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나을까, 저게 나을까" 머리 쥐어뜯는 현대인들

김소연 입력 2015. 9. 5. 04:52 수정 2015. 9. 5. 0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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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Cover Story] 풍요의 역설 '선택피로사회'

결정장애 수렁 속으로

인간 정보처리 능력 한계 넘어

아예 미루거나 포기하기 일쑤

너무 복잡해진 세태

고르다 고르다 정신적 스트레스

정작 사회현안엔 무관심 초래도

결혼식을 석 달 앞둔 직장인 김모(35ㆍ여)씨. 지난 6월 출신학교 동문회관으로 식장을 결정했지만 근접성이 떨어진다는 지인들의 충고로 식장부터 다시 알아보기로 하면서 결혼식 준비 늪에 빠졌다. 호텔과 예식장은 물론 교회와 요즘 인기라는 '작은 결혼식'을 할 수 있는 고급 레스토랑 등 다시 다양한 선택지를 쥐게 됐다. 예식장도 일반 예식홀과 야외 하우스웨딩을 전문으로 하는 곳 등으로 나뉜다. 웨딩홀 4곳을 둘러보고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다가 한 곳이 겨울 예식 할인 행사를 하는 사실을 알게 돼 간신히 낙점했지만 고민의 시작에 불과했다. 스튜디오 촬영과 드레스, 메이크업 패키지인 '스드메'를 선택하는데 각각이 비교해야 할 정보가 너무 많아 포기했다. 결혼 준비 정보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웨딩박람회도 세 차례나 가 봤지만 참가업체가 믿을 만한지 알 수 없었다. 비용이 더 들었지만 결국 웨딩플래너에게 스드메를 맡겼다. 플래너가 스드메를 3~5개로 압축해줬지만 그래도 머리가 아팠다. 한 웨딩플래너는 "1999년 호텔 결혼식이 허용된 뒤 화려함이 더해져 선택지가 크게 넓어졌다"며 "덩달아 웨딩산업도 급속도로 커졌다"고 말했다.

신혼여행지와 청첩장 주문, 예물 구입 등 아직 결정할 것이 많이 남았다. 예물 구입 채널도 요즘은 백화점, 면세점뿐 아니라 해외 직구로까지 확장됐다. 더 골치 아픈 건 혼수용품. 새로 가입한 결혼 준비 인터넷카페 세 곳에 올라온 혼수 구입 체험기를 일일이 읽어 보고 게시물 작성자에게 보낸 쪽지가 벌써 10개가 넘는다. 퇴근 후 집에 돌아와 인터넷카페 바다를 헤매느라 새벽 1시를 넘긴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2주째 수면부족이다. 김씨는 "정보를 찾으면 찾을수록 점점 더 새로운 정보가 나오더라"며 "남자친구는 인터넷 카페에 매달리는 나를 '결정장애'라고 구박하지만 이렇게 많은 선택지와 정보 속에 고민하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고 말했다. 결혼 준비 인터넷 카페에는 김씨와 같은 고민을 털어놓는 글이 하루에도 수십 개씩 올라온다.

현대 소비문화가 낳은 '선택 피로증'(Decision Fatigue)의 한 단면이다. 다양한 선택지는 풍요의 산물이지만 선택 대안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변별력은 급격히 떨어지고 선택은 더 어려워진다. 김재휘 중앙대 심리학과 교수는 "누구나 정보 과부하를 느끼면 의사결정을 미루거나 포기해 버리는 성향을 보인다"며 "'결정장애'도 선택지가 늘어난 사회 변화에 대응해 나타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일 뿐"이라고 말했다.

▦소비자 유혹하는 무한 선택지

세분화해 가는 소비자 기호와 함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업들은 선택지를 끊임없이 늘린다. 이마트가 판매하는 상품 수(SKUㆍ재고 관리 단위)는 2000년대 초반 3만~4만개에서 현재는 8만~10만개 수준으로 2배 이상 늘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기 전인 1990년대 초 국내 슈퍼마켓 상품 수가 1,000여개였던 것과 비교하면 100배 가까이 늘어났다. 스타벅스의 음료 메뉴는 2002년 40여종에서 현재 80여종으로 증가했다.

이렇다 보니 작은 물건 하나라도 꼼꼼한 정보 탐색을 통해 제품을 선택한다는 이들이 많다. 직장인 남모(32)씨는 "값비싼 유모차뿐 아니라 1만~2만원 하는 아기 빨대컵도 월령별로 구분돼 있는데다 역류 방지, 흘림 방지 등 다양한 기능성 제품이 나와 있어 한 달간 고민한 끝에 구입했다"며 "생활용품이야 어떻게든 선택할 수 있지만 보험 등 금융상품은 너무 많은 종류와 복잡한 구성 때문에 설계사 도움 없이 결정하기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특히 금융상품은 소비자가 정보 과부하를 겪게 되는 대표 상품이다. 국내에서 운용되는 펀드는 1만여개로 룩셈부르크, 프랑스 등과 함께 전 세계적으로 가장 종류가 많다(미국자산운용협회 발표 1분기 기준). 신용카드는 A카드사 한 곳의 상품만 300여가지에 이른다. 따라서 너무 많은 선택지로 혼란을 겪다 정작 중요한 정보를 놓치게 경우도 종종 생긴다. 복잡성 속에는 소비자가 쉽게 눈치채기 어려운 교묘한 꼼수가 도사리고 있다.

강모씨는 대형 온라인 쇼핑몰을 비롯해 커피전문점, 제과점 등까지 총망라해 쇼핑 금액 총액 대비 할인 혜택을 주는 카드에 가입했지만 할인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에 카드사에 항의했더니 "소형 가맹점의 경우 소비자가 일일이 구입 내역을 체크해 카드사에 할인 신청을 해야 혜택을 받을 수 있게 설계된 상품"이라는 카드사 말을 듣고 강씨는 크게 황당했다. 장거리 운행이 많아 주유 할인 카드를 발급받은 이모씨의 경우는 한 해 동안 포인트 적립이 전혀 안 돼 분통을 터뜨린 사례다. 전월 사용액이 30만원 이상 돼야 포인트 적립이 되지만 정작 주유 할인 카드인데도 주유 실적은 제외된다는 사실을 1년 뒤에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카드사 항의 과정에 약관에 나와 있는 것을 알았지만 정확한 설명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사기 당한 기분"이라고 말했다.

▦자유보다 마비…선택 사회의 역설

선택 대안의 과잉은 정보 불균형과 과다한 비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고액의 입시 컨설팅만이 아니다. 웨딩플래너와의 상담을 통해 스드메를 결정할 경우 적게는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수백만원에 이르는 전체 비용의 5~10%가 웨딩플래너의 몫이다. 이처럼 '선택 피로 사회'의 해악은 정신적 에너지 소모에만 그치지 않는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씨는 "선택은 자유보다는 마비를 야기한다"고 주장했다. "자본주의 사회의 폭넓은 선택이 삶의 질을 높여줄 거라는 환상을 심어 주지만 정작 사람들은 패션이나 인테리어처럼 돈으로 할 수 있는 개인적인 선택에만 매몰돼 선거처럼 사회를 바꾸는 선택에는 무관심해진다"는 것이다.

김소연기자 jollylif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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