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초월 라이벌] '독거미' 자넷 리 vs. '마녀' 김가영..최고의 당구스타는

김용일 2015. 9. 7. 0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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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여자프로당구협회(WPBA) 현 세계랭킹 1위 김가영(왼쪽)과 전 세계랭킹 1위 자넷 리. 스포츠서울 DB
[스포츠서울 김용일기자] 여제(女帝)는 ‘여자 황제’를 일컫는다. 스포츠계에서 여자 선수가 두각을 보이면 해당 종목의 여제로 표현하는 일이 잦다. 다만 여제는 그야말로 1인자를 일컫는다. 오로지 한 명에게만 붙는 수식어다. 그러나 ‘예술의 스포츠’로 불리는 당구에선 여제가 꼭 한 명으로 좁히기 어려울 수 있다. 한국 당구가 낳은 최고의 슈퍼스타인 ‘검은 독거미’ 자넷 리(45)와 ‘작은 마녀’ 김가영(33)을 거론한다면 말이다. 띠동갑의 나이 차이인 둘은 각각 1990~2000년대, 2000~2010년대 세계 여성 당구계를 주름잡는 거인이다. 특히 포켓 부분에서 불과 같은 열정으로 자신과 싸움을 이겨내며 오랜 기간 세계 정상을 유지했다. 1994~1995년 자넷 리가 세계여자프로당구협회(WPBA) 랭킹 1위를 차지하며 주목받았다. 20년이 지난 2015년 현재 김가영이 바통을 이어받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있다. 5일 중국 롄윈강에서 열린 2015 중국당구연맹(CBSA) 롄윈강 국제9볼오픈 여자부 결승에서도 세계랭킹 21위 첸쉐(중국)를 11-6으로 따돌리고 시상대 맨 위에 올랐다. CBSA 국제9볼 통산 3번째 우승이기도하다. 점수로 따져도 왜 그가 세계 1인자인지 알게 한다. 1986세트 득점을 기록한 그는 1490세트를 득점한 2위 첸세밍과 격차가 무려 500점 가까이 난다. 둘은 은연중 당구에 꽂혀 큐 하나에 인생을 가꿔 왔다. 세계 정상에 오른 것은 물론, 슬럼프를 이겨낸 흔적도 비슷하다. 시공을 초월한 라이벌로 불릴 만하다.
2009년 서울에서 열린 제작발표회 때 당구묘기를 뽐낸 자넷 리. 이주상선임기자 rainbow@sportsseoul.com
◇‘과학고 모범생’ 자넷 리, 당구에 빠지다
1971년 7월 9일 뉴욕 브루클린 출생인 한국계 미국인 자넷 리는 미국 동부의 명문으로 불리는 브롱스과학고등학교에 다닐 정도로 모범생이었다. 그가 당구를 알게 된 계기는 18세 때다. 폴뉴먼과 톰 크루즈 주연으로 포켓볼 영화인 ‘칼라 오브 머니’를 보고 나서다. 이 영화는 미국 전역을 당구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했는데, 자넷 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의 한 컴퓨터 회사에서 파트 타임으로 근무했는데, 직장 동료와 우연히 당구장을 찾았다. 할아버지뻘의 한 백인이 세상 근심을 잊은 채 당구공에 몰두한 채 큐를 들고 테이블에서 고심하는 모습을 봤다. 이제까지 그가 느낀 할아버지 세대는 한 가정에서 손자, 손녀와 스스럼없이 놀아주거나 애완견에 빠진 친근한 존재였다. 또 각종 모임에서 시원한 맥주를 들고 너털웃음을 짓는 무리 중 한 명이었다. 무언가에 빠져 경건한 마음으로 장시간 몰입하는 것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백발이 될 때까지 무언가에 고민하게 하는 당구란 세계는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당구는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파트 타임 일을 마치면 하루 10시간 이상 당구장에 살았다. 새벽 3시가 될 때까지 큐를 놓지 않았다. 일상에서도 손가락에 테이프를 감고 큐 모양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의 변화에 가장 노심초사한 건 부모다. 늦은 시각에 귀가하는 딸을 걱정하는 건 물론, 모범생의 길을 걸었던 그가 당구장에서 살 줄 꿈에도 몰랐단다. 자연스럽게 당구에 빠진 자넷 리와 학업에 정진하기를 원한 부모는 갈등을 빚었다. 부모의 바람대로 대학에 진학했으나 그의 마음은 여전히 당구장에 가 있었다. 