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음의 공간, 문화 공간으로 변신하는 서울 지하상가..청년들이 내려갔다, 상가가 젊어졌다

김향미 기자 2015. 9. 4.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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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지하상가는 모두 25개

점포수가 2788개에 달한다.

쇼핑1번지 명성을 내줘야 했던

대표 상가들이 탈바꿈하고 있다.

‘청년장인’들이 운영하는

특색있는 가게로 젊은층을 끌고

프리마켓과 각종 문화 행사로

소통하며 활력을 찾고 있다.

서울의 지하엔 또 하나의 도시가 있다. 사람들은 지하철을 타기 위해 혹은 지상의 자동차 길을 피해 하루에도 몇 번씩 지하로 내려온다.

이 지하에 형성된 ‘지하상가’는 도시인들의 삶의 공간이다. 지하상가에서 밥을 먹고, 물건을 사고, 사람을 만난다. 1970~80년대 방공대피시설 설치와 지하철 개통에 따라 지하통로가 만들어지고 상가도 형성됐다. 산업화 시대 지상의 길은 자동차에 내주고 보행로를 지하로 연결한 것도 지하공간을 넓힌 계기였다.

1980년대 후반까지 지하상가는 쇼핑 1번지였다. “지하상가 점포 4~5평 정도면 보증금 500만원에 월 45만원. 같은 규모이나 목 좋은 곳은 600만원에 60만원도 나간다. 권리금은 천정부지…1000만원은 예사”(경향신문 1987년 10월5일자 <“배보다 배꼽이 큰” 서울 지하상가>)라고 전한 신문기사 내용처럼 시쳇말로 ‘잘 나가는 상가’였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부터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대형 쇼핑몰, 인터넷 쇼핑몰이 등장해 쇼핑공간이 다양화된 데다 2000년대 들어 서울시가 지상의 보행로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도로정책을 펴면서 지하상가를 오가는 유동인구가 감소했다. 특히 도심 번화가가 강남으로 이동하면서 강북권의 침체는 더 심했다. 지하상가의 운명은 ‘유동인구’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종로4가, 회현, 시청~을지로 등 서울의 대표적인 지하상가들이 최근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 이곳 지하상가들은 상권의 회복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새로운 삶의 공간으로 변화를 도모한다.

■ 종로4가 지하상가 청년가게

종로4가 사거리와 청계천 비오개다리 사이 140m 지하통로. 1977년에 조성된 ‘종로4가 혼수지하상가’는 이름 그대로 한복, 예물 등 혼수용품을 주로 판매하는 상가다. 지하철역과 연결되지 않아 주변 지하상가보다 유동인구가 적다. 지난달 31일 종로4가 지하상가에 들렀다. 상가마다 파란색 작은 간판이 걸려 있는데, 곳곳에 아기자기한 간판을 단 상점 몇 곳이 보인다. ‘청년가게’들이다. 서울시 청년정책을 위탁받아 운영하는 중간지원조직인 ‘청년허브’는 2013년부터 청년들에게 장사할 공간을 만들어주면서도 종로4가 지하상가 상권을 살리겠다는 취지로 ‘종로4가 청년가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3기를 맞아 13곳의 가게가 입점해 있다. 가방, 한복, 유아용품 등 청년 장인들의 감각과 꼼꼼한 손길로 만들어낸 상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유아용품을 만들어 판매하는 곽은주씨(30)는 지난해 9월 종로4가 지하상가에 ‘온유온유’라는 가게를 열었다. 아이 잠옷, 침구 등 아이방 꾸미기 테마에 맞춘 소품들을 손수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그는 “유동인구가 엄청 많은 번잡한 지하상가가 아니라서 오히려 작업하기에도 좋고 단골들이 알아서 찾아오는 공간이라는 게 마음에 든다”며 “집에서 작업하다 보면 사회생활이 단절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여기에 온 뒤로는 시야가 넓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청년가게들이 문을 여는 과정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안 그래도 장사가 안 되는데 임대료만 올려놓는 것 아니냐”며 입점을 반대하는 상인들도 있었다. 주로 단골손님을 대상으로 장사했던 상인들 입장에서는 변화가 곧 독이 될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초기 청년들과 상인들은 여러 번 만나면서 간격을 좁혀갔다. “요즘은 저희를 손주처럼 대해준다”는 게 청년들의 이야기다.

상권이 살아났다고 말하기는 이르다. 다만 조금씩 변하고 있다. 젊은층에게 맞춤 한복을 제작해주는 ‘금의재’의 박지현씨(34)는 입점 후 3개월 동안 한 벌도 팔지 못했지만, 지금은 한 달에 15벌 정도는 판매한다. 박씨는 “인터넷,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제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는데 이곳이 원단을 살 수 있는 시장이 가까워 작업 공간으로 최고”라며 “매장은 손님들을 상담하는 공간으로도 활용한다”고 말했다. 가방가게 ‘루아흐’를 운영하는 전영운씨(26)는 “종로4가 지하상가도 전주 남부시장 ‘청년몰’처럼 청년들의 개성과 작품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이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곽씨는 “우리 청년들은 일단 각자 열심히 해서 좋은 성과를 내자고 얘기한다. 그러면 상가에도, 저희 가게들에도 좋은 결과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 상품들의 진가를 알아보는 손님들, 그리고 이들의 솜씨를 문화로 지켜봐 줄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으로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 지하에 문화의 색을 입히다

시청역부터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까지 약 2.8㎞. 끊김 없이 하나로 연결된 길이다. ‘을지로 공공지하보행로’로 통칭되는 이 길은 1983년 지하철 2호선을 건설하면서 조성됐다. 과거 도심 한복판인 시청·을지로 지하에는 주변 회사원들이 자주 찾는 사무용품·인쇄·도장 가게들이 많았다. 지금도 몇몇 가게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동대문운동장은 사라졌지만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지하 주변에는 스포츠용품 가게들이 남아 있다. 이 사이에는 유리공예, 모자전문점 등 특색 있는 가게들이 자리한다.

