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자연계 미물이 의료 혁명 이끈다

이영완 과학전문기자 2015. 8. 31.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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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체모방 의학, 국내외 한국인 과학자 성과 두드러져

지난 여름휴가 때 바다에서 보았던 갯지렁이와 홍합을 기억하는가. 낚시미끼나 속풀이에 쓰이기도 하지만, 워낙 흔해 눈길을 끌지 못했을 것이다. 해파리는 또 어떤가. 흉하고 해롭다고 내팽개치기 일쑤였을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에게 그들은 사람의 목숨을 구해줄 소중한 존재이다.

갯지렁이와 홍합은 물속에서도 강력한 접착물질을 분비한다. 피가 흐르는 수술 현장에서 절개 부위를 봉합할 접착제로는 안성맞춤이다. 해파리는 끈적끈적한 촉수를 늘어뜨려 먹잇감을 붙잡는다.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DNA 가닥들로 암세포를 포획하는 장비가 개발됐다.

자연 속 미물들이 수술실을 바꾸고 있다. 과학자들은 의료기기 개발에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수억, 수천만 년의 진화과정에서 최적화된 생명체에서 해답을 찾고 있다.

자연을 모방한 수술용 접착제와 조직 접합용 패치 등은 동물실험에서 이미 효능을 입증했다. 패혈증에 걸린 혈액을 정화하고 암세포를 골라내는 장치도 자연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생체 모방 의학 분야에서는 국내외 한국인 과학자들의 성과가 두드러진다. 포스텍 차형준<;사진>; 교수는 홍합 접착력에 잠자리 날개의 힘까지 더한 의료용 접착제를 개발해 동물실험에 성공했다. 하버드대 의대 이유한, 양승윤 박사도 갯지렁이와 호저를 모방한 접착제, 접착패치를 개발했다.

수술 부위 접착제 갯지렁이

자연: 갯지렁이는 바닷속에서 모래나 조개껍데기 조각을 모아 원통형의 견고한 집을 짓는다. 이때 두 가지 물질을 분비하는데 하나는 (-)전기를 띤 단백질이고 다른 쪽은 (+)전기를 띤 단백질이다.

의학: 2009년 미 유타대 연구진은 단백질 대신 (-)와 (+) 전기를 띤 두 가지 합성 고분자 물질을 이용해 의료용 접착제를 개발했다. 이달 초 하버드 의대 카프 교수와 KAIST 출신의 이유한 박사는 ‘어드밴스드 헬스케어 머티리얼스’지에 갯지렁이처럼 두 가지 접착 물질을 알갱이 모양으로 만들어 주사기로 수술 부위에 주입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알갱이들은 수술 부위에서 점도가 높아져 서로 결합했다. 동물실험을 마쳤으며 미국, 프랑스 업체들과 함께 3~5년 내 상용화를 목표로 연구 중이다.

해파리 촉수 보고 암세포 걸러내는 칩 만들어

자연: 해파리는 길고 끈적이는 촉수로 먹잇감을 잡는다.

의학: 2012년 MIT와 브리검 여성병원 공동 연구진은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암세포를 걸러내는 칩을 발표했다. 칩에는 체액이 흘러가는 미세 통로를 만들고 통로 벽을 해파리 촉수 모양의 DNA인 압타머(Aptamer)로 코팅했다. 압타머는 단일 가닥의 DNA나 RNA로, 항체처럼 특정 단백질이나 분자에만 결합한다. 연구진은 DNA 가닥이 백혈병에 걸린 세포 표면의 특정 단백질에만 결합하도록 만들었다. 해파리 촉수를 모방한 방법을 통해 기존 암세포 포획 칩보다 같은 시간에 10배나 많은 혈액을 처리할 수 있었다. 암세포 포획률도 60~80%나 됐다.

