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가 주는 건 먹지 마라' 안내서를 어겼다

송성영 2015. 8. 2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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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배낭여행 초보자의 인도 여행기41] 네팔 노동자가 베푼 한 끼의 식사

[오마이뉴스 송성영 기자]

 허름한 움막집에서 내게 한 끼 식사를 베푼 네팔 부부. 두 딸과 함께 생활하는 사내는 코사니에서 관광객들을 상대로 일하고 있었다.
ⓒ 송성영
산책길에서 돌아왔다. 코사니에서 버스로 30여 분 떨어진 힌두 사원을 둘러보았다. 다시 코사니로 돌아와 버스 종점에 내렸다. 도착하니 오후 1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식당에서 국수 종류인 자오민으로 간단하게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했다. 그런데 콧수염을 기른 낯선 사내가 다가왔다.

"한국 사람이시죠?"
"아, 예. 그런데요... 어떻게 한국 사람이라는 걸 알았습니까?"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고..."

코사니에 온 지 벌써 20여 일이 지났다. 그동안 엎드리면 코 닿을 만큼 비좁은 코사니 상가 바닥을 거의 매일 같이 어슬렁거렸다. 대부분 상가 사람들은 내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시 나는 관광객도 수행자도 아닌, 거지꼴로 값싼 노동자들의 식당을 기웃거리고 다니는 낯선 중년 사내였기 때문이다.

 관광객들이 도착할 무렵이면 차량들로 붐비는 코사니 주차장, 네팔 사내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일당벌이를 하고 있었다.
ⓒ 송성영
내게 다가와 말은 건넨 사람은 영어를 썩 잘하는 네팔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몇몇 친구들이 한국에서 일하고 있다며 나를 반겼다. 하지만 나는 가슴 한쪽이 뜨끔했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악덕 고용주를 만나면 어떤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지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담배를 꺼내 물고 그에게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었다.

"나도 담배 피웁니다. 당신도 나와 똑같은 비디 담배를 피우는군요."
"예, 인도 담배 비디는 값이 싸고 좋습니다."

그에게 인도의 서민들이 피우는 한 갑에 5루피 짜리 비디 담배를 건넸다. 우리는 담배 한 개비로 친분을 나눴다. 그는 호텔에서 일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호텔에 소개하거나 주변 관광지를 안내하는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와 함께 식사하고 싶었다.

"자오민 좋아합니까?"
"좋아합니다."
"저기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시죠?"
"아, 저도 점심을 먹어야 합니다. 우리 집으로 가시죠."

'낯선 사람을 따라가거나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절대로 먹지 마라'는 경고장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인도 여행 안내서에 나온 내용 중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점이었다. 잠시 머뭇거렸다. 하지만 그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었다. 곧 상가에서 멀지 않은 그의 집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만난 사내의 보금자리는 네팔 노동자들이 단체로 머무는 허룸한 숙소 뒷편에 자리잡은 움막집이었다.
ⓒ 송성영
낯선 사내의 집은 네팔 노동자들이 단체로 머무는 낡은 건물 뒤편에 있었다. 그의 보금자리는 집이라기보다 토굴 같다. 방이 두 칸인데 한 칸은 두 딸이 쓰고 있다. 다른 한 칸은 이들 부부가 쓰고 있는데 주방을 겸하고 있다. 찬장 하나 없이 가스레인지와 음식을 손질할 받침대가 전부인 주방. 두 칸을 다 합쳐도 세평이 채 안 돼 보인다. 이런 공간에서 한 달에 3천 루피의 월세로 네 식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그의 아내가 두 손 모아 반갑게 맞아 주었다. 방바닥은 황토로 매끈하게 다져 놓은 맨바닥이었다. 그 흔한 낡은 담요조차 깔려 있지 않았다. 다만 천 자루와 비닐 돗자리를 방석처럼 쓰고 있었는데 사내는 내가 앉을 자리에 그 비닐 돗자리를 깔아 주었다.

앉자마자 그의 아내가 음식을 내왔다. 네팔과 인도의 서민들이 즐겨 먹는 '달'이었다. 그의 아내는 큰 쟁반에 고봉으로 쌓아 놓은 쌀밥 위에 한국에서 먹는 카레처럼 보이는 노란 수프를 얹었다. 부드럽게 삶은 콩에 향신료인 마살라를 넣고 채소나 고기 등을 가미한 수프였다. 난감했다. 평소에는 그의 아내가 내준 양의 삼분의 일 정도로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내에게 합장하며 고맙다고 말해 놓고 밥을 덜어 놓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내는 함빡 웃으며 막무가내로 다 먹으라고 한다. 내 말을 '자신의 양식을 축내는 것이 미안해서 적게 먹으려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모양이었다. 부부의 환대에 푹 빠져 '낯선 사람이 주는 음식을 먹지 말라'는 말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저 많은 밥을 어떻게 다 먹어야 할지가 더 걱정이었다.