을지로 지하공공보행로의 정글 테마존.

서울시설관리공단 제공

이 길을 조금 더 특별하게 만드는 몇 개의 지점들이 있다. 지난 7월31일 을지로 지하보도 ‘아뜨리애 갤러리’에서 청소년들이 ‘라이브페인팅’ 행사를 열었다. 아뜨리애 갤러리는 지하철 2호선 을지로 4가역과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사이 지하보도 벽면에 조성된 전시공간이다. 청소년들의 페인팅 작품은 지난달 말까지 전시됐다. 전시공간 이외에도 시청역과 을지로역 사이에 설치된 ‘피아노 계단’을 비롯해 을지로 3가역과 을지로 4가역 사이의 ‘정글 테마존’도 볼거리다. 녹색 LED조명과 동물이미지 등으로 정글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서울 을지로 지하공공보행로의

피아노 계단.

‘시간이 멈춘 보물섬’이라는 회현지하상가는 추억이 문화가 된 공간이다. 회현지하상가는 지상에 있는 한국은행과 서울중앙우체국의 영향으로 우표 및 기념화폐 수집점포가 생겨났고, 그 후 중고 LP, 오디오, 카메라, 역사 자료 등을 수집·판매하는 가게 등이 자리잡았다. 중고 LP·오디오 가게는 전국 100여개 점포 중 15개 점포가 회현지하상가에서 영업 중이다. 최근에는 아날로그의 매력에 빠진 젊은층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아날로그 페스티벌’이라는 축제를 여는 등 젊은층과 소통의 폭을 넓힌 것이다.

잠실풀장의 프리마켓.

공단은 최근 잠실지하광장에서 프리마켓인 ‘잠실풀장’을 열었다. 요즘 홍대, 강남, 대학로 등 젊은층에게 인기 있는 ‘뜬다’는 동네에서는 젊은 상인들의 ‘프리마켓’이 열린다. 단순히 물건을 사고파는 게 아니라 공연도 펼쳐지고 사람간 교류도 진행돼 문화공간으로 통한다. 비가 오거나 혹한기일 때 제한이 따르는데, 잠실풀장은 이를 극복한 공간이다. 이은애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은 “잠실풀장이 사회적경제기업, 소셜벤처, 지역상인, 청년 상인들 간에 서로 교류하고 공감할 수 있는 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단은 이달 11~12일 2회 잠실풀장을 열고, 수요에 따라 프리마켓 행사를 지속한다는 계획이다.

■ 지하상가의 미래

서울의 1호 지하상가는 1967년 12월 준공된 시청앞 새서울지하상가다. 1975년 서울 지하철 개통 이후 80년대까지 서울에는 방공대피시설과 시민들의 통행을 위해 지하보도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지하상가는 대부분 민간이 도로 하부를 개발해 상가를 조성해 장기간 운영한 뒤 해당 지자체에 돌려주는 기부채납 형태를 띠고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임대료와 권리금이 폭등하면서 갈등이 터져나왔고, 시설기준 미비·환경악화로 상인·시민들의 건강과 안전이 우려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런 문제가 누적되자 1986년부터 서울시는 1990년 지하도시계획기본안이 수립될 때까지 지하상가 신규 건설을 억제했다. 1987년에야 정부는 지하공간 개발과 관련해 건축재료 및 소방·배수·환기·냉난방시설·보도폭·출입구·천장 높이·연결통로 등에 대한 기준을 마련했다. 최근에는 횡단보도를 늘리려는 서울시와 상권의 침체를 우려하는 상인들 간 갈등이 불거졌다. 에스컬레이터 설치로 그때그때 넘어가긴 했지만 지하공간을 보행로 이상의 매력적인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을지로 지하공공보행로의 아뜨갤러리.

현재 서울의 지하상가는 총 25개로, 점포 수만 2788개에 달한다. 차현호·최준석 등 두 건축가가 쓴 책 <서울 건축 만담>(2014)을 보면 차현호씨는 을지로 지하보행로를 소개하면서 “지하개발 찬성론자들은 도시 과밀 개발에 따라 가용 토지의 부족으로 토지를 입체적으로 이용해야 하니 지하공간 개발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데, 반대 입장에 선 사람들은 인간의 공간은 지상에 있는 것이므로 최적의 보행환경인 지상을 포기하고 지하로 기어 들어가는 것은 개발을 위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맞선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울시설관리공단은 2013년 상가활성화팀을 새로 꾸리고 지하상가 변신에 공을 들이고 있다. 이한철 서울시설공단 상가활성화팀장은 “세계의 주요 도시들은 지하공간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며 “상가활성화 정책은 상권을 살리면서도 대도시에서 부족한 시민들의 공간을 만들어내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김향미 기자 sokh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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