결국 부모는 자넷 리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당구의 길을 허락했다. ‘공부 좀 했던’ 자넷 리는 뒤늦게 당구를 업으로 삼자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밥만 먹고 당구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번은 37시간 연속으로 큐를 놓지 않았다. 일주일간 몸살로 쓰러졌다. 프로에 입문한 1993년 1월. 처음 당구를 배웠을 때처럼 손가락에 테이프를 하며 세월을 보냈고, 정확한 샷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대표적인 ‘멘털 스포츠’인 당구에 도움이 되도록 학창 시절보다 더 다양한 서적을 읽고 클래식을 즐겼다. 그에게 기본기를 전수한 건 한국 남자 당구의 선구자인 고(故) 이상천 전 당구연맹 회장이다. 당시 프로 당구 본고장인 미국에서도 유명했던 그는 자넷 리에게 공의 강약 조절과 운동 방향 등을 지도했다. 자넷 리의 뛰어난 두뇌와 열정은 당구 입문 1년 만에 WPBA 챔피언십 우승이란 결과물을 만들었다. 카슨 트윈시리즈클래식과 샌프란시스코클래식, US오픈 9볼 챔피언십 등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전성기를 알렸다. 그해 단숨에 세계 포켓 랭킹 1위로 올라섰으며 꾸준히 세계 정상을 지킨 끝에 1998년 WPBA 올해의 선수상을 차지했다. 최대 위기는 1999년 12월 목뼈 탈골로 4차례 수술을 받았을 때다. 13세 때부터 선천성 척추측곡(척추가 휘는 증세)으로 고통을 받았다. 당시 척추를 바로잡는 수술을 한 뒤 금속막대를 이식해 지탱해왔다. 그러나 지속해서 척추에 무리가 가는 당구를 한 탓에 목까지 탈이 났다. 수술 이후 6개월여 독하게 재활에 매진했고 2000년 6월 말 WPBA 순회대회인 캘리포니아 클래식에서 5위를 차지하며 복귀했다. 2001년 아키타 월드게임, 2003년 레이디스챔피언스, 2004년 애틀란타 챔피언십을 우승하면서 다시 정상에 올랐다.
2015 중국당구연맹(CBSA) 롄윈강 국제9볼오픈 여자부 결승에서 우승한 김가영. 제공 | 대한당구연맹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당구 여자 싱글 매치 8풀볼에 참가한 김가영. 스포츠서울DB
◇당구장 집 딸 김가영, 사명감으로 우뚝 서다
자넷 리가 당구와 운명적으로 만났다면, 1983년 1월 13일생인 김가영은 유도와 당구선수 출신인 아버지 김용기(65)씨가 인천에서 당구장을 운영하면서 자연스럽게 인연을 맺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큐를 잡았는데, 처음엔 사구와 스리쿠션을 배워 손님인 대학생 오빠와 당구공을 쳤단다. 포켓으로 전향한 건 1997년 중학교 2학년 때다. 이틀 연습하고 출전한 포켓볼 대회에서 우승했다. 이후 국내에선 그의 적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반인 2001년 18세 나이에 당시 세계 랭킹 1위인 류신메이를 배출한 당구 강국 대만으로 떠났다. 어린 나이에 마주친 낯선 타국이었으나 하루 4시간을 자며 연습에 몰두했단다. 6개월 만에 류신메이와 상대해 이겼다. 2년 뒤 프로로 거듭나고자 미국으로 떠났다. 대만과 다르게 스타 플레이어가 득실하고, 텃세가 심한 당구의 본고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한국 여자 선수 개척자라는 사명감에 쉽게 포기하기도 어려웠던 만큼 인고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를 더 강하게 만들었다. 미국 정착 1년 만인 2004년 US오픈 준우승을 차지했다. 한껏 물오른 그는 2004년과 2006년, 2012년 세계선수권을 연달아 제패했다. 2009년엔 US오픈에서도 마침내 정상에 섰으며, 2011년 암웨이컵과 올해 차이나오픈에서도 우승하며 4대 메이저 타이틀을 휩쓸었다. 세계풀당구협회(WPA)와 WPBA 모두 랭킹 1위로 올라서는 기쁨을 맛봤다. 또 2006년 도하,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해 은메달을 목에 걸어 국내 남녀 당구 선수 중 유일하게 연금 혜택을 받고 있다.