 네팔 부부가 내 준 음식. 네팔 사람들과 인도 사람들이 즐겨먹는 음식인 '달'.
ⓒ 송성영
"이것을 다 먹는 건 내게 무리입니다."
"걱정 마시고 다 드십시오."

그에게 하루 한 끼 먹고 나머지는 과일로 배를 채우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거듭 밥을 좀 덜어 놓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그는 여전히 막무가내로 "괜찮으니까 많이 먹으라"고 권유한다. 그는 검은 손가락으로 쓱쓱 비벼 우적우적 먹어가며 손가락으로 깔짝깔짝 먹고 있는 내게 묻는다.

"맛이 어떻습니까? 내 아내가 요리를 잘합니다."
"아, 예. 좋습니다."

사실 내 입맛에는 영 맞지 않는 음식이었다. 그런데도 맛있다고 말해줬다. 입맛에 맞지 않고 고봉으로 쌓아 놓은 많은 밥을 억지로 먹으면 분명 배탈이 날 것이었다. 스스로 '맛있는 음식이다. 맛있게 먹어라' 하고 최면을 걸었다. 이들 부부의 성의를 생각한다면 입맛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어차피 먹어야 할 것이라면 맛있게 먹기로 작정했다.

그처럼 손으로 쓱쓱 비벼 우적우적 욱여넣자 부부가 환하게 웃는다. '달'에는 양고기가 섞여 있었다. 그동안 주로 채식만 해 왔다. 하지만 고소하게 씹히는 양고기가 그런대로 맛이 있었다. 나는 그의 아내를 향해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녀는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며 다시 두 손 모아 합장을 한다.

결국, 많은 밥을 다 먹었다. 배가 불룩해지고 트림이 나왔다. 네팔인 부부는 내 모습을 아주 만족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이들 부부는 자비를 베푸는 것을 최고의 선으로 여기는 티베트 불교를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내게 한 끼 식사를 대접한 것을 큰 행복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방이 비좁아 네 식구가 생활하기 힘드시겠네요."
"네팔 노동자 대부분은 이런 방을 구하기 힘듭니다. 그들에 비하면 우리는 행복합니다. 아이들까지 데려와 공부시키고 있으니까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어려움도 견뎌낼 수 있다는 네팔 부부. 가난한 살림에도 낯선 사람에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베풀 줄 아는 그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었다. 행복이란 경제적인 형편과 상관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네 식구가 밥을 해먹고 겨우 누워 잠들 수 있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그렇지만 이들은 그 공간마저도 행복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도 빈민들의 보금자리가 그러하듯, 네팔 부부의 보금자리는 동굴 속처럼 허리를 굽혀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집에서 나오면서 두 손 모아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사내의 아내는 나보다 더 낮은 자세로 두 손을 모았다. 그녀는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누군가에게 한 끼 식사를 베푼 것에 대해 무한히 감사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있었으면 얼마간의 용돈이라도 쥐여 주고 싶었다. 그런데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4년째 인도 생활을 하고 있으며 내년 봄에 네팔로 돌아간다고 했다. 인도 생활을 하면서 돈 좀 모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는 한 달에 1만 루피도 채 벌지 못할 것 같았다.

월세 3천 루피에 생활비까지 감당하기에는 일용노동자로서 쉽지 않을 것이었다. 네팔 사내는 그나마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가족들과 함께 작은 방을 얻어 생활할 수 있다. 하지만 코사니에 사는 대부분의 네팔 노동자들은 막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아스팔트를 까는 일이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는 짐꾼 등이다.

 코사니 인근 마을 서머쉐에서 만난 네팔 짐꾼 부자. 한 개에 5루피(100원 정도)하는 빵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있었다. 인도 여행중에 아주 힘겨운 생활을 하는 네팔 사람들을 종종 만났지만 구걸하는 네팔 사람을 본적이 없다.
ⓒ 송성영
네팔 사내의 움막집에서 나와서 코사니 상가 언덕에 자리한 힌두 사원으로 향했다. 락시미 아쉬람 학교의 부럼 선생이 수행자를 꼭 한 번 만나보라고 추천한 곳이었다. 힌두 수행자 요기가 그 사원에서 지낸다고 했다. 부럼 선생이 영적 스승으로 따르고 있다는 요기는 한 겨울에도 맨발로 다녔다. 사원을 찾는 사람들의 보시금을 학교에 기부해 어렵게 생활하는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원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열댓 살쯤 먹은 인도 아이 셋이 다가왔다.

"헤이! 20루피!"
"노!"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번에는 10루피를 요구했다. 20여 일 동안 코사니에서 머물면서 거지는 단 한 명도 본 적이 없다. 녀석들은 인도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냥하는 거지가 아니었다. 아주 평범한 동네 꼬마 녀석들이었다. 녀석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 

"너희가 거지냐! 돈 달라고 하지 마! 아주 나쁜 버릇이야!"

