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보는 쾌감, 올려보는 굴욕.. 씁쓸한 마천루

서부원 입력 2015. 8. 29.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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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말레이시아 가족여행기 ⑦]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것

[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

▲ 한낮 쿠알라룸푸르의 도로 상황 늘어나는 고층 빌딩은 필경 교통 체증을 심화시킬 수밖에 없다.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도로는 늘 이랬다.
ⓒ 서부원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는 19세기 중반 주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유입된 중국인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도시다.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밀림이었던 데다 말라리아가 창궐하는 등 입지 조건이 좋지 않았지만, 식수원이자 교통로인 강이 합류한다는 이유로 선택된 땅이다. 쿠알라룸푸르는 말레이어로 '두 강이 만나는 곳'이라는 뜻이다.

연중 고온다습한 열대우림기후 지역이지만, 지금 쿠알라룸푸르에서 울창한 밀림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도시의 바닥은 대부분 아스팔트로 '코팅'되어 있고, 밀림 대신 하늘을 찌를 듯한 고층 빌딩들이 숨 쉴 틈 없이 빽빽하다. 여느 도시라면 으레 있기 마련인 도심 공원도 드물고, 도로변의 그 흔한 가로수조차 쿠알라룸푸르에서는 희귀하다.

명색이 도시 이름의 어원이 된 두 강에도 초록빛은 사라졌다. 도심을 관통하는 두 강은 이미 직강공사가 끝나 콘크리트로 된 두꺼운 벽에 수조처럼 가둬져 있다. 가장자리와 바닥이 모두 회색이어선지 물빛도 온통 잿빛이고 물고기는커녕 수초 한 포기 있을 것 같지 않다. 건기인 탓도 있겠지만, 강폭으로 보건대 차라리 도랑이라 불러야 맞을 듯 싶다.

우리 가족이 닷새 동안 묵은 숙소는 도심 한복판에 있었다. 명색이 호텔인데도 창문을 열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란 죄다 콘크리트 빌딩들뿐이었다. 게다가 대낮에 과연 햇볕은 드나 걱정될 정도로 다들 훤칠했다. 환기는커녕 내다볼수록 숨이 막혀 밤이고 낮이고 아예 블라인드를 내린 채 지냈다. 방의 천장까지 유독 낮아 순간 숙소가 감옥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숨막히는 회색도시, 볼 게 없다

▲ 높이 421미터의 KL타워 쿠알라룸푸르에서 '유일한'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체감하는 높이는 훨씬 더하다. 페트로나스 트위타워와 함께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관광명소다.
ⓒ 서부원
'회색 도시' 쿠알라룸푸르의 랜드마크는 KL 타워와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다. 쿠알라룸푸르를 넘어 말레이시아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열쇠고리나 메모꽂이, 티셔츠 등 관광지에서 파는 온갖 기념품들의 '유일한' 디자인 소재로, 실상 그것 아니면 딱히 살 게 없을 정도다. 심지어 현지 방송사의 TV 뉴스도 이 두 건물을 나란히 담은 화면을 배경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둘은 쿠알라룸푸르 최고의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KL 타워는 높이가 421미터에 이르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고층 타워다. 더욱이 대부분이 평지인 쿠알라룸푸르에서는 드물게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 빌딩 숲속에서도 유독 도드라져 보인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도시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데, 맑은 날에는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믈라카 해협까지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높이로 치자면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더 앞에 둬야 한다. 88층짜리 건물로, 높이가 452미터에 달한다. 현재 세계에서 여덟 번째로 높은 건물이라는데, 쌍둥이 빌딩으로는 앞으로도 당분간 세계 1위라는 타이틀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우리나라의 한 건설사가 일본 업체와 경쟁하듯 완성한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똑같이 생긴 두 건물 사이에는 화해를 상징하듯 육교가 놓여 있다.

그러나 조만간 세계는커녕 말레이시아 내에서도 그 '명성'과 '지위'를 내려놔야 할지도 모르겠다. KL 타워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군데군데 살갗이 벗겨진 빈 터가 보이는데, 그 위엔 어김없이 크레인과 굴착기들이 명령을 기다리는 듯 잠시 멈춰서 있다. 그곳마다엔 머지 않아 고층빌딩이 세워질 것이다. 보아하니 얼마 전까지는 울창한 숲으로 덮여 있었을 만한 자리다.

2019년까지 쿠알라룸푸르에는 635미터 높이의 빌딩이 또 세워질 계획이라고 한다. 'KL 118'로 이름 붙여진 이 마천루가 들어서게 되면, KL 타워와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는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하고 사람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날 게 뻔하다. 그때 다시 KL 타워를 찾는다면, 지금처럼 발아래 건물들을 내려다보는 '쾌감'만큼 고개 들어 올려다보는 '굴욕' 또한 경험하게 될 것이다.