홍합 '실' 하나로 12.5㎏ 버텨

자연: 홍합은 바위에 들러붙을 때 실 모양 ‘족사(足絲)’를 내뿜는다. 파도가 치는 조건에서도 지름 2㎜ 족사 하나에 12.5㎏을 매달아도 끊어지지 않을 정도로 접착력이 강하다. 족사의 접착 단백질은 ‘다이하이드록시 페닐알라닌(dihydroxy phenylalanine, DOPA)’, 즉 도파란 아미노산으로 이뤄져 있다,

의학: 포스텍 차형준 교수는 대장균을 이용해 도파를 대량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도파를 효소로 산화시키면 아미노산이 티로신으로 바뀌고, 이들이 서로 결합해 접착력을 발휘한다. 지난달 차 교수팀은 국제 학술지 ‘바이오 머티리얼스’에 이전보다 한 단계 발전한 홍합 접착제를 발표했다. 미생물을 이용해 도파 대신 바로 티로신이 들어있는 접착 단백질을 합성했다. 여기에 빛을 쪼이면 티로신 간에 결합이 일어나 접착력을 발휘한다. 이 접착제는 도파를 이용한 접착제보다 작용 과정이 더 간단하고 접착 부위가 유연해 상용화 가능성이 높다. 차 교수팀은 동물실험을 마쳤고 2~3년 인체 대상 임상 시험을 거쳐 상용화할 계획이다.

잘 안빠지는 호저 가시처럼… '移植 조직' 고정

자연: 북아메리카 호저(豪猪)는 온몸을 덮은 가시 3만여 개로 적을 물리친다. 가시는 다른 동물에 박히면 잘 빠지지 않는다. 낚싯바늘처럼 뒤로 삐져나온 미늘이 걸리기 때문이다.

의학: 미 하버드 의대 제프 카프 교수와 KAIST 출신 조경우 박사는 2012년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플라스틱으로 호저의 가시 구조를 모방한 접착 패치를 개발했다고 발표했다. 연구진은 이베이에서 호저의 가시를 사서 현미경으로 관찰했다. 여기서 호저 가시의 미늘 구조를 확인하고 플라스틱으로 똑같이 만들었다. 인공 호저 가시는 돼지 피부에 쉽게 박혔지만 빼내려면 찌를 때보다 힘이 30배 필요했다. 연구진은 이식 조직을 고정하는 접착 패치로 활용할 계획이다.

기생충 패치 접착력, 의료용 스테이플러 4배

자연: 기생충인 구두충은 물고기의 소장에 주둥이를 찔러 넣은 후 입의 돌기 부분을 부풀려 단단하게 달라붙는다.

의학: 미 하버드 의대 카프 교수는 포스텍 출신 양승윤 박사와 함께 2013년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에 구두충을 모방한 조직 접착용 미세 바늘 패치를 발표했다. 패치에 붙어있는 미세 바늘을 조직에 찔러 넣으면 체내 수분을 흡수해 안쪽에서 화살촉 모양으로 부풀어 올라 빠져나오지 않는다. 연구진은 패치로 돼지 피부를 닭 근육에 결합했는데, 접착력이 기존 의료용 스테이플러의 4배였다. 이 연구는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으로 진행됐다.

한 해 600만명 목숨 앗아가는 패혈증… 비장에서 답을 찾다

자연: 사람의 비장(지라)은 혈액에서 병원균과 오래된 적혈구를 제거한다. 이 과정에서 ‘만노즈 결합 렉틴(MBL)’이라는 단백질이 병원균이나 병원균이 분비하는 독성 물질 표면에 있는 당 분자에 결합한다.

의학: 2011년 하버드대 와이스 연구소는 국방부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요청으로 패혈증(敗血症)에 걸린 혈액을 정화하는 장치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패혈증은 한 해 전 세계에서 60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다. 의사가 패혈증의 원인균을 알아야 그에 맞는 항생제를 처방할 수 있는데, 패혈증 환자의 70%는 원인균을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KAIST 출신 강주헌 박사 연구진은 지난해 ‘네이처 메디신’에 비장을 모방해 병원균의 종류에 상관없이 무조건 걸러내는 장치를 발표했다. 패혈증에 걸린 혈액을 정화 장치로 흘려보내면 MBL 단백질로 코팅한 자성(磁性) 나노 입자가 병원균과 독성 물질에 결합한다. 정화 장치의 한쪽에는 자석이 있어 병원균과 결합한 자성 나노 입자가 그쪽으로 몰리고, 정상 혈액 세포는 다른 쪽으로 흘러간다. 실험에서 병원균을 90% 이상 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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