요. 그래도 해본 것만으로 좋아요. 상황이 많이 바뀐 것 같거든요. <서울리즘>이 하려고 했던 걸 <비정상회담>이 훨씬 큰 규모로 한 것 같기도 해요. 원래 유학생이 한국말 잘하면 경계하고 그러는데, 이제는 '왜 한국말 더 잘 못해'라는 소리도 나오고(웃음).

미국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싶다고 얘기했다.

연방주의가 뭔지, 얼마나 다른지, 방송을 보는 분들 중에 그거를 이해한 분이 많아요. 미국을 여러 나라로 구성된 국가로 봐주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뭘 말하기도 훨씬 더 쉬워지는 것 같아요. 이해는 못해도 상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예요.

ⓒ타일러 라시 인스타그램 : 타일러는 한글은 물론 한자까지 능숙하게 쓴다.

토론 태도가 인상적이다. 질문의 전제에 의심을 품고 역으로 질문한다.

미국 사람은 기본적으로 권위에 대해서 좀 회의를 가지는 것 같아요. 중앙정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거나, 윗사람이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에 대해서 늘, 그런 기질이 좀 있어요. 내가 왜 그래야 돼? 이런 거. 그게 학계에서나 대학에서나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토론할 때 질문을 하는 태도가 굉장히 중요해요. 의문을 가지고 접근하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거기에 익숙한 거예요. 저에게는 당연한 건데 한국 학계에서는 많이 안 하죠. 질문을 많이 안 하고, 하더라도 우회적으로 하고(웃음). 질문을 하고 싶은 사람은 되게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혼자서만 가지고 있는 거죠. 그게 학교 주입식 교육 때문인 것 같아요. 유교적 사고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건 그냥 개뿔(인터뷰 중에 나온 가장 격한 단어였다)인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는. <논어>를 보면 다 질문을 전제로 가요. 보수적이라는 옛날 유교에서도 자꾸 질문을 하면서 담론이 이루어지는데, 지금 시대에 그렇게 질문을 억누르는 건 제가 보기에는 그냥 권위주의예요. 권위 있는 사람한테 질문하지 말라는 거는 유교도 아니에요. 장유유서도 마찬가지예요. 장유유서가 그냥 나이가 많은 사람과 적은 사람 사이에 질서가 있다는 것뿐인데 존댓말하고 존경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나이가 많다고 지하철에서 막 밀고 가는 게 장유유서가 아니잖아요. 젊은 사람이 나이 많은 사람에게 해줘야 하는 대우가 있는 것만큼 나이 많은 사람이 어린 사람에게 해줘야 하는 게 있는 거고. 그런 걸 다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모르겠어요. 생각을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우리나라는 유교적이야, 하면서 그것 자체도 묻지를 않는 거죠.

한국 사회는 모두가 같은 ‘잣대’에 얽매인다고 묘사하는 동시에 한국이 ‘기회의 땅’이라고도 했다. 외국인이어서 그런 인식이 가능한가?

외국인이어서 그게 더 쉬운 거죠. 고정된 잣대에서 벗어나는 게 한국 사람은 더 제약이 있는 거죠. 진로·취업·학교·직장… 이런 거 다요. 학과 선택, 학교 선택, 공채가 낫다, 대기업이 낫다, 무슨 전공이 낫다, 무슨 외국어가 낫다…. 이러면 거기에 경쟁률이 높을 수밖에 없잖아요. 자본주의 원리대로 수요·공급인데, 수요가 있는데 공급이 안 되는 데를 가야 할 거 아니에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회적 통념에서 '이게 안전하니까 이걸 해'라고 갇혀 있는 것 같아요.

비정규직이 실제로 먹고살기 힘들고 고용도 불안하다. ‘헬조선’이라는 자조도 나온다. 타일러 눈에도 답답해 보이나?

당연히 상황이 어려울 수도 있고 개인이 노력으로 다 해결할 수 없다는 건 알아요. 구조적인 압력이 존재하니까. 그래도 틀을 벗어나려는 노력을 많이 해보면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고 생각해요.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 중 하나가 자살률이에요. (눈을 크게 뜨며) 왜 가출을 안 해? 그냥 가출을 해요. 조금 극단적이더라도, 생명을 잃지 않는 다른 선택이 있을 텐데 그런 대안을 확 해보는 게 어떤가. 자살이 좋은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답답한데 그 답답함에 가끔 자기 잘못이 섞여 있기도 해요. 100% 자기 잘못이라는 건 아닌데, 100% 사회 때문에 내가 이렇다는 건 안 맞는 거기도 해요.

어쨌든 자기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있다?

저는 한국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걸 하는 한국인들도 있어요. 이미. 한국에서 성이 개방돼 있지는 않잖아요. 성인용품을 생각하면 굉장히 더러운 가게가 생각나죠. 그런데 여자분 두 분이 그런 걸 완전히 깨뜨리고 성에 관심 있는 여자분들을 위한 성인용품 숍을 열었어요. 아예 갤러리처럼 다 전시를 하고 손님이 들어올 때 설명을 해주고 잘못된 거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데. 그 여자분들이 너무 끝내주는 거예요.

ⓒ시사IN 조남진 : 타일러는 JTBC <비정상회담>의 패널로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9월17일 타일러가 tvN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녹화를 준비하고 있는 모습.

한국 사회에서 타일러가 차지하는 포지션이 뭐라고 생각하나?

되게 좋은 질문인데, 저도 고민하고 있어요. 제 포지션이 뭔지, 앞으로 뭐가 될 수 있는지, 그게 한국 사회에 제한된 건지. 미국 사회, 국제사회에서 저의 역할이 뭔가라는 생각을 특히 요즘에 많이 해요. 저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생각을 가늠해보는 게 되게 어려워요. 제가 가지고 있는, 기여할 수 있는 게 뭘까. 모르겠네요. 처음에는 선입견, 편견,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존재였는데, 앞으로는 조금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게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유학생이 다 저를 알아요. 해외에서 사이트를 이용해서 한국어를 배우려는 외국인들도 다 저를 알아요. 제가 말하자면 ‘성공 사례’인데. 이게 되게 중요한 포지션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한국에 들어오려는 이들에게 격려를 해주고 싶기도 하고.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포지션도 있고 그들이 생각하는 포지션도 있고, 계속 모색을 해야 하겠죠.

명문대, 지식인, 뇌섹남, 척척박사 같은 이미지로 소비되는 것 같은데 마음에 드나?

일단은 좋게 봐줘서 고마운 거고요, 가끔 부담이 돼요. 왜냐하면 수준이,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내가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싫지는 않아요. 미국인들은 무식하고 자부심이 너무 많다, 국수주의자다 같은 부정적인 미국의 측면을 없애주는 이미지이기도 하니까. 공부하는 거를 한국에서 좋게 생각하잖아요. 그런 거 고맙게 생각하고.

앞으로 계획은?

가능하면 졸업하려고요. 서울대 외교학과 석사가 너무 어려워요. 앞으로도 많이 어려울 것 같고. 다양한 경험을 더 많이 해보고 싶어요. 저는 사기업 영역에서 일을 해본 적이 없어요. 보통 정부나 비영리 쪽에서 일해왔기 때문에 영리 부문이 어떤지, 모르는 걸 좀 더 알아보고 싶어요. 언젠가는 환경문제, 인권문제 같은 큰 문제에 대해서 창의적으로 생각하며 해결책을 찾아내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렇게 해서 세상에 도움이 되고 싶어요.

전혜원 기자 /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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