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노갑은 물고문, 김옥두는 통닭구이.."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고명섭 2015. 8. 3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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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 이희호 평전
제3부 유신의 암흑-2회 망명
이희호 평전 다른 글 보기

[한겨레]

김대중의 예언대로, 박정희는 72년 10월17일 비상계엄령과 함께 ‘10월 유신’이란 이름으로 독재체제를 공표하고 그 첫 수순으로 ‘정적’ 김대중의 측근들을 끌어다 고문했다. 사진은 그해 11월21일 ‘유신헌법 반대운동’을 하다 체포된 신민당 의원 조연하·김상현·조윤형·이종남·김한수 등이 73년 2월2일 서울형사지법의 첫 공판장에 출두한 모습. 유신정권은 이들에게 ‘일반이적 및 반공법 위반, 공갈, 뇌물수수, 특정범죄가중처벌법’ 등을 적용해 2년의 실형을 살게 했다. <보도사진연감 74>

1972년 10월17일 저녁 광화문 앞에 전차와 장갑차가 위협하듯 진주했다. 공수부대가 완전무장을 하고 청와대 주위를 에워쌌다. 저녁 7시 대통령 박정희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생중계로 특별선언을 발표했다. 국회를 해산하고 정치활동과 정당활동을 금지하며, 헌법의 효력을 정지하고 비상국무회의가 헌법조항의 기능을 수행하며, 헌법 개정안을 공고하고 국민투표에 부쳐 확정한다는 것이었다. 이날 박정희는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헌정질서를 또다시 파괴하는 제2의 5·16 쿠데타였다.

박정희는 “우리 조국의 평화와 통일, 그리고 번영을 희구하는 국민 모두의 절실한 염원을 받들어 우리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해 중대한 결심을 했다”고 밝혔다. 민족과 조국, 통일과 평화, 개혁과 번영이라는 말들의 허울 속에서 박정희가 노린 것은 대통령 종신제였다. 계엄령은 박정희의 종신집권을 방해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협박이었다.

이날 밤 9시께 일본으로부터 동교동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도쿄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의 목소리였다. 이희호는 수화기 너머의 남편에게 말했다. “심상치 않아요. 서울에 오시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박정희는 김대중이 국내에 없을 때에만 중대 조처를 내렸다. 1년 전 비상사태를 선포할 때도 그랬다. 이번에도 김대중은 10월11일 일본으로 건너가 고관절 치료를 받고 19일 돌아올 예정이었다. 귀국을 이틀 앞두고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남편이 없는 틈을 노린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남편이 국내 없을 때마다 ‘큰일’
비상계엄령 내린 날 저녁
수화기 너머 도쿄 남편에게
“돌아오지 않는 게 좋겠어요”



가까운 이들 모두 군부대 끌려가
권노갑 물고문, 김옥두는 통닭구이
“정말 미칠 것 같았어요”
어둠의 세력 이기게 해달라 기도



두 외신기자 비밀메신저 자처
가명으로 그들에게 전화 걸고
한밤 강남 허허벌판에서 만나
남편 근황 듣고 쪽지편지 전달

“모두 고문당해 온몸 멍들었어요
더 강한 투쟁을 하시고
어디에서도 당신을 노리니
혼자 다니지 말고 음식 조심하세요”

계엄포고령 제1호가 공포됐다. 전국 대학에 휴교령이 떨어지고 언론은 사전검열을 받았다. 신문사·방송국·대학·국회의사당에 계엄군 완장을 두른 군인들이 무장경비를 섰다. 국회는 국정감사를 벌이던 중 해산당했다. “국회 해산으로 남편은 의원직을 잃었어요. 나는 비서들이 오면 몸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생활비를 조금씩 나누었지요.”

박정희는 평소 손봐주어야겠다고 벼르던 ‘악질’ 야당 의원들을 잡아들였다. 김대중과 가까운 김상현·조윤형·이종남·김녹영·조연하·김경인·박종률·강근호·이세규·김한수·나석호가 군부대로 끌려갔다. 김영삼의 측근 최형우도 잡혀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동교동 비서들은 예외 없이 직격탄을 맞았다. 권노갑·한화갑·엄영달·김옥두·방대엽·이수동·이윤수, 심지어는 운전기사까지 잡혀갔다. 권노갑은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 얼마나 맞았던지 고막이 터졌다. 물고문으로 몇 번을 까무러쳤다.