'KL 118'이 완공되면 세계 일곱 번째 고층 건물로 등극(?)한다. 듣자니까, 페트로나스 트윈타워를 비롯한 말레이시아의 내로라는 고층 빌딩은 죄다 우리나라가 건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 화려한 이력 때문인지 'KL 118'도 우리나라 굴지의 건설사들끼리 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자부심이 들지 않는 이유는 뭘까.

수십 층짜리 빌딩들이 '왜소해' 보이는 쿠알라룸푸르의 수그러들지 않는 건설 붐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828미터짜리 두바이의 부르츠 칼리파도 곧 따라잡을 태세다. 부르츠 칼리파의 두바이를 넘어설 수 있는 나라는, 지금 세계에서 중국과 말레이시아밖에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마천루 경쟁에서의 'G2'라는 조롱 섞인 표현이다.

▲ 메르데카 광장의 깃발탑 '세계 최고'라고 자랑하는 우뚝 선 깃발탑. 주변에 고층 빌딩이 즐비해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존재감'이 그닥 없다.
ⓒ 서부원
1957년 말레이시아의 독립을 선포한 유서 깊은 메르데카 광장조차도 완전히 고립됐다. 푸른 잔디가 깔린 광장은 그늘져 숨어 있고, 오로지 곧추 선 게양대 위의 국기만 늠름하게 펄럭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올려다보면 모를까, 먼발치에서 보면 주위 빌딩에 압도된 채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느껴진다. 그런데도, 안내문엔 높이가 100미터로 국기 게양대로는 '세계 최고'라고 적혀 있다.

'세계 최고'라고 치켜세워놨지만,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듯, 이는 잘못된 정보다. 다른 여러 나라의 사례를 굳이 찾아볼 필요도 없다. 휴전선 비무장 지대를 사이에 두고 세워져 있는 남북한의 국기 게양대를 모르고 한 소리다. 한참 작아 보이는 우리나라 게 100미터고, 북한 것은 무려 158미터다. 이미 기네스북에도 등재된 상태다.

아무튼 말레이시아는 빌딩과 타워, 심지어 국기 게양대에 이르기까지 '1위'와 '최고'를 자랑하며 지금도 그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안달이 난 듯하다. 고층 빌딩 숲의 스카이라인이 지평선을 대신하는 도심에는 '관광대국'의 꿈을 담은 광고물이 곳곳에 내걸려 있다. 과연 '세계 최고'의 건물이 즐비한 쿠알라룸푸르는, 그들의 바람대로 '관광대국'의 수도가 될 수 있을까.

쇼핑에만 골몰하는 관광객, 빈약한 문화

시내 여행 중 만난 외국인 관광객들이 말하는 쿠알라룸푸르 여행에 대한 공통된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건, 위에서 내려다보건, 볼 것이라곤 '빌딩'뿐이라는 것과, 그들이 여행 온 목적이 하나같이 '쇼핑'이었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제 몸보다 큰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이곳 쿠알라룸푸르에서는 어디서든 쉽게 만날 수 있다.

▲ 말레이시아 왕궁 전경 몇 해 전 이사한 새 왕궁 입구의 모습이다. 내부는 비공개이며, 근위병 교대식이 볼거리다. 거대한 규모이지만, 언뜻 레고 블록 같은 느낌을 준다. 옛 왕궁 자리는 쿠알라룸푸르에서 가장 큰 녹지 중의 하나로 남아있다.
ⓒ 서부원
혹, 그들의 '단출한' 역사 때문일까. 초라한 박물관과 미술관 대신 화려한 쇼핑몰과 고층 빌딩으로 무장한 쿠알라룸푸르가 언뜻 가엾게 느껴졌다. 섣부르지만, 어디서든 보고 들을 수 있는 '1위'와 '최고'라는 자찬도 어쩌면 자격지심의 또 다른 표현은 아닐는지. 고무도, 주석도, 밀림도, 메르데카(독립)도, 나아가 이슬람교까지도 더 이상 말레이시아를 대표하지 못한다. 단언하건대, 지금 말레이시아의 상징은 마천루다.
숨 막히는 빌딩 숲 사이를 며칠 동안 거닐면서 랜드마크의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떠올리게 하는 곳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뭐라 답할까. 모르긴 해도, 아직 여의도 63빌딩을 손꼽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몇 년 뒤 잠실 롯데타워가 완공되면 그 '지위'를 이어받을 테고 말이다.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씁쓸하다. 이걸 반면교사라고 해야 하나.
○ 편집ㅣ박순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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