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샤 인터뷰①]"한국과 K리그는 내 축구인생의 전부"

도영인 2015. 9. 2. 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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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에서 9시즌을 뛰는 동안 6차례 리그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샤샤. 도영인기자
[스포츠서울 도영인기자] K리그 역사에서 최고의 외국인 선수를 꼽자면 190㎝대의 큰 키와 수려한 외모로 한 시절을 풍미했던 샤샤 드라큘리치(43·세르비아)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외국인 공격수로서 K리그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99 시즌에 14년만에 외국인 선수로서 K리그 득점왕에 올랐고, 용병 최초로 K리그 통산 100득점을 돌파한 공격수다. 2002년 올스타전에서는 외국인 첫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1995년 대우 로얄즈에 입단해 수원(1998~2000년)과 성남(2001~2003년)을 거치며 9년간 K리그에서 활약한 샤샤는 ‘우승 제조기’로 유명했다. 1997년 부산의 3관왕을 이끌었고, 1999년에는 수원의 리그 2연패와 4관왕을 이루는데 기여했다. K리그에서 9시즌동안 머물며 그가 들어올린 리그 우승 트로피만 6개였다. K리그 ‘용병의 전설’로 불리는 샤샤가 2008년 이후 7년만에 한국을 찾았다. 그는 1일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가진 스포츠서울과의 단독인터뷰를 통해 K리그 활동 당시 못다한 이야기와 은퇴 후 생활에 대해 털어놓았다.

-2003 시즌을 마치고 성남을 떠난 뒤 어떻게 지냈나.
2004년 한국을 떠나 사이프러스의 한 클럽에서 6개월 정도 활동하다 부상으로 수술대에 오르면서 사실상 선수 생활을 마쳤다. 2013년에는 고향팀인 세르비아 FK보이보디나의 구단주를 맡아 1년간 팀을 운영했다. 최근에는 에이전트 등 축구와 관련된 사업을 구상중이다.

-K리그에 여전히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K리그를 떠난 뒤에도 인터넷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있다. 또한 K리그에 진출한 동유럽 출신 선수들과도 꾸준히 연락을 해왔다. 내가 뛸 때만 해도 K리그는 터프하고, 힘을 강조하는 투박한 축구가 대세였다. 하지만 이번에 와서 직접 K리그 경기를 관전해보니 많이 달라졌다. 롱 볼 위주의 축구가 상당히 줄었고, 유럽 축구와 같이 패스를 강조하는 스타일로 바뀌었다.

-K리그에서 많은 것을 이뤘지만 못 다 이룬 아쉬움이 있나.
모든 것을 이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사실 여러차례 우승을 했지만 항상 경기에서 지는 것이 싫었다. 한국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책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항상 해왔다. 아내와 아들은 나의 한국 생활을 전혀 모른다. K리그에서의 내가 어떤 선수였지를 책을 통해 우리 가족에게 알려주고 싶다.

-K리그 활동 당시 최대 라이벌은 누구였나.
포항에서 뛰었던 라데와 비교가 많이 됐다. 둘 다 세르비아 출신이라 언론에서도 주목을 많이했다. 나는 골을 넣는데 강했고, 라데는 어시스트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수차례 우승을 맛봤지만 라데는 챔피언에 오른 것이 1차례로 알고 있다.

-현역 시절에 일부 지도자들에게 ‘게으른 공격수’로 평가받았다.
사람들은 각자의 주관적인 생각이 있다. 사람마다 의견은 다르다. 나는 그러한 평가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한다. 모든 사람이 완벽하지는 않다. 축구는 단체 운동이라 팀 워크가 중요하다. 나는 동료들의 플레이스타일과 팀 컬러를 고려해서 플레이를 실행했다. 나는 스피드는 없지만 키도 크고 두뇌회전이 빠른 선수였다. 그래서 골 결정력이 좋았다.
샤샤와 그의 아들 스트라힌야. 도영인기자
-2000년 귀화를 하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나의 실수에서 비롯됐다. 한국을 대표하는 선수로 뛰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관련 규정을 잘 알지 못했다. 한국 국적을 취득하기 위해서는 세르비아 국적을 포기해야하는 상황이었다. 한국으로 귀화하면 세르비아에서의 비난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귀화를 포기했다.

-현역 은퇴 이후 코칭스태프 활동을 하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
나는 아직도 지도자 라이센스가 없다. 선수단을 이끌 자신도 없고, 머리가 복잡할 것 같다. 애초에 코칭스태프에 대한 관심이 없었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 직종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나에게는 구단을 관리하는 디렉터가 더 어울린다.

-고향팀인 FK 보이보디나의 구단주로 활동하며 느낀 점은 무엇인가.
구단주 제의를 받고 승낙을 했지만 실망스러운 일이 많았다. 나는 한국에서 대부분의 선수 생활을 하고 적응을 해서 한국 축구 시스템이 익숙하다. 체계적인 시스템 아래서 세분화된 구단 운영을 원했지만 보이보디나는 그런 구단이 아니었다. 직원들이 다들 자유롭게 일을 해서 어려움을 느꼈다. 그래서 1년만에 구단을 떠나게 됐다.

-한국과 K리그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내 인생이다. 내 축구 인생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1998년 중반까지 부산에서 뛴 뒤 아시아는 물론 유럽에서도 좋은 오퍼가 왔지만 나는 한국이 좋아서 남았다.

-아직도 당신을 기억하는 K리그 팬들이 많다. 한마디 해달라.
(한국어로) 사랑해요.(웃음) 어제 숙소로 복귀하는 택시에서 운전하시는 분이 나를 알아보더라. 속으로 울컥했다. 더 이상 선수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다.
dokun@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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