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캄캄한 암흑, 이번엔 친구가 내 손을 잡았다.. '어둠 체험'

박세환 기자 2015. 9. 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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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정비사와 시각장애 대학생, 8년지기 두 청년의 '어둠 체험'
지난 27일 ‘어둠 속의 대화’ 전시장 대기실에서 시각장애 3급인 이준석씨(왼쪽)와 8년 지기 정재현씨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전시장 내부는 빛이 전면 차단돼 촬영이 불가능하다. 구성찬 기자

지난 27일 오후 서울 종로구 가회동 ‘어둠 속의 대화’ 전시장.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정재현(20)씨가 길을 잃고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앞쪽에서 이준석(20)씨가 소리쳤다.

“나 여기 있어. 이리로 와.” 정씨는 이씨의 목소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한걸음을 내딛었다. 이씨는 1시간40분 내내 넘어지고 헤매던 정씨의 손을 잡고 출구로 이끌었다. 이씨가 “나같이 든든한 친구 없었으면 어쩔 뻔 했어”하고 너스레를 떨자 정씨는 “상황이 역전됐다”고 웃었다.

이씨는 3급 시각장애인이다. 낮에는 햇빛 때문에 앞을 거의 볼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빛에 민감해 선글라스 없이는 외출도 힘들다. 그래도 배움의 끈을 놓기 싫었다. 학창 시절 맨 앞자리에 앉아 특수 망원경으로 칠판을 보며 공부했다. 남들보다 수십배를 노력한 끝에 지난 3월 고려대에 입학해 한 학기를 마쳤다.

정씨는 안경을 꼈지만 교정시력이 ‘2.0’일 정도로 건강한 눈을 갖고 있다. 선박 관련 마이스터고를 졸업한 정씨는 선박 정비사로 일하고 있다. 지난해 5월 배를 타고 나가 동남아시아와 중동을 거쳐 지난 4월 한국으로 들어왔다.

둘은 8년 전인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만났다. 수줍음이 많은 정씨에게 이씨가 먼저 말을 걸었다고 한다. 집이 가까워 항상 하굣길을 함께했다. 정씨가 가방 끈을 길게 늘어트리면 이씨가 끈을 잡고 뒤따랐다. 큰 차가 다가오거나 장애물이 있으면 “잠깐 기다리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이씨가 어머니와 만나기로 한 곳까지 데려다주고, 어머니가 늦으면 함께 서서 기다렸다. 수업 필기를 대신 해준 적도 여러 번이다. 정씨는 “준석이가 눈이 나쁜데도 저보다 훨씬 공부를 잘했다”며 “수학문제 푸는 방법 등을 준석이에게 물어봤을 정도”라며 웃었다. ‘장애’는 이들의 우정에 방해물이 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8년 우정을 기념해 이날 ‘어둠 속의 대화’ 전시장을 찾았다. 여기에 기자가 동행을 해 한 조를 이뤘다. 행사장 지리에 익숙한 로드마스터가 목소리로 길을 안내했지만 사방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빛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시각은 작동하지 않았다. 시각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도 이 공간에선 빛과 함께 사라졌다. 되레 시각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더 자유롭게 움직였다. 앞사람을 놓친 정씨가 길을 헤매고, 허공에 손을 허우적댔다. 그때마다 이씨는 정씨를 붙잡고 길을 안내했다. 어둠에 익숙한 덕이다. 이씨는 “20년간 시력을 제외한 다른 감각을 써오다보니 이런 환경에 친숙하다”고 했다.

체험을 마친 이씨는 뿌듯하다고 했다. “햇빛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을 때마다 친구가 가방 끈을 내어주고 나를 이끌어줬던 것처럼 어둠 속에서 내가 친구를 잡아줄 수 있어 행복했다.” 정씨는 ‘차별’을 얘기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친구가 받아온 차별을 옆에서 계속 지켜봐 왔다. 이런 체험행사가 많아졌으면 한다.”

‘어둠 속의 대화’는 1988년 독일에서 시작된 국제적인 체험전시 프로젝트다. 100여분 동안 암전된 공간에서 시각을 제외한 촉각·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다. 유럽과 아시아, 미국, 아프리카 등 세계 30개국 160개 도시에서 전시행사를 하고 있다. 전 세계에서 850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곳을 체험했다.

국내에선 사회적 기업 ‘엔비전스’가 2010년 1월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전시장을 차렸다가 지난해 11월 서울 종로구 북촌에 전용관을 마련했다. 그동안 2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다녀갔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여전히 장애를 공감할 수 있는 시설이나 공간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그만큼 ‘차별의 벽’도 높다고 꼬집는다. 시각장애인 A씨(33)는 “과거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지긴 했지만 차별과 멸시의 시선이 남아 있다”며 “장애인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행사나 민간 기관이 부족해 아쉽다”고 말했다. 다른 시각장애인 B씨(22)는 “장애인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한국장학재단조차 사무직을 뽑을 때 시각장애인을 배제하고 있다”며 “국가 차원에서 여전히 남아 있는 장애에 대한 편견을 조금씩 덜어나가야 할 때”라고 했다.

박세환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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