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충돌 실험, 남성 체형으로..골다공증 진단은 여성 기준으로

김기범 기자 2015. 8. 3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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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연구에 숨어있는 성차별

과학 연구와 기술 개발에 성차별이나 성편향이 존재할까. 스웨덴 국립도로교통연구소 아스트리드 린더 소장의 답은 “그렇다”이다.

미국 고속도로안전보험협회의 자동차 충돌 실험 장면. 경향신문 자료사진

린더 소장은 지난 26~28일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가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개최한 ‘2015 아시아·태평양 젠더 서밋’에서 “자동차 사고 때 여성은 남성보다 1.5~3배 강한 목뼈 부상을 당하고 있다”며 “자동차 목뼈 부상 방지시스템이 남성 체형의 더미(실물 크기의 실험용 인형)를 이용해 충돌실험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동차 목뼈 부상 방지시스템이 남성 운전에서는 57% 효과를 나타내지만 여성은 45%만 효과를 본다”며 “유럽연합은 2009~2013년 사이 목뼈 부상 방지 시트와 충돌실험용 여성 인체모형 개발에 345만유로를 투입한 바 있다”고 덧붙였다.

스탠퍼드대 론다 슈빙어 석좌교수도 “동일한 속도로 주행하다 사고가 날 경우 여성의 부상률이 47%나 높다”며 “차량 충돌실험 때 사용된 인체 모델이 일반 남성을 기준으로 제작돼 여성은 위험에 더 노출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런 성편향 문제를 바로잡아 새로운 지식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려는 움직임을 ‘젠더 혁신’이라 말한다. 세계 과학자들이 사회적 성(性)을 뜻하는 젠더 서밋을 조직해 과학기술 분야에서 이 문제를 다루기 시작한 것은 2011년부터다. 유럽연합 중심으로 이어져온 젠더 서밋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열린 것도 올해 서울이 처음이다.

실제 성별 차이가 고려되지 않는 것은 자동차 실험만이 아니다. 보건·의학·약학 연구와 실험에서도 대부분의 기준은 남성에게 맞춰져 있다. 젠더 혁신의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슈빙어 교수는 “10여년 전 미국에서 판매 금지된 10개 의약품 중 8개가 여성에게 심각한 위험을 끼쳤다”며 “임상실험을 위한 동물실험에 수컷만 사용된 탓”이라고 말했다. 생활방사선의 피폭 기준도 남성을 기준으로 정해져 어린이나 여성은 방사선에 과다 노출될 우려도 있다.

첨단 정보기술(IT)이라 할 수 있는 구글 번역기와 애플의 건강 애플리케이션(앱)도 남성 위주로 만들어졌다가 수정한 사례다. 슈빙어 교수는 “몇 년 전 스페인어로 한 인터뷰를 구글 번역기로 번역해 살펴보니 나를 ‘He(그)’로 번역했는데 구글은 남성을 기본으로 설정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구글에 문제를 제기했고,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고 소개했다. 그는 “애플의 경우 혈압과 심장박동 수 등 건강에 관한 모든 것을 추적하는 건강 앱을 만들었다고 발표했는데 이 앱에 여성의 생리주기는 포함되지 않았다”며 “애플은 이런 지적이 나오자 앱을 개정했다”고 말했다.

젠더 서밋에서 과학자들이 젠더 혁신을 논의하는 것은 여성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슈빙어 교수는 “골다공증에 걸리는 남성의 수가 적지 않음에도 골밀도 판단은 20~29세 백인 여성을 기준으로 이뤄졌다”며 “1997년에 남성 표본이 마련된 뒤에도 남성 골다공증 환자를 진단하는 데 여성 기준이 사용된다”고 밝혔다. 세계 3대 의학저널 중 하나인 ‘더 란셋’의 아시아지역 편집장인 헬레나 왕은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불평등한 상황이 있는지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이것은 사회 전체를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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