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사회' 없는 국가, '희망' 잃은 청년.."한국은 지옥이라 불려 마땅하다"

박은하 기자 2015. 9. 4.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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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같은 권위를 지닌 자가 군림하고, 개인은 노예로 사는 삶을 택하는 ‘시대정신’을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해요.”

지방사립대 휴학생 김현곤씨(19)는 지난 5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 사태를 풍자한 인터넷 게시글에서 한 단어를 보고 통쾌해 했다. ‘헬조선’. 그는 “내가 ‘흙수저’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주변을 보면 ‘망할 놈의 세상’이라는 말 정도론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고 말했다. ‘흙수저’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람을 일컫는 자조적 표현이다. 김씨 아버지는 경북 봉화에서 농사일로 한 달에 120만원 정도 번다. 김씨는 “평소 ‘힘든 사람들을 방치하는 나라는 이미 망한 것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헬조선은) 그런 우리나라의 모습을 정확하게 상징한다”고 덧붙였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는 이미 없어졌다고 봅니다. 모두가 자기 이익만 지키려 하고, 일상은 부조리로 가득차 있어요.”

국내 명문 공과대학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자 장명원씨(30대·가명)는 얼마 전 외국에서 취업 제안을 받고 마음이 흔들렸다. 계약기간은 짧았지만 매년 3억원을 지원하고 연구에만 전념케 하겠다는 조건이 포함됐다. 그는 “한국에서는 지도교수와의 관계, 정부 정책 등에 신경쓰느라 연구에 전념할 수 없다. 교수들은 대학원생을 노예처럼 부려먹으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공동체’의 붕괴는 가족·친척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장씨는 “친구들이 결혼할 때 혼수·학벌 문제에 치여 이혼까지 하는 걸 보면서 환멸을 느꼈다”며 “후대 역사가들은 지금을 대한민국 말기라 평가할 거 같다”고 한탄했다.

‘헬조선’은 ‘지옥’(헬·hell)과 한국을 뜻하는 ‘조선’을 합성한 조어다. 2009년 무렵부터 디시인사이드 역사갤러리 등에서 쓰였다. ‘14세기 헬고려’, ‘19세기 헬조선’처럼 왕조 말기 혼란상과 체제 파탄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 5월 메르스 사태를 계기로 널리 퍼졌다.

‘헬조선’이란 표현 속에는 고통과 절망, 체념과 분노의 말들이 얽히고설켜 있다. 데이터기반 컨설팅업체 ‘아르스프락시아’가 지난 1~8월까지 일베·트위터 게시물을 분석한 결과, ‘헬조선’은 미개, 탈출, 차별, 취직, 노예, 청년 등과 함께 쓰이는 빈도가 높았다. 김학준 아르스 프락시아 연구원은 “일베·트위터 이용자 모두 ‘한국은 지옥’이라고 인식한다. 트위터는 ‘구조 탓’이 지배적이다. 일베는 ‘(노력하지 않은) 내 탓’과 ‘구조 탓’이란 인식이 혼재돼 있다”고 분석했다. 차이는 있지만 “청년들을 노예로 부려 먹는 미개한 헬조선을 탈출하고 싶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헬조선’에는 지나친 노력을 요구하는 사회에 대한 조소도 담겨 있다. 지난 5월 이후 ‘헬조선’과 함께 ‘노오력’이라는 말이 누리꾼 사이에서 빈번하게 사용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어린이날 행사에서 한 말 때문이었다. 박 대통령은 “국민이 편안하게 살기 위한 노력을 계속 하다가 대통령까지 됐다”며 “간절하게 원하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준다”고 말했다. 이에 누리꾼들은 “내가 취업이 힘든 것은 온 우주를 감동시킬 정도로 ‘노오오오오오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응수했다. 김학준 연구원은 “헬조선과 노오력에 대한 반응이 자웅동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하다”며 “구조적 문제를 도외시하고 노력을 강요하는 것이 풍자의 대상이 됐다”고 분석했다.

청년들에게 지금 사회는 어쩌면 19세기 말보다 무력하다. 19세기 말은 나라(조선)는 망했지만 신분제가 해체되고 새로운 사회가 만들어졌다. 이른바 ‘국가 없는 사회’였다. 사회학 연구자 류연미씨는 “현재 한국은 사회적 관계가 해체되고 국가가 제 기능을 못하는 ‘사회 없는 국가’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헬조선’이라고 신음해도 “노력하라”는 말 외에 반응이 미약한 이유다.

‘노오력’ 말고 다른 대답이 필요할 때다.

<박은하 기자 eunha999@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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