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아픈 삶을 관통하는 날선 질문이 시(詩)"

2015. 9. 14.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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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문정희 시인이 생각에 잠긴 채 서울 강남구 봉은사 경내를 걷고 있다. 2015.9.14 kjhpress@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여성적 생명주의' 시 세계를 구축해 온 문정희 시인은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여성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2015.9.14 kjhpress@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 시인의 시집은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지에서 발간됐다. 2015.9.14 kjhpress@yna.co.kr

(서울=연합뉴스) 신재우 기자 =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말한다.

마음에 드는 시집을 골라 친구와 연인에게 선물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를 읽는다는 건 어색한 일이 되고 말았다.

팍팍하게 돌아가는 일상에서 아프고 쓰린 마음을 시에서 위로받을 법도 한데 시는 오히려 점점 일상과 멀어졌다.

시를 읽어도 삶은 흘러가고 읽지 않아도 삶은 돌아간다. 그런데도 시는 끊임없이 생산되고 시인은 살아있다. 시는 무엇이고, 시인은 왜 사는가.

문학의 계절을 맞아 문정희 시인을 만났다.

◇ 칠순을 앞둔 '문학소녀'…동아시아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문정희 시인은 진명여고 시절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며 미당 서정주로부터 '천재 문학소녀'라는 극찬을 받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3세 되던 1969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47년간 꾸준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

'찔레', '남자를 위하여', '아우내의 새', '응', '다산의 처녀' 등 다수 시집을 펴냈다. 여성성과 일상성을 바탕으로 한 특유의 시적 에너지와 삶에 대한 통찰로 문단과 독자 모두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인생과 사회를 통찰하는 시인의 깊은 눈은 해외에서도 주목한다. 2010년 스웨덴 노벨문학상 수상시인 헨리 마르틴손 재단이 수여하는 '시카다상'을 받은 이후 문정희는 세계 각국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프랑스, 독일, 스페인, 인도네시아, 러시아 등지에서 11개 국어로 13권의 시집이 발간됐다. 대부분 국가에서 문정희의 시집은 동아시아 여성이 출판한 최초의 시집이다. 해외에서 주목한 시 중의 하나를 꼽으라면 '유방'이다.

"윗옷 모두 벗기운 채/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끌어안는다/ 찌그러드는 유두 속으로/ 공포가 독한 에테르 냄새로 파고든다/ 패잔병처럼 두 팔을 들고/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유방암 사진을 찍는다 ……/맨살로 차가운 기계를 안고 서서/ 이 유방이 나의 것임을 뼈저리게 느낀다/ 맑은 달 속의 흑점을 찾아/ 축 늘어진 슬픈 유방을 촬영하며"

유방암 사진을 찍으면서 비로소 여자의 몸임을 확인하는 순간을 실감 나게 표현한 이 시는 "여성의 언어로 여성을 표현한 최고의 시"라는 평가를 받았다.

시인은 결혼과 출산 이후 '여성적 생명주의' 시 세계를 구축해왔는데 유방은 그 정점에 있다.

"조선왕조 500년이 다 달려들기 시작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답답했던 결혼 이후의 삶은 시인이 여성의 언어로 여성의 삶을 기록하게 만들었고, 지금에 들어와 문정희는 동아시아 여성의 삶과 생각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가로 인식되고 있다.

◇ "미당이 누리지 못한 호강 내가 대신 누려"

국내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시인을 만나니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얼른 물었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시의 미래가 있을까요" 예상을 빗겨난 대답이 바로 돌아온다. "시를 안 읽는다? 저는 아니라고 봐요"

"시가 사회 전체에 끼치는 영향력은 분명 줄었죠. 저는 미당 서정주 선생님과 36년을 함께했는데 인터넷도 오락물도 없던 시절, 미당이 차지하는 영향력과 그늘은 굉장히 컸지요. 미당과 지금의 저를 맞비교하기는 어렵지만 저는 문득문득 선생님이 누리지 못한 호강을 제가 대신 누리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터넷 덕분이지요. 많은 이들이 아침이면 카카오톡에 돌아다니는 제 시를 보내주고, 신문에 제 시가 인용되면 오후에 해외 교민이 시 잘 읽었다고 인사를 해요. 시에 대한 이런 즉각적인 반응과 사랑은 전 시대에 생각도 못했던 소통이죠."

그는 시를 볼 수 있는 매체가 많아지면서 사방에서 사랑을 받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예술의 다양화로 시의 영향력이 예전만 못해도 독자들이 쉽게 시를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의 미래는 밝다고 자신했다.

◇ "시가 독자를 배반하는 시대, 시인의 잘못이 크다"

헷갈린다. 시의 위기는 과장된 것일까. 문 시인은 "시의 미래가 괜찮다고 한 것은 잘만 쓰면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라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현실에서는 시가 독자를 배반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도 말했다. 시의 배반. 배반의 주체는 시인이란다. 시인은 많아졌지만 좋은 시를 내놓지는 못한단다.