1972년 10월17일 비상계엄 선포 때 치료차 일본에 머물고 있던 김대중은 고심 끝에 망명을 결심한다. 사진은 10월18일 도쿄에서 ‘유신 쿠데타 반대’ 기자회견 때 김대중이 직접 작성해 외신기자들에게 발표한 ‘민주주의 회복을 위하여’ 초안과 수정 완성본, 영문 팸플릿 등이다. 외교관 출신 재미동포로 80년대 미국 망명 때 비서실장을 지낸 이근팔씨가 기증했다. 김대중평화센터 제공

김옥두는 자신이 당한 고문 실상을 회고록에 자세히 밝혀 놓았다. 김옥두가 잡혀간 곳은 광화문 경기여고 옆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이었다. 김옥두는 몇 시간 동안 몽둥이로 맞고 난 다음 발목과 손목이 묶이어 ‘통닭구이’ 고문을 당했다. 매달린 채로 물고문을 받다 여러 차례 정신을 잃었다. 정보부 요원들이 원한 것은 “김대중은 빨갱이다”라는 진술이었다. “각하(박정희)를 비방하는 놈은 모두 빨갱이다. 그러니까 김대중이도 빨갱이다.” 이것이 고문기술자들이 들이댄 논리였다. 김옥두가 시인하지 않고 버티자 수사관들은 머리를 시멘트벽에다 몇 번이나 패대기쳤다. 김옥두는 걸레처럼 짓이겨졌다.

고문은 며칠 동안 계속됐다. 정보부원들은 펜치로 김옥두의 손톱을 뽑고 혀를 잡아당겼다. 목이 퉁퉁 부어올랐다. 버티는 김옥두에게 정보부원이 말했다. “이 새끼는 안 되겠다. 이놈은 너무나 악질이다.” 도대체 누가 악질인지, 누가 범죄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옥두는 다시는 동교동에 발을 들여놓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8일 만에 대공분실을 나왔다. 그날 새벽 김옥두는 감시를 피해 동교동 뒷담을 넘었다. 이희호는 처참한 몰골을 보고 놀랐다. “비서들이 끌려가 그렇게 당한 것을 보고 정말 미칠 것만 같았어요. 차라리 남편이나 내가 끌려갔더라면 덜 힘들었을 거예요. 말로 표현할 길 없는 참혹한 마음이었지요.”

중앙정보부가 김대중의 측근들에게 집요하게 캐물은 것은 지난 선거 때 정치자금을 댄 기업인의 이름이었다. 정보부에 끌려간 기업인 중에 아세아자동차 회장 이문환도 있었다. 정보부원들은 70살이 넘은 노인을 발가벗겨 몽둥이로 때리고 코로 물을 부었다. “그분이 그렇게 치가 떨리는 고문을 당했다는 걸 몇 달 뒤에야 알았어요.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이었는데, 그 사실을 알고 견딜 수가 없었어요.”

이희호도 연행을 각오했다. “기댈 곳은 하느님뿐이었어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기도하면서 ‘당당하게 잡혀갈 수 있도록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지요. 그때 많이 불렀던 찬송가가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였어요.” ‘어느 민족 누구에게나 결단할 때가 있나니 참과 거짓이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이희호에게 박정희 유신 세력은 거짓이었고 어둠이었다. 이희호는 군인들이 에워싼 적막한 집에서 그 어둠의 세력과 맞서 싸워서 이기게 해달라고 종일 기도했다.

1972년 10월18일 도쿄에서 망명 성명을 발표한 김대중은 박정희의 유신헌법 제정을 ‘유신 쿠데타’로 규정하고 그날부터 일본과 미국을 오가며 목숨을 내건 ‘유신독재 반대 운동’에 앞장선다. 사진은 그해 11월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 일본 방송 <티비에스>(TBS)와 인터뷰를 하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유신 쿠데타’가 난 날 김대중은 잠을 못 이루고 밤새 뒤척였다. “서울에 두고 온 아내와 자식들, 측근과 동지들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내가 없으면 그들은 인질이나 다름없었다.” 먼동이 터오를 무렵 김대중은 망명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10월18일 김대중은 도쿄에서 ‘유신 쿠데타’에 반대하는 첫 성명을 냈다. “박 대통령의 이번 조처는 독재적인 영구집권을 목표로 하는 놀랄 만한 반민주적 조처다.” 김대중은 일본의 신문·잡지·텔레비전을 통해서, 또 집회에 참가해 박정희의 야욕을 알렸다.

