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겨지는 '실험실의 개구리'..청소년 생명윤리도 '갈기갈기'

김기범 기자 2015. 10. 4.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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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고 동물실험 필요한가

지난해 6월 충북 진천의 한국바이오마이스터고에서 1학년 여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일어났다. 아버지는 “딸이 학교 입학 후 창업동아리에서 일명 ‘래트’라고 불리는 쥐를 사육하고, 죽여서 포장하는 활동을 하면서 줄곧 괴로움을 호소했다”고 말했다. 실험용 쥐를 다루는 동아리 활동 속에서 어린 여학생의 심적 고통과 스트레스가 커졌던 셈이다. 이 학생의 선택이 극단적이지만, 전국 학교에서 다양한 동물들이 해부·실습 중에 죽임을 당하는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감수성 예민한 어린 학생들이 생명체를 실험하고 처분하는 데 아무런 지침도 제한도 없는 ‘무법지대’ 상황이기 때문이다.

■ 문제의식 없이 자행되는 해부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장하나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17개 시·도교육청에서 제출받은 ‘초·중·고교 생체실험 현황’을 보면, 2012년부터 올해까지 해부실험으로 희생된 동물은 11만5324개체로 집계됐다. 개구리가 8778개체로 가장 많고, 붕어(6789개체)·금붕어(6256개체)·쥐(5263개체) 순이었다. 토끼도 392개체가 희생됐다. 소의 안구나 돼지의 신장·방광·심장, 양의 뇌와 같이 죽은 동물의 사체를 이용하는 해부실험도 적잖이 파악됐다. 초·중·고의 생체실험 통계가 공개되는 것은 처음이고, 현재까지 대학에서의 생체실험 현황은 집계된 적이 없다.

초·중·고의 생체실험에는 법적으로 사육·유통이 금지돼 있는 생태계 교란 생물도 버젓이 이용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62개 학교에서 황소개구리 4898개체를 해부실험에 사용했고, 배스나 피라니아를 이용한 학교도 있었다.

생태계 교란종을 구입해 수업에 이용한 것은 생명윤리를 떠나 ‘생물다양성 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상의 양도·양수 금지 조항을 어긴 것이다. 위반 시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규정돼 있는 것을 감안하면, 황소개구리로 수업을 진행한 학교 측은 법적 책임을 져야 하는 셈이다. 이들 학교에 황소개구리를 판매한 업체들은 홈페이지 판매목록에도 버젓이 황소개구리를 올려 팔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누구나 주문만 하면 생태계 교란 생물을 사들일 수 있는 셈이다.

그러나 주무부처인 환경부는 초·중·고의 생태계 교란종 생체실험에 대해 교육부에 아무런 협조요청도 보내지 않았다. 최근 3년간 생태계 교란 생물의 거래 및 인공증식 행위를 적발한 사례도 없다. 생태계 교란종이 전국 학교를 축으로 매매되고, 퍼져나갈 수도 있는 상황을 손 놓고 방치한 셈이다.

■ 과학자들 내부에서도 찬반 엇갈려

동물의 생체실험은 필요할까. 과학자들 내에서도 찬반 의견이 엇갈리는 얘기다. 동물실험을 대체하는 연구 방법을 마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고, 신약 개발이나 새로운 화학물질의 독성시험을 위해 동물실험이 필수적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지만 초·중·고 학생들의 동물실험은 연구소·실험실·기업의 동물실험과 별개로 보는 시각이 넓다. 과학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신체기관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 실험이 자칫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생명 감수성엔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공학·생태학·수의학 전문가들은 온도차는 있지만 대체로 현재처럼 학교에서 대량으로 동물을 구매해 학생들로 하여금 죽이게 하는 교육 방법엔 문제가 있다는 데 동의했다.

국립생태원 김영준 동물병원부장은 “동물실험을 하는 목적이 명확해져야 하는데 동물 내부의 모습을 보는 것이라면 생물을 대체할 수 있는 도구들이 많이 개발돼 있다”며 “현재의 초·중·고 동물실험은 배움 과정에 있는 학생들에게 있어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깨뜨리는 방식”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 관계자는 “생물 구조를 직접 눈으로 보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지속적으로 많은 생물을 희생시키는 것은 문제가 있고, 초등학생들은 안전상의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 선진국선 살아 있는 동물 실험 금지

선진국에서는 학생들이 살아 있는 동물을 해부실험하는 것은 금지하는 경우가 많다.

장하나 의원이 국회 입법조사처에서 제출받은 해외입법사례를 보면, 스위스·노르웨이·네덜란드·덴마크는 중·고교의 동물 해부실험을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대만은 중학교 이하 학생들의 동물실험을 막고 있으며, 미국은 올해 기준으로 17개 주와 워싱턴DC에서 초·중·고 학생들이 직접적인 동물해부 대신 대체물을 선택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인도는 대학에서의 동물 해부실험을 금지하고, 해부 시뮬레이션 프로그램으로 관련 교육을 진행하도록 하고 있다. 영국은 대학생 이하 학생들이 척추동물에게 통증이나 고통을 줄 수 있는 학습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대학에서 이미 독성 여부가 확인된 물질을 사용해 동물을 죽이는 실습을 하고 있다.

국내 초·중·고에서는 동물 생체실험에 대해 아무런 가이드라인도 마련돼 있지 않다. 실험동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지침은커녕 동물실험 후 발생한 사체들의 처리 기준도 없다.

동물보호법에 따라 연구소나 기업 등이 최소한 법적 테두리 내에서 동물실험을 실시하고 있는 것과 달리 초·중·고의 동물실험은 무법지대인 셈이다. 동물보호법상 동물실험기관으로 지정되면 실험동물의 보호와 윤리적 취급을 위해 동물실험윤리위원회를 설치·운영하도록 하고 있지만, 초·중·고는 상업적·반복적으로 실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동물실험기관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한창 생명 감수성이 형성되는 어린이와 청소년 시기에 교사의 주도하에 동물의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교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 손 놓은 정부부처, 뒤늦게 연구 추진

초·중·고 동물실험의 ‘무법’ 상황에 대해서는 정부도 문제인식을 공유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분위기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초·중·고의 동물실험 제한을 위해 교육부와 협의 중이라고 밝혔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초·중·고 학생의 살아 있는 동물 실험을 제한하고, 대체학습(영상자료·모형 등)을 통해 동물 습성과 동물 보호·이용에 대한 윤리적 식견을 넓힐 수 있는 학습과정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교육부는 “초·중학교에서 살아 있는 동물 실험을 금지하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나, 대학교에서 수행할 전문과정을 위한 고교의 선행학습에 대해서는 동물실험 금지 예외 적용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현재 농식품부는 동물실험을 대체할 모형·동영상을 개발해 보급하기로 하고, 2017년에는 미래창조과학부·교육부·식품의약품안전처와 함께 ‘실험동물의 보호 및 이용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하기 위한 연구용역도 추진할 계획이다. 장하나 의원은 “초·중·고에서 동물 생체실험이 무분별하게 이뤄지고 있지만 정부는 손을 놓고 있는 상태”라며 “청소년들의 생명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교육부와 환경부, 농식품부는 적극적으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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