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사라진 주례.. 짧아진 주례사.. 결혼식이 더 행복해진 이유

곽아람 기자 2015. 9. 5.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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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쌍중 4쌍은 주례없이 신랑·신부 서로 편지, 낭독부모님이 서로 축사하기도 '작은 결혼식' 확산에 '勢 과시용' 주례 사라져 주례사는 핵심만 간단히 일장연설 더 이상 없고 신랑·신부 의견 반영해.. 혼인서약서까지 5분내 끝 名주례사, 두고두고 회자

"당당한 듯하지만 사실 혼자 속앓이하며 상처도 많이 받는 당신을 위해 언제나 귀를 열어두고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주겠습니다. 당신을 만난 후 제 삶은 더욱 충만해졌습니다. 서로 모난 점은 보듬어 주고 빈틈은 채워주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신랑이 준비해 온 편지를 낭독하자 신부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어 신부가 신랑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했다. "마음 깊이 사랑합니다"라고 신부가 편지를 끝맺자 하객들은 박수로 이 부부를 축복했다.

지난 2월 결혼한 이모(30·회사원)씨는 '주례 없는 결혼식'을 올렸다. 주례사는 신랑 신부가 서로에게 보내는 편지로 대신했다. 식은 20분 만에 끝났다. 이씨는 "다른 결혼식을 여러 차례 가 봤지만 하객들이 주례사를 잘 듣지 않더라. 하객도, 신랑 신부도 재미없는 결혼식을 하느니 '우리 목소리'를 결혼식에 반영하는 의미 있는 결혼식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결혼식 주례 풍경이 변하고 있다. '몇 말씀 드리겠다'고 시작해 길어지기 일쑤인 장황한 주례사는 요즘 찾아보기 힘들다. 주례 없는 결혼식이 유행하고, 주례가 있더라도 주례사는 짧게 끝난다. 주례사에 예비부부의 의견도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주례 대신 부모님 덕담

지난 2003년 도올 김용옥이 딸 결혼식에서 '중용(中庸)'의 첫머리를 인용한 주례사를 직접 읽었을 때 언론은 '이색 혼례'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요즘은 주례 없는 결혼식이 대세다. 지난달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차녀 결혼식에도 주례가 없었다. 대신 김 대표가 축사를 읽었다. 지난 6월 강원도 정선의 밀밭에서 결혼식을 올린 배우 원빈·이나영 커플도 주례 없이 두 사람이 결혼 서약문을 직접 읽었다. 장순원 대한주례협회 대표는 "전체 결혼식의 30~40%가 주례 없이 치러진다"면서 "10년 전만 해도 결혼 시즌 주말엔 협회에 주례를 소개해 달라는 의뢰가 40~50건씩 들어왔지만 요즘은 10건도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전통 혼례에는 주례가 없었다. 결혼식에 주례를 세우게 된 것은 일본강점기 때 예식장에서 하는 서양식 결혼식이 도입되면서다. 결혼 문화 연구자인 박혜인 계명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서양에서 성직자들이 하던 결혼식 집전 역할을 주례가 대신 맡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주례는 신랑 집안에서 존경하거나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을 택하는 것이 관례다. 신랑의 은사(恩師)나 직장 상사 혹은 신랑 아버지의 친구 중 사회적으로 명망 있는 인사가 맡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결혼 당사자와의 친소 관계는 고려하지 않고 부모가 사회 저명인사와의 친분을 하객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주례가 '세(勢) 과시용'으로 변질됐다는 지적도 있었다.

허례허식을 줄여 결혼식의 참된 의미를 찾자는 '작은 결혼식'의 확산은 '주례 없는 결혼식'의 유행에 촉매 역할을 했다. 만혼(晩婚)이 많아지면서 결혼식 주도권이 양가 부모에서 신랑·신부로 넘어오게 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지난해 5월 결혼한 권모(32·회사원)씨는 주례사 대신 양가 아버지가 예비 부부에게 보내는 편지를 낭독하는 순서를 넣었다. 권씨는 "주례를 구하려니 우리 부부 양쪽을 다 아는 분이 없더라. 잘 알지도 못하는 분에게 덕담을 듣느니 우리 부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분들께 축복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례사 짧아지고 신랑 신부 의견 반영

주례 있는 결혼식도 변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주례사 길이가 짧아진 것이다. 결혼 정보 업체 선우의 이웅진 대표는 "장황한 주례사보다는 핵심만 간추린 짧은 주례사가 유행"이라고 했다.

주례사 내용도 주례가 일방적으로 정하지 않는다. 신랑 신부와 의논해 결정하는 '참여형'으로 변하고 있다. 오종남 전(前) 통계청장은 2003년부터 지금까지 수십 쌍의 주례를 섰다. 그는 결혼식 전에 꼭 신랑 신부에게 '자기소개서'를 써오게 한다. 그 소개서를 바탕으로 하객들에게 신랑 신부를 소개한다.

혼인서약서도 신랑 신부가 직접 작성하게 하고,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의 낭독을 들은 후 사인을 해준다. 이 모든 과정을 5분 안에 끝낸다.

오 전 청장은 "신랑 신부의 의중을 반영하지 않고 일장 연설만 늘어놓는 주례사는 '서비스 정신'에 위배된다"고 말했다. 문정경 청담더웨딩 대표는 "신랑 신부 프로필만 소개하듯이 늘어놓는 주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 했다.

혼인에서의 남녀평등을 강조하기 위해 부부가 함께 주례를 서기도 한다. 조영호 아주대 경영대 교수는 2005년부터 모두 70여 쌍의 주례를 섰다. 주례 때마다 부인 이재남씨와 함께했다. 혼인 서약은 조 교수가 하고 성혼선언문은 부인이 낭독한다. 주례사도 부부가 한 문단씩 번갈아 가며 읽는다. 조 교수는 "결혼이란 남녀가 동등하게 만나는 건데 우리나라 결혼식이 남자 위주로 진행되는 측면이 있었다. 남녀가 평등하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아내와 함께 주례를 선다"고 말했다.

감동을 준 名주례사

"베풀어줘야겠다는 마음으로 결혼을 하면 길가는 사람 아무하고 결혼해도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덕 보겠다는 생각으로 고르면 백 명 중에 고르고 고르고 해도 막상 고르고 보면 제일 엉뚱한 걸 고른 것이 됩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 책으로도 출간된 정토회 법륜 스님의 주례 법문이다.

명(名)주례는 결혼 생활의 고비를 넘기기 위한 덕목을 감동적이면서 재치 있는 언어로 충고한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아라." 지난 2010년 배우 장동건·고소영 커플의 결혼식에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읊은 칼릴 지브란의 시(詩)는 부부간의 배려를 이야기한 아름다운 문장들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은 199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배드민턴 선수 방수현의 혼인 미사에서 "사랑이 혼인의 약속을 지켜주지 않고, 혼인의 약속이 사랑을 지켜준다"고 말했다. 변덕스러운 인간의 감정을 신의(信義)로 지켜나가라는 이 말은 한동안 천주교 신자가 아닌 부부들 사이에서도 화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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