脫스펙은 좋은데.. 은행 취준생 울리는 자소서

김신영 기자 2015. 8. 31.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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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용 자기소개서 문항 갈수록 난해·복잡해져] -취준생들 "엄두가 안나" 구체적 사례나 경험 중시 6000자 넘는 글 요구에 유료 컨설팅·첨삭 지도 받아 눈에 띄는 경험 없으면 20만원 내고 주문 제작도 -은행 담당자도 애로 "학력·성적 정보도 없이 채용과정 진행하려면 불가피.. 허수 지원자 거르는 효과도 분량에 집착할 필요 없어, 간결·명확한 자소서에 끌려"

"대학 안에 있는 은행 지점들은 취준생(취업 준비생)들이 너무 많이 와서 이들이 가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비교적 한가한 주택가에 있는 지점들이 이야기를 잘해준대요" "점심때나 폐점 직전엔 지점이 바빠서 싫어한다고 하더라고요. 일단 월요일 오전에 한 군데씩 가보고 다음번 모임 때 의견을 취합해보는 건 어때요?"

서울 동대문구 한국외국어대 도서관에 지난 29일 오후 이 학교 졸업생인 장모(27)씨 등 4명이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서류를 주고받았다. 이들은 최근 채용 공고가 올라온 국민은행과 우리은행에 들어가길 원하는 취업 준비생으로 이날은 서로의 자기소개서를 읽어주고 의견을 교환하기 위해 만났다.

모임에선 우리은행 자기소개서의 항목 중 하나인 '은행 영업점을 직접 방문하시고, 우리은행이 상대적으로 우수한 점과 개선해야 할 점을 비교 설명하여 주십시오'를 위해 어느 지점을 찾아가는 게 가장 유리할지에 관한 토론이 벌어졌다. 장씨는 "우리은행에 지원하려고 온라인으로 입사 지원서를 작성하다가 6000자 넘게 채워야 하는 자기소개서 항목을 보고 숨이 막혔다. 도저히 혼자서 어떻게 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인터넷 취준생 카페 등을 통해 스터디 모임을 만들어 서로 정보 교환과 첨삭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올해 하반기 은행 취업 시즌이 국민·우리은행을 필두로 오른 가운데 해가 갈수록 난해하고 복잡해지는 은행 입사 지원용 자기소개서가 올해 취업 준비생들의 가장 큰 고민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은행들이 채용 원칙으로 '탈(脫)스펙(학벌·학점·외국어 점수 등 과거 공인 자격)' '블라인드 면접' '인성에 집중' 등을 내세우면서 자기소개서 문항의 난도를 계속 높이고 있기 때문이다.

올해 은행권은 지난해보다 늘어난 약 1200명을 하반기에 채용할 예정이다. 정부의 청년 취업 확대 기조에 맞춰 은행들이 대부분 채용 인원을 늘리기로 했고 하나·외환은행은 통합이 마무리되지 않아 상반기에 뽑지 않았던 신입 직원을 하반기에 몰아서 뽑을 예정이기 때문에 지난해보다는 은행의 취업 문이 넓어졌다. 이런 이유로 '올해는 기필코 은행에 들어간다'며 취업을 노렸던 젊은이들은 지난 24일 국민·우리은행이 낸 채용 공고를 보고 인터넷 동호회 등에 한숨 섞인 글을 잇달아 올리며 자기소개서를 어떻게 작성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우리은행의 자기소개서 항목은 지난해 하반기 5개에서 올 하반기에는 6개로, 분량은 1만1000바이트(한글 한 글자는 약 2바이트)에서 1만3200바이트 이내로 늘었다. 2개 문항은 지난해와 같지만 나머지는 완전히 다른 문항으로 바뀌었다. '금융업에 대하여 정의하고 지원 동기와 입행을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왔는지 구체적인 사례를 바탕으로 말씀하여 주십시오' '지원자의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조직의 업무 프로세스를 개선하거나 성과를 낸 경험이 있다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같이 한 항목에 여러 내용을 담아야 할 경우가 많다.

은행 취업 준비생인 김모(26)씨는 "예전엔 신한은행 자기소개서 쓰기가 신춘문예만큼 어렵다고 '신한문예'란 말이 돌았는데 자기소개서 난도가 저마다 올라가면서 취준생들은 요즘 '우리문예' '국민문예' 같은 말도 흔히 쓰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은행은 올해 하반기 자기소개서 항목을 상반기 9개에서 7개로 줄였다. 정해진 항목의 분량은 총 '2400자 이내'로 우리은행보다 적다. 그러나 '국민은행의 핵심 가치 중 본인을 나타내는 가치와 그 이유를 보여주는 경험을 기술하십시오'라는 마지막 항목의 분량이 '제한 없음'인 데다, 한 항목에 여러 내용을 합쳐 놓은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난도는 상반기보다 오히려 올라갔다는 평가다.

점점 까다로워지는 은행권 자기소개서에 대응하기 위해 전직 은행 인사 담당자의 컨설팅이나 유료 첨삭 지도를 받는 준비생도 많다. 취업 준비생 이모씨는 "일단은 내 힘으로 써보려고 하지만 너무 힘들면 컨설팅 서비스를 받을까 생각 중"이라며 "전직 은행 직원에게 자기소개서 내용을 수정받고 대학 때 눈에 띄는 경험이 없는 이들에겐 약간의 가공된 경험도 추가해주는 서비스는 20만원 정도로 시세가 형성돼 있다"고 말했다. 은행권 취업을 전문으로 하는 A사의 경우 '총 5회, 6대 시중은행 중 3군데 자소서 작성 및 피드백에 20만원'같이 아예 자소서 특강반을 만들어 홍보 중이다.

은행 인사 담당자들은 자기소개서가 신춘문예급(級) 난도라는 취업 준비생들의 하소연에 대해 학력·성적 정보도 없이 채용 과정을 진행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다.

B은행 인사 담당 직원은 "은행 인사부 입장에선 어려운 자기소개서를 통해 '그냥 한번 넣고 보자'는 허수(虛數) 지원자를 가려내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C은행 담당자는 "분량을 '○자 이내'로 명시한 것이 그 분량을 반드시 다 채우라는 뜻은 아니므로, 지나치게 분량에 집착해 자기소개서를 꽉 채워 낼 필요는 없다. 인사 담당자들은 자기소개서 수천장을 읽어야 하므로 간결하면서도 자기 생각이 잘 드러나는 소개서에 끌리는 편"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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