한 걸음씩 올라선 그의 당구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슬럼프를 안긴 건 경기 외적인 부분이었다.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 이후 당구계 ‘얼짱’ 열풍이 불면서다. 후배 선수들이 예쁜 외모를 앞세워 자신보다 유명해지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에 상처받았다고 한다. 그는 당시 국내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외모에만 주목하는 한국 당구계 현실에 실망해서 성형수술에 대해 고민도 했다”고 털어놨다. 한때 얼짱으로 유명해진 일부 선수들과 맞대결을 벌인 적이 있는데 수많은 취재진이 몰려와 집중력을 잃고 패한 적도 있다. 홀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운 적도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위기를 넘긴 것도 오로지 당구에 대한 열정이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빨리 다잡은 그는 다시 큐에 집중해 세계 정상으로 군림. 얼짱 열풍 이후 사라진 당구 스타와 다르게 여전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닮은꼴 라이벌…‘정신력’ 자넷 리-‘기본기’ 김가영
자넷리와 김가영. 한 시대를 풍미했고, 풍미하고 있는 두 스타가 맞대결을 벌이면 누가 웃을까. 실제 둘이 큐를 잡고 국내, 외에서 겨룬 적은 있다. 지난 2007년 춘천에서 열린 엠프리스컵에서 만나 자넷리가 이긴 적이 있고, 2년 전 콜롬비아에서 열린 칼리월드게임 당구 16강에서 김가영이 자넷 리를 누르고 8강에 오른 적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벤트성 대회다. 자넷 리는 2000년 중반 이후로 육아와 남편 내조 등 가정에 충실하며 사실상 전성기 때처럼 훈련에 임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구계 큰 인물인 자넷 리를 초청해 대회를 여는 일이 잦았다. 당구를 통해 새 삶을 산 그 역시 성적에 관계없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렇다면 1990년대 자넷 리와 현재 김가영이 나란히 큐를 잡고 맞서는 상상을 해보면 어떨까.
세계 최대 당구 콘텐츠 회사인 코줌코리아의 대표인 오성규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둘이 워낙 닮은 선수여서 비교하기 참 어렵다”고 했다. 정교하게 힘을 이용한 스트로크와 흔들리지 않는 디펜스, 뛰어난 위기관리 능력 등 당구에 필수적인 세 가지 요소가 비슷하다. 또 김가영은 세계 정상에 오르기 전부터 자넷 리를 자신의 본보기로 삼았다. 플레이 스타일 뿐 아니라 퍼포먼스도 비슷하다. 자넷리의 트레이드마크는 유혹적인 검은 옷과 당당한 눈매, 친화적인 팬 서비스다. 김가영도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는 타이트한 검은 옷을 즐겨 입고, 카리스마가 인상적이다. 다만 오 위원은 정신력은 자넷 리, 기본기는 김가영이라고 했다. “자넷 리는 늦게 당구를 시작한 만큼 노력파라고 보면 된다. 그 안에서 세계 정상을 밟은 것에 대한 자신감과 경기 중 리액션이 눈길을 끈다. 미국에서 자라난 문화 덕분인지 대회 자체를 즐기는 편이다. 100명이 참가한 대회라면 초반부터 99명을 이끄는 게 자넷 리다.” 또 “김가영과 상대했을 때 팽팽한 접전으로 이어졌다고 해보자. 마지막 한 샷을 두고 엇갈린다면 여유를 지닌 자넷 리가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반면 초반 김가영이 우세한 경기 흐름을 지녔다면 쉽게 자넷 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김가영은 당구를 하신 부모의 영향으로 포켓 선수로는 드물게 사구와 3쿠션을 어릴 때부터 익혔다. 