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수대첩부터 최근 밀월까지' 온탕·냉탕 오간 韓-中 역사(종합)

입력 2015. 9. 4. 11:24 수정 2015. 9. 4. 11:5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톈안먼 성루 위에서 中열병식 보고 있는 朴대통령 (베이징=연합뉴스) 이준삼 특파원 = 박근혜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오른쪽)과 함께 3일 오전 베이징 톈안먼 성루 위에서 중국의 항일 전쟁 승리 70주년 열병식을 지켜보고 있다. jslee@yna.co.kr
시진핑 주석 부부 옆자리 앉은 박 대통령 (베이징=연합뉴스) 이정훈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이 3일 오전 '항일(抗日)전쟁 및 세계 반(反)파시스트 전쟁 승전 70주년' 기념행사를 마치고 나서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오찬 리셉션에 참석, 시진핑 주석의 부인인 펑리위안 여사 옆자리에 앉아 있다. uwg806@yna.co.kr
한·중 정상 오찬대화 (베이징=연합뉴스) 백승렬 기자 =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을 마치고 나서 오찬을 하며 대화하고 있다. srbaek@yna.co.kr

(서울=연합뉴스) 김경윤 기자 = 박근혜 대통령의 중국 전승절 기념 열병식 참석으로 한국과 중국이 우호관계를 각국에 과시했다.

양국은 지난 2천여년 동안 지금보다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했고 전쟁을 불사하며 반목의 시기를 보내기도 했다.

중국 대륙에서 세력 이동과 힘의 결집은 한반도에 직간접적 영향을 줬다.

최근 들어서는 중국의 경제 변화가 시시각각 한국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중국 통일·강성해질 때마다 한반도는 수난 겪어

양국의 관계는 고대국가 시절부터 중국 대륙에서 세력 균형이 바뀔 때마다 변동을 거듭했다.

대체로 중국에서 한 왕조가 전국적 통일을 이루거나 강력한 중앙집권제가 확립되면 한반도에 변란이 일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살수대첩'으로 잘 알려진 고구려와 수나라 간의 전쟁이다.

위진남북조 시기의 분열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수 왕조는 건국 18년 만에 고구려를 공격했으며 이후에도 대군을 동원해 총 3차례의 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2차 전쟁에서 평양성을 노린 수의 육군 30만명과 수군 4만명이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기습으로 궤멸하다시피 했다. 수나라는 반복된 대규모 원정과 내란으로 곧 무너졌다.

뒤를 이은 당은 신라와 연합해서 고구려, 백제를 공격해 멸망시켰고 이후 신라에까지 정복 야욕을 드러내며 나당전쟁을 벌였다.

13세기에는 '최고의 쇠로 만든 사람'이라는 뜻을 지닌 톄무진이 몽골을 통일하고 중앙아시아, 인도 인더스 유역, 남러시아까지 이르는 대제국을 만들었다.

전 세계를 정복할 기세의 몽골제국(원나라)은 고려까지 공격했다.

고려는 기마민족인 몽골족을 피해 수도인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했지만 수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패하고 몽골 치하에 들어간다.

고려인은 거란·여진족과 함께 3등 국민으로 분류됐고 고려는 원나라의 공주와 혼인하는 부마국으로 전락했다.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은 명나라를 견제하면서 조선을 두 차례 공격했다.

이미 임진왜란으로 타격을 입었던 조선은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피폐해졌다.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결국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를 행한다. 이 '삼전도의 굴욕'은 역사상 가장 큰 치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 중국 한국전쟁 참전 후 등 돌려…'수교 23년' 지금은 밀월관계

항일운동 시기에 연대했던 중국과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급속히 소원해졌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고 이듬해 '항미원조'를 외치며 한국전쟁에 참전하면서 한국과 중국은 완전히 등을 돌렸다.

한중관계는 40년 넘게 단절됐다. 그러나 1972년과 1979년에 중국은 일본. 미국과 각각 국교를 수립했고 이로 인해 국제사회 긴장이 풀리면서 한국도 1992년에 수교를 맺는다.

수교 이후 양국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한다.

여기에 최근 한중 양국은 자유무역협정(FTA)의 조기 발효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하기도 했다.

한중수교 공동성명에 서명한 지 한 달 만에 노태우 전 대통령은 중국을 방문했고 1994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이 중국을 찾았다.

이듬해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이 방한하기도 했다.

2003년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과 회담 후 '전면적 협력 동반자 관계'를 선언했다.

이후 양국 정상의 만남은 이번 전승절 열병식까지 수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양국은 경제 분야에서도 떼 놓을 수 없는 긴밀한 사이가 됐다.

2003년에 중국이 한국의 최대 수출국으로 부상했으며 2007년에는 한국의 최대 수입국이 됐다. 현재도 한국의 최대 교역국은 중국이다.

중국 상무부에 따르면 지난해 양국의 교역액은 2천905억 달러에 달했다.

최근 들어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한층 끈끈해졌다.

취임 후 박 대통령은 중국을 세 차례 찾았으며 2일 진행한 시 주석과의 정상회담은 6번째다.

여기에 박 대통령이 3일 전승절 열병식을 참관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우호관계는 한층 부각됐다.

외신들은 열병식 참관과 정상회담 소식을 전하며 '한국과 중국의 유대를 두드러지게 보여준다'고 표현했다.

heeva@yna.co.kr

☞ 맥심코리아, '납치·살해' 연출 화보 적절성 논란
☞ "숙청된 마원춘 '김정은 복귀 지시'에 쇼크사"
☞ '이시영 찌라시' 진원지는 기자·보좌관 동문모임
☞ '워터파크 몰카' 촬영 지시 30대, 지인에게 영상 '판매'
☞ 익사한 세살배기 난민父 "살아야할 이유 사라졌다"

▶연합뉴스 앱 지금 바로 다운받기~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Copyright © 연합뉴스. 무단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