김대중은 11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독재정권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는 데는 일본보다 미국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김대중은 하버드대학 교수 에드윈 라이샤워와 제롬 코언을 만나고, 워싱턴에서 상원의원 에드워드 케네디와 공화·민주 양당 원내총무를 만나 한국 정치상황을 설명했다. 컬럼비아대학, 미주리주립대학, 웨스트민스터대학, 워싱턴대학, 시카고대학을 돌며 강연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도 한국 민주주의의 죽음을 알렸다. “남편이 온갖 곳을 다니며 강연을 하고 성명을 내고 했는데, 국내 언론에는 한 줄도 나지 않았어요.” 김대중은 미국과 도쿄를 오가며 유신 반대 투쟁을 계속했다.

박정희 정권은 10월27일 헌법 개정안을 발표했다. 대통령 임기 6년에 연임제한 규정이 없는 사실상 종신제였다. 헌법 개정안은 11월21일 91.9%의 투표율과 91.5%의 찬성률로 국민투표를 통과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 치른 요식행위였으니 수치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유신헌법은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한다고 명시했다. 박정희는 마침내 대통령 직선제의 굴레에서 벗어났다. 12월13일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12월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열렸다. 2359명이 뽑혔다. 박정희의 세포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었다. 12월23일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장충체육관에서 박정희를 대통령으로 옹립했다. 2359명 가운데 2357명이 지지했다.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99.9%의 찬성률이었다. 박정희는 12월27일 제8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박정희가 다시 대통령이 된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이희호는 난방비를 아끼려고 안방에 전기담요 한 장을 놓았다. 독재의 공포가 한파처럼 스며드는 가운데 온 식구가 안방에 모여 겨울을 났다. 이희호가 이때 쓴 편지는 이런 사정을 알려준다. “정보부에서 김옥두 비서보고 ‘보일러도 못 때고 지낸다는데 사실이냐, 그렇게 돈이 없느냐’ 묻더래요. 정신적 무장이 중요하지 물질적이고 일시적인 것은 아무래도 좋아요. 국민이 다 같이 고생하는 이때에 참아보는 것도 뜻이 있다 생각해요.”

이희호는 그 무렵 한동안 남편과 연락이 닿지 않아 마음을 졸였다. “계엄령이 해제된 뒤 어느 날 외신기자 두 사람이 나를 찾아왔어요. 일본 방송 <티비에스>(TBS)의 미요시 특파원, 미국 방송 <시비에스>(CBS)의 한영도 특파원이었어요. 평소 우리와 알고 지낸 사람들이었는데, 그분들이 남편 소식을 가져왔어요.”

1972년 10월17일 박정희가 비상계엄령과 함께 발표한 유신헌법은 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91.5%의 압도적 찬성률로 통과됐다. 이어 12월27일 박정희는 장충체육관에서 8대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장기집권의 길로 들어선다. 사진은 같은 날 서울 중앙청 중앙홀에서 총리 김종필이 유신헌법 공포식을 진행하고 있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

두 사람은 이희호의 편지를 국외의 김대중에게 전해주는 비밀 메신저 노릇을 하겠다고 자청했다. 이희호와 메신저 사이 접촉은 극도의 보안이 필요했다. 언제 감시의 손아귀에 잡힐지 알 수 없었다. “공중전화를 이용해 스미요시라는 가명으로 그분들한테 전화를 걸어서 다과점이나 조용한 식당에서 만나 편지를 넘겨주었어요. 그것도 위험하니까 그 뒤에는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밤에 만나 그분들 차로 바꿔 타고 강남으로 갔어요. 그 시절 강남은 허허벌판이었어요.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차를 세워놓고 남편의 근황을 듣고 편지를 주고 국내외 정보를 들었지요.”

