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손병호] 한 좌파 정치인의 일상

2015. 9. 14.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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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노동당 새 당수 딸깍발이 제러미 코빈, 귀족화하고 신념 바꾸는 우리 정치인과 대조

12일(현지시간) 영국 노동당의 새 당수가 된 제러미 코빈(66) 의원은 유럽의 가장 강경한 좌파 정치인 중 한 명이다. 그의 당선은 꼭 진보적 노선이나 공약 때문만은 아니다. 가디언과 BBC방송 등 현지 언론들은 일관된 철학, 근검절약 정신, 금욕적 태도, 약자에 대한 관심 등 코빈이 보여 온 남다른 삶의 태도가 당선에 큰 몫을 했다고 분석했다. 이는 진보 진영 국회의원들조차 귀족화되거나 또 자주 신념을 허무는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크게 대비되는 모습이다.

코빈은 현장 중심 정치인이다. 빈자와 서민, 노동자, 대학생, 난민, 약소국과 관련된 주요 집회에는 늘 그가 있었다. 과격한 목소리에 영국 주류 언론이 그를 인터뷰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지만 코빈은 40여년을 고집스레 약자 편에 서는 ‘원칙’을 지켜냈다.

그는 평생 자동차 없이 지냈다. 대신 걷거나 자전거를 탔다. 영국에서 수십년째 ‘비용을 가장 적게 쓴 의원’ 1위로 기록돼 있다. 의원이 됐지만 ‘서민정신’을 잊지 않기 위해 양복 대신 주로 셔츠와 면바지, 점퍼를 입고 다녔다. 코빈은 런던 중심가인 트래펄가 광장에서 밤늦게 집회가 끝나도 구태여 런던 변두리 단골식당을 찾아가 빵에다 허머스(병아리콩 소스)를 찍어먹는 소박한 식사를 즐겼다. 부의 재분배와 부자들에 대한 세금 확대를 줄기차게 외쳐온 철학의 연장선상이다. 그는 현재 멕시코 출신의 셋째 부인과 사는데, 칠레의 망명자 출신인 둘째 부인과는 아들의 사립학교 입학 문제 때문에 헤어졌다. 코빈은 비싼 사립학교 입학을 강하게 반대했다.

코빈은 스무 살부터 채식주의자로 살아왔다. 동물 학대를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한 게 계기였다. 취미는 텃밭에서 기른 과일로 잼을 만들어 먹는 것이고 평생 술을 마시지 않았다. 대마초도 안 피웠다. 현지 언론은 “코빈이 아마 기성 권력에 대한 저항의 상징인 대마초를 피우지 않은 유일한 좌파일 것”이라고 묘사했다. 좌파 기상학자인 그의 형 파이어스 코빈도 현지 매체 더선과 인터뷰에서 “동생은 정말 시골 사람처럼 소박한 삶을 이어왔다”고 말했다.

코빈은 국제 이슈에도 관심을 잃지 않았다. 이라크전을 일으킨 미국과 영국을 범죄국가라고 비난했고, 팔레스타인을 탄압한다며 이스라엘을 제국주의 국가라고 불렀다. 국제사회가 테러단체로 규정한 아일랜드공화국군(IRA),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의 무장단체인 하마스와 헤즈볼라와도 대화하려 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에도 강하게 반대했다. 남미와 아프리카 등 빈국들에 대한 애정도 컸다.

코빈은 정치도 참 열심히 했다. 노동당 당원일 때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당사와 집회 현장에서 보냈다. 남들이 다 퇴근한 밤에도 혼자 복사기를 돌리면서 자신의 주장을 담은 팸플릿을 찍었다. 5년을 함께 산 첫째 부인과는 낮에는 집회 참석 때문에, 밤에는 복사하느라 외식 한번 하지 못했던 게 이혼 사유 중 하나였다. 아들을 낳는 날조차도 그는 부인이 입원한 병원 노조를 찾아가 강연했다.

정치인으로서 투철했지만 그는 계파를 안 만들었고, ‘인기정치’와도 거리를 뒀다. 당권에 도전하면서도 당론을 500번 거부한 원칙주의자였다. 무엇보다 40년간 ‘벤치워머’였던 그는 3개월간의 경선 과정에서 인기가 록스타급으로 치솟아 흥분할 수도 있었지만 예상과 달리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 BBC는 그런 몸에 밴 ‘겸손하고 낮은 행보(low-key)’가 코빈 열풍의 또 다른 축이었다고 분석했다.

손병호 국제부 차장 bhs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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