다른 포켓 선수가 2~300을 해내면 5~700을 하는 편이다. 그만큼 기본기는 탁월하다. 초반부터 승기를 잡고 나가면 누구도 이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강조했다. 둘은 지난 2007년 전남 나주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빌리어즈 챌린지에서 이벤트성으로 열린 트릭샷에서 맞대결을 벌인 적도 있다. 당시 김가영이 자넷 리에 3-2로 이긴 적이 있는데, 경기 후 자넷 리는 “묘기 당구로 김가영을 이길 자는 없다”고 말했다. 그만큼 기본기를 앞세운 당구에서 김가영이 강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MBC 예능프로그램 댄싱 위드 더 스타에 출연한 적이 있는 자넷 리(위)와 김가영. 캡처 | MBC 댄싱 위드 더 스타 방송
◇당구를 넘어선 ‘팔방미인’…제2 삶도 라이벌이다
둘의 또 다른 공통점은 당구를 넘어 연예계에서도 주목받는 팔방미인이란 점이다. 나란히 댄스스포츠를 테마로 한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양한 팬층을 얻었다. 섹시한 자태를 내세운 화보 촬영에서도 인기를 끈다. 오 위원은 “다른 종목에선 ‘외도’로 여겨 좋지 않게 볼 수 있으나 당구에선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당구의 대중화에 있어 두 사람이 시대를 거스르며 한 역할은 매우 크다. 사실상 당구의 얼굴인 두 사람이 다양한 영역에서 재능을 뽐내고, 본업에서도 꾸준히 기량을 보이는 건 당구 종사자에 대한 새로운 눈을 뜨게 하는 것이다.” 당구의 프로 문화를 보급한 것도 자넷 리와 김가영이다. 오 위원은 “자넷 리는 (프로에 입문하기 전부터)일찌감치 프로라는 마음을 지녔다. 당구를 통해 최상의 서비스를 팬들에게 보이겠다는 마음으로 다양한 분야의 사람을 만나고, 공부했다. 2년 전 칼리월드게임 때 만나 콜롬비아 시내 한 당구클럽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사람들이 큐를 놓고 아직도 자넷 리를 보기 위해 몰려들더라. 항상 친절하고 서비스에 충실한 것을 보고 이게 당구계에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고 전했다. 자넷 리가 결혼 15년간 아이를 갖기 위해 노력했으나 수차례 임신에도 유산하는 아픔을 겪은 끝에 3년 전 유럽투어 중 첫 아이를 얻은 건 유명한 일화다. 일생일대의 중대한 순간에도 여전히 큐를 놓지 않았다. 이전에 입양과 대리모를 통해 얻은 3명의 자식까지 육아에 전념하느라 바쁘지만 여전히 ‘은퇴’라는 단어는 먼 일이다. 선수 은퇴를 하더라도 개인 당구클럽을 차려 유망주 양성에 힘쓰겠다는 의지다.
자넷 리의 제2의 삶은 전성기를 보내는 김가영에게도 또다시 영향을 끼칠 가능성이 크다. 오 위원은 “자넷 리는 선수로서 활동은 줄었으나 전 세계를 오가며 재능기부와 사회봉사활동으로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최근 국내 당구계는 중·고 선수 육성이 사실상 정체돼 있다. 많은 사람이 김가영을 보고 꼭 세계챔피언이 목표가 아니더라도 당구 자체를 즐기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즐기겠다는 마음이 늘어나지 않겠느냐. 그게 곧 한국 당구의 미래 아니겠냐. 그런 면에서 김가영은 우상인 자넷 리의 은퇴 후 행보를 참고해서 또다른 삶은 가꾸는 상상을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kyi0486@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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