"시는 말하자면 고급 장르에요. 고급 예술을 향유하려면 일정한 독법이 필요한 게 사실이에요. 노래방에서 신곡을 받아들이듯이 접근하면 시는 문을 열어주지 않죠. 그렇지만 현대시가 어려워지고 읽히지 않는 데에는 시인의 잘못이 커요. 언어를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면서 시인으로 데뷔를 하는데 대중이 옥석을 가리기가 어렵죠. 시를 읽으려고 해도 작품이 너무 말이 안 되니까 시는 점점 대중과 분리될 수밖에 없어요. 시가 대중을 배반한 거죠."

그렇다면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 시인은 "살면서 가장 아프고 쓸쓸하고 말이 안 되는 것은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것이 시"라고 했다.

문학의 본질은 질문이며 나와 내 세상의 갈 길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아낸 것이어야 한단다. 아픈 삶을 관통하는 날선 질문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도 어렵지 않은 것, 너무 슥 읽을 필요는 없지만 너무 독해를 요구하는 시는 좋은 게 아닌 것 같단다. "막 읽어도 느낌이 막 와야지 좋은 시 아니겠어요?"

시는 왜 필요할까. 이 시대에 시를 읽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한 사람이 제대로 된 언어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시와 문학이 필요하다고 설명한다.

인간은 언어로 존재하는데 사유하는 언어를 쓰기 위해서는 독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학을 읽는 것은 자기 언어를 만드는 최고의 수단이라고 강조했다.

"사유는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차이에요. 생각의 언어를 뱉지 못하고 몸을 유지하는 일상의 언어만 뱉어서는 안 돼요. 자신의 언어 체계와 용량을 키우고 바꿔가야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나라도 일류 국가가 되지 않겠어요? 언어의 용량을 키우려면 독서밖에 없어요. 전적으로 독서에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 "언어를 바꾸지 않으면 온 사회가 흙탕물이 돼"

문정희 시인은 지금은 내면의 언어를 회복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또 그것이 문인이 이 시대에 해야 할 사회적 역할이라고도 했다.

TV에서는 무기의 언어, 폭력의 언어로 점철된 끝없는 수다가 이어지고, 한국 사람들은 어느 순간 사유어를 멀리하고 '살 빼라', '먹어라', '배고파'와 같은 일상어만 쓰고 있다는 얘기다.

"언어를 바꿔야 합니다. 나쁜 언어는 사회 전체를 흙탕물로 만들어요. 흙탕물의 언어, 겉도는 언어가 판을 치면 나라에 미래가 없어요.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의 언어를 사유어로 바꿔야 합니다. 그간 너무 먹고 사는 것, 경제 발전에 집중하다가 좋은 가치를 잃어버린 것 같아요. 사회에서 가치가 바로 서고 새로운 철학이 나와야 해요. 인문학이 붐인 것처럼 보이는 것도 새로운 철학, 새로운 아젠다에 대한 기다림 때문이 아닐까요."

한국시인협회 회원들이 지난봄에 경기도 여주에 있는 세종대왕릉을 찾아 시낭송 대회를 열었다. '내면의 언어를 회복하자'는 뜻에서였다고 한다.

시인들은 무기의 언어를 악기의 언어로 바꾸자는 의지로 세종대왕 앞에 섰고 거기서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서정주의 '푸르른 날' 등 한국의 대표시를 합창했다.

◇ "내가 쓴 작품과 경쟁하고 싶다"

시인의 꿈은 무엇일까. 고교시절 시집 '꽃숨'을 내놓으면서 문단의 전설이 됐고, 미당을 만나 운명적으로 시인의 길을 간 여성.

한국에서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사랑을 받는 작가이자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서정주, 김춘수 등 한국 현대시의 거장들이 회장을 두루 거쳤던 한국시인협회의 회장. 문정희에게 남은 꿈은 뭘까. 시인의 꿈은 '새로운 시'다.

"과거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이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저는 당대 유명 시인이나 작고한 시인의 작품과 겨루고 싶다는 생각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썼던 작품과는 경쟁하고 싶거든요. 새로운 시, 그게 참 어렵네요. 시는 새로워야 해요. 새로 썼다면 새로워야지 반복할 필요가 없거든요. 시간이 흐르면서 창작에 대한 절박한 열정이 옅어진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결핍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위험과 모험이 도사리고 있는 여행은 절박한 갈증과 신선함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수단이죠."

시인은 "시가 전신(全身)을 요구하지, 뭐 하는 틈에 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더라"고 했다. 어린 시절 소설, 산문, 극본 등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터라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작품 활동을 꿈꾼 적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른 활동이 많아지면 시는 반드시 함량이 부족해진다고 한다. 시는 '요물'임을 알았으니 정진밖에 길이 없다고 말했다.

문정희 시인은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지난 47년간 그에게는 천재 문학소녀, 관능의 시인, 생명주의 시인, 자유의 시인 등 수많은 수식어가 따라다녔다.

"어떻게 불리는지는 제 소관은 아니겠지요.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한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의 언어를 구사한, 젠더로서의 여성의 언어를 사용한 첫 번째 시인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어요."

withwi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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