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시험'은 과연 공정한가

이경원 기자 2015. 8. 2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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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 위에 오른 사법시험 존치 논란

대한민국은 시험 공화국입니다. 대학에 가려면 수능을 봐야하고, 공직에 나가려면 '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통과해야 합니다. 기업도 필기시험이란 게 있습니다. 시험을 잘 보면 무탈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일종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이 때문에 대한민국은 시험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갑니다. 엄청난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자칫 운이 나빠 시험을 망치면 재수가 없으려니 체념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합니다. 한 번의 실수로 평생을 좌우하는 현실이 불만스러울 법도 한데, 군소리가 별로 나오지 않습니다. 어찌됐든 시험은 공정하기 때문입니다.

작년 저는 교육기자였습니다. '물(水)수능' 사태로 난리도 아니었던 그 때입니다. 최근 몇 년간 교육부는 공교육 정상화와 사교육 절감을 위해 생활기록부 비중을 늘리고 수능 의존도를 낮춰오는 정책을 펴왔습니다. 수능을 쉽게 내 변별력을 낮추면 그만큼 중요도가 떨어질 테니까요. 하지만 시험에 대한 대한민국의 신뢰는 가히 절대적이었습니다. 작년의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됐던 쉬운 수능, 그러니까 시험의 영향력을 줄여나가는 흐름에 대한 불만이 곪아터진 결과였습니다. 심지어 학력고사를 부활하자는 말까지 나왔습니다. 학생부니, 입학사정관제니, 특기자 전형이니 이런거 말고, 점수별로 입학시켜 군말 안 나오게, 달리 말하면 '공정하게' 선발하자는 말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 싶습니다. 시험은 정말로 '공정'한가요.

저는 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고입 성취도 평가란 걸 봐야 했습니다. 시험 성적에 따라 고등학교 별로 커트라인이 있었습니다. 서울대 가장 많이 보내는 학교는 200점 만점에 커트라인 185점, 그 밑에 학교는 170점, 이런 식입니다. 일단 학교에 지원하고, 떨어지면 후기 시험을 봐야했습니다. 제가 다녔던 중학교는 남자 중학교였는데 전교생 600명 중에 가장 좋다는 명문 ○○고등학교에 15명 정도가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점이 있었습니다. 신도시 지역, 그 중에서도 평수가 가장 넓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많이 다닌다는 중학교에서는 남학생 300명 가운데 60명이 ○○고등학교에 합격했습니다. 600명 중에 15명, 300명 중에 60명. 수치로 따지면 8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당시엔 머리가 작았을 때라 "신도시 애들이 공부를 잘하는구나." 이렇게 별 생각 없이 넘겼던 것 같습니다. 커트라인이라는, 너무나 명확한 '수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점만 높아도 내가 너보다 낫기 때문에, 군말이 나올 이유가 없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하면, 시험이 공정하다는 건 어쩌면 착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시험 역시 잘 사는 사람에게 확실히 유리했거든요. 다만, 그 결과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경제적 배경에 대한 고민을 쉽사리 못하게 만든다는 맹점이 있다는 거죠. 마찬가지로 대학 입시에서 다른 요소 하나도 반영하지 않고, 100% 수능 성적으로만 학생을 선발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좋은 대학일수록 부유층 자제들이 훨씬 많을 것 같습니다.

물론, '개천의 용' 신화란 게 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의 주인공 장승수 변호사의 성공담을 시간 날 때마다 강조했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주경야독하며 1996년 서울대 입시에서 인문계 전체 수석을 했던 인간 승리의 주인공입니다. 장승수 씨는 지금까지도 대입 신화의 주인공으로 회자됩니다. 시험이 없었다면 장승수 신화가 가능했겠냐는 거죠.

하지만, 요즘처럼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환경 속에서 예전 같은 '개천의 용'은 보기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시험은 모두를 같은 지점에서 출발시키지만, 누구는 어릴 적부터 몸에 좋다는 건 다 먹고 자랐고, 누구는 라면만 먹고 커왔습니다. 그 영양분의 격차는 양극화가 진행될수록 더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개천의 용'은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이상치'에 가까워 졌습니다. 라면만 먹은 사람이 경기에서 이기는 건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어려워졌다는 거죠.

논란이 됐던 사시 존치 문제도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요즘 이 문제가 뜨겁습니다. 올해 초, 국회를 출입하면서 우연찮게 사시 존치 문제를 취재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로스쿨은 현대판 음서제로 전락했고, 계층 사다리 역할을 할 채용 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최근 서울대 이재협 교수팀이 최근 발표한 '로스쿨 출신 법률가, 그들은 누구인가'란 논문은, 사법시험이 계층 사다리 역할을 하는지 의문을 제기합니다. 논문은 로스쿨 1~3기(2009년~2011년 입학)와 사법연수원 40~43기(2009년~2012년 입소) 설문조사 결과, 부모가 의사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인 경우가 로스쿨 18.5%, 연수원 출신 16.7%로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둘다 대한민국 평균보다 확실히 많죠. 로스쿨이 도입되지 않았더라도 사회경제적 배경 수준이 높은 집단이 법조 직역에 더 많이 진출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즉, 현대판 음서제 논란은 로스쿨 제도 자체가 가진 한계라기보다는, 날로 심화되는 사회적 양극화, 이 때문에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반영입니다.

물론, 로스쿨에 대한 문제 제기, 역시 공감합니다. 내막이 어찌됐든 로스쿨의 비싼 등록금은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진입 장벽을 높게 만든 건 사실입니다. 다만, 그 대안이 '시험'일 수는 없습니다. 계층 사다리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한계는 로스쿨이나 사법시험이나 고스란히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이런 분위기는 더 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계층 사다리'는, 애당초 출발점을 달리 만들어주는 방법, 가령 어려운 사람들을 배려하는 전형 혹은 채용 방식이 어쩌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쉽지는 않을 겁니다. 소외 계층에 대한 규정문제, 틈새를 이용한 도덕적 해이, 여기에 소외계층에 대한 혜택을 '비공정성'이란 범주에 가둬버리는 우리사회의 폐쇄적 시선도 쉽게 극복되진 않을 테니까요. 일부 대학에서는 입학 전형에 따라 서열을 만드는 식의 '계급 놀이'가 유행하고 있다죠. 다만, 사법시험이 '계층 사다리'가 되고, '개천의 용'의 산파 역할을 하기엔, 우리 시대의 양극화가 너무 많은 길을 와버린 것 같습니다.이경원 기자 leekw@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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