내가 불같이 화를 내자 녀석들은 뒷걸음질 치며 저만치서 주먹을 내보인다. 그리고는 힌두어로 욕 같은 것을 내던져 놓고 골목길로 사라진다. 녀석들은 평소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손을 내밀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몇 푼의 루피를 얻었을 것이다.

지금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보기 힘들지만, 조만간 관광 철이 돌아온다. 그러면 델리의 부자들이며 외국인들이 몰려올 것이다. 아이들은 그들 앞에 손을 내밀며 "10루피!" 하고 요구할 것이다. 관광객들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그 아이들에게 돈을 건네줄 것이다. 녀석들은 누군가에게 습관처럼 손을 내밀고, 돈을 주지 않는 사람에게 오늘처럼 분노할 것이다. 그 '10루피의 분노'는 생각 없이 '10루피'를 건네주는 사람들에게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겠지.

사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출타한 요기를 기다리며 나무 그늘 밑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호흡을 고르고 있는데 남루한 옷차림의 중년 사내가 앞에서 머뭇거렸다. 뭔가 말을 걸고 싶은 듯했다. 그의 옷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옷보다도 더 남루해 보였다. 신발은 다 떨어졌다. 얼굴은 형편없이 일그러져 있었다.

"네팔 사람입니까?"
"예."

이곳 코사니에서 가장 힘든 일을 하는 사람들은 대개 네팔 노동자들이었다. 막노동하는 네팔 노동자들은 대부분 비자 없이 국경을 넘어온다. 이른 3월에 인도로 들어왔다가 겨울이 시작되기 전인 9월에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내 앞에 불쑥 나타난 남루한 중년 네팔 사내 또한 막노동꾼으로 인도에 왔을 것이었다. 그는 뭔가 내게 요구하고 있었지만 자꾸 말을 흐렸다. 그 말이 네팔어인지 힌두어인지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영어는 아니었다. 그는 영어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그는 내게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네지 못하면서 내 주변을 서성거렸다. 혹시나 싶어 앉은 자리 옆에 놓여 있던 지갑이 든 천 가방을 슬그머니 무릎에 올려놓았다.

"당신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아무 말도 못 알아듣겠다며 딴전을 피웠다. 그러자 그는 계면쩍은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는 허리가 굽어 있었다. 아마 며칠 전부터 일당벌이가 없어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것 같았다. 또한 저 비실비실한 체력으로 당장 어떤 일도 하지 못할 것만 같았다.

아마 노동자들 사이에서 따돌림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온갖 상상을 해가며 눈을 감았지만 그럴수록 그의 허기진 모습이 머릿속에 깊숙이 박혀 왔다. 그가 뭘 원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음에도 모르는 척한 것이 자꾸만 걸렸다. 지갑에서 100루피를 꺼내 들고 골목길로 꺾어 들어가는 그를 불러 세웠다.

 가파른 길을 오르내리는 힘겨운 일을 하고 있는 네팔 짐꾼.
ⓒ 송성영
"헤이! 유 원트 루피?"

그는 루피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지 내게 다가와 고개를 주억거렸다. 돈을 건네주자 연신 허리를 굽히고 합장을 했다. 나 역시 그에게 합장하자 그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 굽혀 합장한다. 그가 내게 무한한 감사의 표시를 했지만 생각해 보면 조금 전 버스 정류장에서 만난 네팔 사내가 내게 한 끼 식사를 베풀었던 그 자비심을 되돌려 줬을 뿐이었다.

돈을 받아 든 그는 누군가가 알면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주변을 힐끔힐끔 둘러보며 급히 자리를 피한다. 네팔인들은 이곳에 와서 외국인에게 돈을 구걸하는 일을 일절 금지하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구걸하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너무나 치욕적인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거지가 아니었다.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타국에 와서 굴욕감마저 상실한 그를 거지 취급을 한 게 아닌가 싶어 가슴이 아팠다.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내게 짜이를 권했던 사내들. 네팔에서 온 아스팔트 노동자들이다.
ⓒ 송성영
이른 아침 산책길에서 내게 아무런 조건 없이 인도 전통차 '짜이'를 권하는 아스팔트 노동자들, 식사를 대접해 준 버스 주차장에서 만난 네팔 사내. 나는 그들처럼 누군가에게 선뜻 호의를 베풀지 못했다. 오히려 돈 몇 푼으로 그에게 모멸감을 준 것은 아닌가 싶다. 조금 전 그에게 지갑을 강탈 당할까 봐 가방부터 챙기지 않았던가.

나는 인도에 와서 네팔 사람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차라리 그가 당당하게 돈을 요구하는 인도의 거지였으면 싶었다. 그랬다면 나 또한 아무런 미안함도 없이 돈을 건넬 수 있었고 그 또한 아무런 거리낌 없이 돈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하게 불행한 사람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그보다 돈이 더 많을 뿐이지 그와 나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 역시 어중간한 인간이었다. 누군가가 내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을 의심했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소매를 걷어붙이고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했다. 나도 그저 가슴 아파하는 불행한 인간이었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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