이희호가 보낸 첫 편지는 1972년 12월19일에 쓴 것이었다. “당신이 집을 떠나신 지 벌써 두 달이 넘었습니다. 얼마나 보고 싶고 그리운지 모릅니다. 이곳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지만 도청하는 전화로 안부 외의 말은 할 수가 없고 편지 또한 샅샅이 검열하니 우편으로 사실을 알릴 수도 없었습니다.” 이 편지에서 이희호는 비서와 측근들이 받은 고통을 전했다. “무서운 고문을 당하고 모두 몸에 멍이 들었어요. 마음속까지 시퍼렇게 멍들었어요.” 중앙정보부가 동교동 집을 얼마나 철저하게 감시했는지도 알렸다. “우리 집에서 끌려갔던 이들은 (중앙정보부가) 안방에서 나와 비서 단둘이만 이야기하고 심부름시킨 것까지도 일일이 다 알고 있으며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부의금 명단의 카피까지 그대로 그곳에 있는 것을 보았다 합니다. 안방에 도청장치가 있었던 게 사실이었나 봅니다.”

이희호는 남편에게 더 강력한 투쟁을 하라고 독려했다. “현재로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어요? 정부에서는 당신이 외국에서 성명 내는 것과 국제적 여론을 제일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 특히 미워하는 대상이 당신이므로 더 강한 투쟁을 하시고, (…) 미국이나 일본이나 혼자 다니지 마시고 음식도 조심하세요. 언제 어디서고 당신을 노리고 미행한다는 것 잊지 마셔야 해요.”

유신헌법에 따라 대통령이 된 박정희는 1973년 2월27일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했다. 유신헌법은 국회의원 선출 방법도 바꾸었다. 임기를 6년으로 하고 전국의 지역구를 73곳으로 나누어 한 지역구에서 2명을 동시에 뽑는 중선거구제를 채택했다. 여당이 모든 지역구에서 당선되는 것은 떼어놓은 당상이었다. 또 비례대표제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일괄 추천한 후보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찬반투표로 선출하는 전국구 제도를 도입했다. 대통령이 국회의원을 임명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국회의원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이 이렇게 뽑혔다. 이 국회의원 집단은 유신정우회(유정회)라고 불렸다. 국회에 파견된 박정희의 친위대였다. 이로써 박정희는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쳐 국회 의석의 3분의 2를 장악할 수 있게 됐다.

제9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민당은 유진산을 새 당수로 뽑았다. 전해 당내 계파가 분열해 둘로 쪼개졌다가 유신 쿠데타가 나자 내분을 봉합하고 유진산을 다시 얼굴로 내세웠던 것이다. 유진산의 신민당은 국민의 신망을 얻지 못했다. 국민의 관심은 김대중의 근황에 쏠려 있었다. 이희호는 남편에게 보내는 비밀 편지에서 선거 분위기를 전했다. “청중들은 김대중씨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하면서 지난 대통령 선거 때의 말이 다 맞아들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옥중에 있는 줄로 아는 이도 있어요.”

이희호는 1973년 3월11일 편지에서도 선거에 나타난 민심을 적어 보냈다. “이번 선거를 통해서 당신은 더 깊이 국민의 가슴속에 심어졌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이 당신의 이름을 팔면서 연설했으니까요. 심지어 인쇄물에까지 당신의 이름을 기입했어요. (…) 경상도에서도 당신 얘기 안 한 후보가 없대요. (이태영 박사도) 모두들 당신 문제가 궁금해서 물어오니 자연히 당신을 팔기 시작했대요. 이산가족이 남과 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김대중씨네가 이산가족이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일형 박사가 국회에 가야 한다고 얘기했대요.”

총선에서 박정희의 공화당은 전 지역구에서 후보를 당선시켜 73석을 얻었으나, 득표율에서는 유효투표의 38.7%밖에 얻지 못했다. 관권이 총동원돼 국민을 협박했는데도 유권자의 절대다수가 유신 공화당을 외면한 것이다. 억압과 공포가 아니고는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것이 유신체제였다.

글·인터뷰 고명섭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인터뷰 녹취정리 유선희 인턴기자 (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한겨레 절친이 되어 주세요! [신문구독][주주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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